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0706/1/BBSMSTR_000000010227/view.do


<26>신라의 병역제도

기사입력 2011.07.06 00:00 최종수정 2013.01.05 06:58


전쟁 소용돌이 3년은 의무화 재연장 다반사


신라시대 가실이 복무했던 정곡(正谷)이 위치한 경남 산청읍의 전경이다. 남강이 흐르고 있다. 강은 흘러 진주를 거쳐 함안, 의령에서 낙동강 본류에 닿는다. 이 수로는 지리산 전선 방어를 위한 군수물자 운반의 중요한 통로였다. 필자제공


624년 백제가 지리산을 넘어 함양ㆍ산청지역을 차지하기 직전의 시기였다. 신라의 왕경 사량부에 가실이란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가 이웃 동네 율리(栗里)의 한 여자를 좋아했다고 ‘삼국사기’ 설씨녀전은 전하고 있다.


설씨의 딸(薛氏女)이라고 불리웠던 그녀는 가난했지만 단정했고, 행실이 좋았으며,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남자들은 누구나 그녀를 흠모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러던 그녀에게 고민이 생겼다. 병들고 나이 많은 아버지에게 국가는 또다시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다.


가을까지 정곡(正谷:산청읍 정곡리)에 도착해서 백제와의 국경에서 수비 근무를 하라고 명했다.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국가의 부름을 받고 여러 차례 전쟁터에 나가 싸웠다. 하지만 백제ㆍ고구려ㆍ왜의 공격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한 국가는 그를 또다시 불러냈다. 신라인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병역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아버지가 그 추운 지리산의 바람을 맞으며 올겨울을 넘길 수 있을까? 그녀는 여자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무남독녀인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를 대신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 은연중 소문이 퍼졌다.


가실도 설씨녀의 소식을 들었다. 무언가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생겼다고 생각한 그는 용기를 내 다가갔다. “저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뜻과 기개를 자부했습니다. 원컨대 이 몸으로 아버지의 일을 대신케 해 주시오!”


당시 병역에서 대역은 용인되고 있었다. 국가는 개인의 사정을 고려치 않고 가혹한 부담을 지웠다. 하지만 대역을 문제 삼지 않는 느슨한 면도 있었다. 국가가 부르면 언제나 가야 하는 엄격한 병역의무 이행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국가는 백성들에게 부가할 전체적인 병사 수효 부과에만 신경을 기울였을 뿐 국역(國役)이 어떻게 개별적으로 형평성 있게 부여됐는가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다.


설씨녀는 기쁜 마음에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했다. 아버지가 가실을 불렀다. 듣건대 이 늙은이가 가야 할 일을 그대가 대신해 주겠다니 기쁘면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소. 보답할 바를 생각해 보니 그대가 우리 딸을 받아주면 어떠하오. 가실이 두 번 절하면서 말했다. “감히 바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가실이 바로 혼인 날짜를 잡자고 하니, 설씨녀가 변경 복무를 갔다가 교대해 돌아온 후 혼례를 올리자고 했다. 그리고 설씨녀는 약속의 표징으로 자신의 거울을 반으로 쪼개 가실에게 주었다. 가실은 떠나기 전에 자신이 키우던 말을 설씨녀에게 맡겼다. “지금 내가 떠나면 이 놈을 키울 사람이 없습니다.”


