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20611/1/BBSMSTR_000000010417/view.do
<169>돌궐 정복과 이정 장군
기후와 역사 전쟁과 기상
기사입력 2012.06.11 00:00 최종수정 2013.01.05 08:03
기병 3000명 이끌고 기습…돌궐 수도 정양 점령
중원이 혼란스러웠던 남북조 시기, 북방의 소수 유목 민족들은 제각기 세력을 떨쳤다. 그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돌궐이었다. 돌궐은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몇 차례 전투 후에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 신하로서 복종하기로 맹세한다. 당나라로서는 치욕적인 굴욕이었다. 이런 상황을 역전시킨 것은 날씨였다. 6세기에는 자연재해가 잦았던 시기였다. 고기후학에서는 당시 화산폭발이나 소행성과의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기 상공에는 엄청난 먼지들이 베일을 만들어 태양 빛을 가렸다. 지구 기온은 낮아졌고 전염병들이 창궐했다.
돌궐 지역 가뭄·한파로 분쟁·반란 속출 틈타 당태종, 대장군 이정에 돌궐 정벌 명령 내려
힐리가한과 당태종의 전쟁을 그린 영화 ‘정관장가’의 포스터.
당태종 영정.
돌궐병사의 갑옷과 무장.
초원의 풀에 의지하던 돌궐은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힘이 크게 약화됐다. 모욕을 참아 가면서 기다려 오던 당나라에 기회가 온 것이다.
서기 626년, 당태종은 위수 유역에서 돌궐의 힐리가한이 이끄는 20만 기병에 승리했다. 하지만, 돌궐 주력 세력에 큰 타격을 입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돌궐의 힐리가한도 당나라 군사들이 예상보다 우수한 데다 사기가 높은 것을 전투를 통해 알게 됐다.
두 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당태종은 매년 힐리가한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면서 백마를 제물로 한 맹약을 맺었다고 해 지금까지 ‘백마지맹’이라 불린다.
이후 당태종은 돌궐로 인한 굴욕을 갚기 위해 대대적인 군대를 양성했다. 식량을 비축하고 무기를 개선했으며 힘을 비축해 반격을 준비했다. 때마침 돌궐 지역에 가뭄과 강력한 한파가 몰아쳤다. 천재지변으로 살기가 어려워진 돌궐 내부에서는 분쟁과 반란이 속출했다.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서기 630년 정월, 당태종은 대장군 이정에게 돌궐 힐리가한의 군대를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이정(李靖·571~649년)은 원래 수나라 장수였으나 당나라 건국에 참여하면서 큰 공을 세웠다. 이정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그야말로 전설 속의 명장으로 등극했는데, 돌궐과의 전투는 그의 진가를 잘 보여준다.
정월의 북쪽 초원은 강한 바람과 추위와 눈으로 뒤덮인 황량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사는 돌궐족조차 기동하기 어려운 날씨였다. 이정은 돌궐이 이런 날씨에 감히 공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점을 이용했다. 그는 용맹한 기병 3000명만을 이끌고 진격했다. 많은 병력은 기습하는 데 방해가 되고 또 보급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속하게 돌궐 왕의 도성 정양(定襄·대리성, 오늘날의 내몽고와 임격이 남쪽) 수 리 밖까지 진군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인근까지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돌궐의 왕 힐리가한은 “당나라 놈들, 정작 멸망하고 싶은 게로구나. 감히 이곳까지 발을 들이다니!”라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만 명에 달하는 돌궐의 군사들은 분산돼 있었고, 힐리가한의 심장부에는 소수 병력밖에 없었다. 이정은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전광석화와 같이 공격해 들어갔다. 힐리가한은 도망칠 방법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기병 3000명으로 돌궐의 수도인 정양을 점령한 당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때는 엄동설한이었다. 내몽고 지역으로 급히 도망친 힐리가한은 음식 부족과 추위를 막을 의복조차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맹추위로 당나라의 이정이 더 이상 추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힐리가한은 당태종에게 특사를 보내 강화를 청했다. 승리에 기뻐하던 당태종은 제안을 받아들여 특사를 힐리가한에게 파견했다.
특사가 힐리가한과의 강화를 위해 가는 것을 본 이정은 다시 결단한다. “힐리가한은 비록 패했지만 돌궐족의 용맹은 대단하다. 만약 힐리가한이 고비 사막 이북에 있는 회흘이나 설연타 등과 힘을 합친다면 멸망시키기는 어렵다. 나는 정예군 1만 명과 20일치의 식량만을 지니고 다시 기습하겠다. 힐리가한이 강화로 마음을 놓고 있는 이때 재빨리 습격한다면 힐리가한을 생포하고 돌궐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정은 정예군 1만 명을 이끌고 힐리가한의 본거지로 진격해 돌궐의 순찰 기병을 모조리 섬멸했다. 그런 다음 쥐도 새도 모르게 힐리기한의 본거지를 급습했다. 힐리가한은 병력을 모을 틈도 없이 천리마를 잡아타고 도망쳤다가 결국 포로로 잡힌다. 이정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돌궐 부족민 15만 명, 가축 수십만 마리 등을 손에 넣었고 음산에서 대막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당나라로 편입시켰다. 동돌궐이 멸망한 후 당나라는 천하에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소수민족들은 하나둘씩 당조에 신하 되기를 청했다. 당태종이 실질적인 ‘천하의 군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동돌궐의 멸망은 이정이 당조에 세운 가장 위대한 공적이었다. 이로써 북방 변경 지역은 안정을 되찾았고 백성들 역시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당태종이 나라를 부흥시켜 ‘정관의 치’를 이룰 수 있었다. 이정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정은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으며 죽은 후에 당나라 태종의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는 영예를 얻었다.
[Tip]이이제이<以夷制夷>로 돌궐을 정복한 당태종
돌궐(突厥)은 알타이 산맥에서 발원한 철륵의 하위 부족이었다. ‘주서(周書)’ 이역(異域) 돌궐(突厥) 열전은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며 흉노의 후손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돌궐은 6세기 후반 당시 강자로 군림하던 유목 제국 유연을 멸망시켰다. 중앙아시아에서 만주 지방까지 이르는 넓고 강력한 국가를 만든 것이다.
중국도 오랜 분열기의 마침표를 수나라가 찍고 중원을 통일했다. 수나라와 돌궐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돌궐은 수나라와 수차례 대격전을 벌였지만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돌궐이 우위인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는 돌궐 자체가 내부 결속력이 약해 늘 내분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었던 수나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써서 돌궐의 분열을 부추겼다. 583년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적으로 적을 제어하는 ‘이이제이’는 정치나 전쟁에서 사용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을 기막히게 이용한 사람이 당태종이다. 그도 ‘이이제이’ 전략을 이용해 숙적이었던 돌궐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돌궐을 정복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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