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1221/1/BBSMSTR_000000010227/view.do
<49>태종의 세 번째 계책
기사입력 2011.12.21 00:00 최종수정 2013.01.05 07:30
선덕여왕 퇴위 제안 `치욕' 안기고 唐황족으로 王 옹립 `야욕' 불태워
분황사 전탑. 선덕여왕 즉위 초기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필자제공
선덕여왕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낭산, 그 아래에 황룡사 터가 보인다
당 태종 이세민은 신라사신에게 폭탄 선언을 했다. 태종의 말을 들은 신라사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에 가서 그 말을 전할 수도 없었다. 혼자 듣고 삼켜야 할 폭언이었다. 약소국의 외교관이 겪는 흔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치부하기도 그랬다. 그것은 신라 국체의 근본에 관한 이야기라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당태종이 제시한 세 번째 계책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돼 해마다 편안한 날이 없다. 내가 우리 황족 가운데 한 사람을 신라에 보내 그대 나라의 왕으로 삼되, 자신이 혼자서는 왕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호위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를 스스로 지키는 일을 맡기려 한다.”
신라의 주권을 당에게 넘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약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강자의 오만이었다. 하지만 당 태종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시 신라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도 했다.
‘여왕’이라는 점에서 그 통치력에 당 태종이 불신을 표하고 있었다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당의 정보 채널은 다양했다. 642년 8월과 643년 정월에 당나라를 찾은 사신의 보고와 앞서 당나라에 온 어느 승려를 통해서도 태종은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신라 승려는 유력한 진골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신라 왕실과 친연성 있는 혈족이며, 여왕과 개인적으로 친했다.
자장(慈藏)은 638년 신통(神通)을 따라 배를 타고 유학 길에 올랐다. 장안에 도착한 직후 흥화방(興化坊)의 공관사(空觀寺)에서 법상(法常)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공부도 배웠다. 법상은 장손황후의 보살계사(菩薩戒師)였을 정도로 이름이 있었다. 640년 전반까지 광덕방(光德坊)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면서 설법을 했다. 도둑에게 계를 주기도 했으며,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기적의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매일 1000여 명이나 몰려들었다. 당 태종은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자장을 대접했다.
642년 말 대야성이 함락되고 신라가 위기에 처하자 선덕여왕이 그를 불렀다. 그는 당 태종에게 귀국 허락을 받기 위해 장안으로 갔다. 이때 당 황실의 상당한 우대를 받았고, 태종이 보낸 특사들을 만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 심취해 출가한 자장이란 승려는 여왕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녀를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냉철한 태종의 사람들은 그의 그 말속에서도 신라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양면 공격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데 신라여왕은 불교에 심취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신앙에서 밖으로 나와 혹독한 현실을 바라보기 싫어했다.
어려운 국난기에 그녀는 군비 증강에 신경을 쓰기보다 백성들이 존경하는 승려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 물론 어려운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신앙에 매달리고, 그 신앙을 담당하는 승려들은 백성들에게 의지의 대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643년 2월 자장은 당 황실에서 선물한 대장경 한 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지참하고 울산항(絲浦)에 내렸다. 승려는 당시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주체자이기도 했고, 정치에도 간여했다. 당시 승려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승려는 단순히 승려로서의 임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세력의 한 구성원으로서 신라사회의 한 부문에 참여했다.
자장은 신라 승려들 가운데서도 최고였다. 여왕은 자장이 오자 그를 불교계의 수장 대국통(大國統) 자리에 임명했다. 여왕은 자장을 통해 불교 교단을 그녀의 손에 두고자 했다. 자장은 정치승(政治僧)들의 수장이었다.
자장은 불교 교단을 정비했다. 이는 ‘속고승전’에 잘 나와 있다. 그는 교단을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 정학녀(正學女),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의 승니(僧尼) 5부(部)로 조직한 다음 교단을 감찰하는 기구로 강관(綱管)을 설치했다. 자장은 강관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 교단을 직접 통제하고자 했다.
그리고 승려들에게 계율을 강조했다. 15일마다 계(戒) 강의를 듣게 하고, 율(律)에 의거해 참회케 했으며, 봄과 겨울에는 시험을 치러 계율을 지켰는지 여부를 알게 했다. 또한 순사(巡使)를 둬 지방사찰에 대한 감독도 강화했다.
자장이 불교계를 숙청하고 교단체제를 재정비해 나갈 때 중심사찰이 황룡사(黃龍寺)였다. 그곳은 당시 신라국가의 최대 호국사찰이었다. 전사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팔관회(八關會)도 호국적인 성격이 짙은 백고좌회(百高座會)도 황룡사에서 주로 개최했다. 국통이자 황룡사의 주지이기도 한 자장은 황룡사를 성지로 만들기 위해 무리한 일을 꾸몄다.
대야성 함락 후 여왕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대두된 상태였다. 자장은 여왕을 교묘히 두둔했다. 백성들에게 신라 왕실이 부처님과 같은 찰리종(刹利種)이라는 설을 유포해 왕실 혈통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자장은 여왕을 부추겨 황룡사 구층목탑(九層木塔) 건립이라는 고비용의 대토목공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처의 뼈인 불사리를 넣은 거대한 탑을 만들어 대야성 패전으로 인해 흐트러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불사리를 봉안한 탑이 여왕과 백성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채색이 절대 필요하다. 하지만 신라 군부를 이끌어가던 장군들의 시각은 달랐다. 어디까지나 국력을 탕진하는 건축이었다. 그들에 보기에 현실 감각이 없는 지도자가 통치자의 자리에 있는 신라는 희망이 없었다.
백성들은 이미 전쟁터에 아버지와 남편ㆍ아들을 보냈다. 돌아온 자는 많지 않았다. 백성들은 중세(重稅)에 짓눌리고 있었다. 생산된 곡물을 나라에 모두 바쳐 백성들은 굶주렸고, 그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황룡사 목탑 수축에 들어갈 목재를 자르고 운반하는 일에 나서야 했다.
병사들을 한 명이라도 더 무장시켜 전선에 투입해 백제군의 낙동강 도하를 막아야 하는 군인들이 보기에 여왕이 하는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해낼 수 있는 것은 군사력인데 그 기층이 되는 백성들을 군사와 관련 없는 일에 축내고 있었다. 전쟁이 만성화된 시기에 여왕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군부의 장군들이 아니라 자장이란 승려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동시에 보이는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이 당시 신라군부의 수장이었다. 636년 5월 두 장군은 현 경북 성주 부근의 옥문곡(玉門谷)에 잠복하고 있던 백제군을 찾아내 전멸시킨 바 있다. 특히 필탄(弼呑)은 647년에 여왕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귀족회의 의장 상대등 비담(毗曇)과 동일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 태종의 ‘여왕 퇴위’ 발언은 당장 신라에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됐다. 태종을 만난 사신이 여왕폐위론을 신라에 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 아래의 사람들이었다. 수행원들이나 종자(從者)들을 통해 말이 퍼져나갔고, 나중에 가서 여왕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아는 만인의 비밀이 됐다.
당 태종의 발언은 4년 후 신라조정을 분열시켰다. 군부 내에 지분이 적었던 김춘추와 김유신 일파는 여왕을 지지했고,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기성세력인 비담과 염종 등은 여왕을 폐위시키려 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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