가실은 산청으로 떠났다. 624년 그가 부대에 배치됐을 즈음 마침 백제의 대군이 지리산을 넘어와 함양ㆍ산청지역에 있는 6개 성을 포위했다. 백제군은 강했다. 신라에서 5개 사단의 원군이 왔지만 백제군과 대결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신라의 원군은 백제군에게 포위된 성들을 방치하고 떠났다. 희망이 사라진 신라군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성들이 하나씩 함락됐고 결국 모두 백제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성을 지키던 눌최가 그 노비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소문이 왕경까지 들렸다. 가실의 행방이나 생사마저 묘연한 가운데 설씨녀는 약혼자의 귀환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가실은 언제 화살을 맞고 죽을지도 모르는 그 지옥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는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죄로 다시 군복무를 해야 했다. 기한이 3년이었으나 6년이 넘어가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교대해 줄 사람이 있어도 투입해야 할 절대 병력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혼기를 놓칠 수 있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과 혼인할 것을 강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긍하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는 처음에 3년으로 약속을 했는데 지금 기한이 넘었으니 다른 집에 시집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설씨녀가 대답했다. 지난 번에 아버지를 편안히 해 드리기 위해 가실과 굳게 약속했습니다. 가실이 약속을 믿고 군대에 가 6년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서 고생이 심할 것이고, 더구나 적지에 가까이 있음에 무기를 놓지 못해 마치 호랑이 입 앞에 있는 것 같아 항상 물릴까 걱정할 것인데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혼례 날짜를 잡았고, 원치 않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그런데 그때 행색이 거지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마른 나무처럼 야위어 늑골이 드러났고 옷이 남루해 볼 수가 없었다.


가까운 사람초자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만큼 그는 극심한 고생을 했다. 그가 반쪽 거울을 설씨녀 앞에 던졌다. 놀란 설씨녀는 그것을 주워들고 자신의 반쪽과 맞췄다. 그리고 흐느껴 울었다. 후에 둘은 혼인했고 백년해로했다.


군역의 대역, 만남과 이별, 이 아픔의 모든 것에는 국가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설씨녀의 이야기가 이처럼 기록에 남아 전해진 것은 비슷한 처지에서 불행한 삶을 이어가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의 폭넓은 사회적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유독 그녀의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다른 대부분의 사람이 재회라는 그러한 결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병역의무를 다하다가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결혼하지 못한 사람도 수두룩했다. ‘삼국유사’에 장가를 가지 못해 승려가 된 진정법사(眞定法師)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고의 이상인 불법(佛法)을 깨닫기 위해 그가 출가했다고 하지만, 가난이 그를 불가로 몰아넣었던 흔적이 역력하다.


진정은 승려가 되기 전에 군대에 예속돼 있었다. 가난해 장가도 들지 못했다. 집안에 재산이라고는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 죽어서야 끝이 나는 병역은 백성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족쇄였다.


국경지대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진정의 경우 군복무를 하는 도중에 잠시 나는 여가를 이용해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홀어미를 부양했다. 끝이 없는 전쟁이 지속되던 7세기의 고대인들은 이토록 억눌린 삶을 살아야 했다.


가실의 경우 3년에서 6년으로 병역기간이 연장되더라도 그 변동에 대해서 가족에게 통고해 주지 않았다. 가실만이 6년 동안 종군한 것이 아니다. 전후 정황으로 보아 가실과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 종군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된다. 진평왕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비 부담을 위한 세금도 무거워져 갔다.


진평왕대 민생 경제 파탄으로 기본적인 법규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이 시기의 ‘일본서기’ 를 보면 “신라 백성들이 (우리 왜국으로) 많이 귀화해 왔다”라고 한다. 신라를 떠나 왜국으로 밀항하지 못한 사람들은 ‘삼국사기’ 진평왕 50년(628) 기록에 보이듯 자식을 팔아 연명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자식매매는 죄로 정해 엄격히 금지된 터였다.


멀쩡한 자신의 아이를 거래한 것은 도덕적 기준조차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도록 그들을 국가가 몰아붙였기 때문이었다. 원숭이같이 그들이 무지몽매했다고 치더라도 자식을 파는 행위에 갈등이나 인간적인 고뇌가 없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도덕가치가 붕괴된 현상이 거듭된 것은 생존의 문제가 얼마나 절박했는가 말해 준다.


그들은 생각했으리라. “노비로 팔려간 자식은 주인이 굶겨 죽이지 않는다.” 대를 이어온 운명의 굴레에서 최소한의 생계조차 보장받지 못한 백성들의 암울한 현실 또한 진평왕대 또 다른 역사의 단면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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