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013.22022194448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4> 전차, 유라시아의 역사를 바꾸다
무적의 파라오 람세스도 떨게 만들었던 '전차 왕국 히타이트'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10-12 19:53:25 | 본지 22면
- 기원전 17~12세기 메소포타미아서 거대한 왕국 건설했던 히타이트족
- 전차를 강력한 전쟁무기로 개량…인근 소국 잇따라 복속시켜 병합
- 기원전 14세기 '키쿨리문서'에는 건초·마굿간·말조련법 등 기록도
- 3000여 년 전 세계사 뒤흔든 전차 원천기술 개발한 안드로노보문화인…시베리아 초원지대서 살았던 민족
전차(chariot)라고 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영화 '벤허'의 전차경기 장면을, 젊은 사람들이라면 '글래디에이터'의 전차를 떠올릴 것이다. 말이 탈 것에서 무기로 바뀌면서 서양 고대문명에서 전차는 힘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차의 기원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시베리아의 초원이었다.
■전차의 기원은 시베리아 초원
히타이트인을 공격하는 람세스 2세. 룩소르신전의 탑문에 새겨져 있다.
말이 끄는 수레를 무시무시한 무기인 전차로 바꾼 사람들은 기원전 20세기 경 서부 시베리아와 우랄산맥에서 살았던 안드로노보문화인이다. 토볼강 근처의 신타샤 유적에서는 청동무기와 함께 두 마리의 말과 전차가 함께 묻힌 세계 최초의 전차가 발견되었다. 안드로노보문화 사람들은 기원전 20~13세기에 시베리아 초원에 살았던 인도-이란인 계통으로 아리안족의 선조이다. 2차 대전 중 히틀러는 순수한 아리안족의 보존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수많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살상하였는데, 정작 그가 생각하던 그 위대한 '아리안'족은 엉뚱하게 시베리아에 있었다.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수많은 피해를 내고 결국 전쟁에서 패하는 원인이 됐던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안드로노보문화의 서쪽 경계에 해당한다. 히틀러가 존경하던 아리안족 '조상님'의 음덕이 엉뚱하게 발현된 셈이다.
안드로노보문화의 전차는 기원전 18세기 경에 근동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기원전 13세기 경에는 근동의 역사를 뒤흔드는 사건을 주도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처음 전쟁으로 맞서는 그 중심에 전차가 놓였던 것이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숙명의 한판, 카데쉬전투
이집트 벽화에 묘사된 히타이트의 전차. 가운데 병사가 방패를 들고 있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를 읽은 독자라면 람세스가 메소포타미아의 신흥강국인 히타이트와 결전을 벌였던 카데쉬전투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전투는 나일강 안에서만 살던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과 최초로 힘 대결을 한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집트는 알아도 히타이트는 무슨 나라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 반 루운의 '고대 문명의 새벽'을 읽은 적이 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대해 간결하고 쉽게 쓰인 이 책에서 어린 나를 사로잡은 구절은 3~4줄에 불과한 히타이트족에 대한 내용이었다. 히타이트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난폭해서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었다'라는 구절뿐이었다. '바빌론제국을 무너뜨릴 정도의 나라인데 그냥 난폭했었다니, 그들은 재미로 한 국가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이었나?' 하는 의문이 일어났었다. 이후 이런 저런 책을 보아도 히타이트라고 하면 세계 최초로 철을 만든 민족이라는 것 이상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세계 고고학의 메카라고 해도 좋을 근동지역에서 기원전 17~12세기 사이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거대한 국가를 이루었던 히타이트는 마지막 남은 미스테리였으나, 1980년대 이후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사(현재의 터키에 위치)가 발굴되면서 그들의 모습이 알려졌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도 히타이트와의 전쟁에서 패자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초의 전차전,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다
최초의 전차무사가 묻힌 신타샤고분 30호에서 출토된 각종 무기들.
대부분의 전쟁에서 싸우는 양측은 모두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고 선전하니 양측의 선전문구만 모아놓으면 모두 승리자인 셈이다. 기원전 1274년 5월에 벌어진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카데쉬전투도 양측의 각각 자기가 이겼다고 기록했으니 종합하면 둘 다 이긴 전투였다. 당시 무와탈리왕이 이끈 히타이트는 3500대의 전차와 3만7000명의 보병(이집트의 기록이니 과장이 많을 것이다)으로 람세스가 이끄는 이집트의 2만여 명의 전차와 보병에 맞섰다.
실제 전투에서는 히타이트 군대는 고작 1000대 정도의 전차만으로 이집트 군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람세스도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집트로 돌아온 후 카데쉬전투는 람세스의 승리로 바뀌어졌다. 람세스는 카데쉬에서 후퇴한 후에 이집트 각지에 승리를 기념하는 기록과 함께 전쟁에서 죽인 적들의 이름을 곳곳에 새겨넣었는데, 그 명단 중에는 무와탈리 왕의 동생 두 명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무와탈리의 동생은 전쟁에 참여한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
최초의 전차를 만든 안드로노보문화권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 기하학적 무늬로 그들의 세계관을 나타냈다.
반면에 히타이트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인 보가즈코이유적에서 발견된 설형문자에 따르면, 패배한 람세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도망갔다고 한다. 누구 말을 믿을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히타이트도 카데쉬를 전쟁 이후 복속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무승부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만만하던 이집트 군사를 무너뜨린 히타이트 의 힘은 바로 전차에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전차에는 두 사람이 타서 한 명은 말을 몰고 또 한 명은 방어도 하면서 화살을 쏘아야 했다. 이에 비해 히타이트의 전차는 세 명이 탔다. 세 번째 병사가 방어를 전담했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공격을 퍼부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전차는 더 많은 무게를 견디어야 했기 때문에 속도가 느려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히타이트는 전차를 경량화시키고 바퀴를 개량함으로 그 단점을 극복했다. 비록 이집트는 카데쉬에서 후퇴했지만 이 전쟁 이후 강력한 전차를 개발하여 강력한 이집트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근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전차 받아들인 히타이트, 메소포타미아 평정하다
세계 최초 평화조약인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협정을 기록한 설형문자 유적.
전차가 승부를 결정한 카데쉬전투 이후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기원전 1259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설형문자로 기록된 이집트-히타이트의 평화조약은 지금 뉴욕 유엔본부 1층에 그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평화를 바라는 유엔의 이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데쉬전투는 결국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되었으니 양쪽 다 이긴 전쟁으로 봐도 되겠다.
나일강이라는 천혜의 요새 속에서 자신들만의 제국을 이루었던 이집트는 자신들의 영광에 도취되어 히타이트를 얕보았을 때 히타이트는 전차로 이집트를 무너뜨렸다. 카데쉬전투가 있기 600여 년 전에 안드로노보인의 전차가 근동지역에 도입되었지만, 파괴력을 지닌 전쟁무기로 개량한 사람은 히타이트인이었다. 히타이트 언어로 기원전 14세기에 기록된 '키쿨리문서(kikkuli text)'는 당시 히타이트인들이 전차에 쓰는 말을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키웠는지 알 수 있다. 건초, 마굿간에서 실제 주행법에 이르기까지 그 세밀함은 요즘의 웬만한 말조련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안드로노보의 전차, 동아시아로
히타이트가 망한 후에 그들은 적대국(특히 이집트)들에 의해 악의적이고 야만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수천 년간을 야만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 하지만 히타이트는 수많은 근동의 여러 제국 중에서 사형을 법적으로 금지한 유일한 나라였다. 함무라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법으로 사람에게 형을 가해봤자 국가적으로 보면 실질적인 이득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또 전차의 개량, 철 제련 등 당시 근동의 다양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부와 힘 있는 군대를 양성시켜서 이집트를 굴복시키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던 히타이트의 모습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베리아 초원을 중심으로 살았던 안드로노보문화의 전차는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로 모두 전파되었다. 남쪽으로는 인더스문명을 파괴시키고 새로운 아리안족의 문화를 일으켰으며, 중국에서는 상나라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황량한 벌판인 줄만 알았던 시베리아 초원지대가 세계 4대 문명을 움직이는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전파시켜서, 약 3000년 전 세계사의 판도를 급속도로 뒤바꾼 원동력이 된 것이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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