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5>제28대(마지막) 보장왕(1) 에서 연개소문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연개소문 (淵盖蘇文)
盖蘇文者乘時進 개소문이 때를 타서 등용되어
令色巧言爲寵卿 교묘한 말로 아첨하며 권신이 되더니
姦回掌上弄國柄 간사하게도 나라 권세를 손바닥 안에 놓고
臨事方便誅良貞 어진 신하를 제멋대로 죽이도다
擅權中外日肆虐 조야에 권세를 부리며 날로 포악해지니
民墜塗炭邦基傾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기울었더라
(후)고려 공민왕 때에 동안거사 이승휴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고려 말의 실정과 그 실정을 가져온 개소문이라는 인물을 가리켜 이렇게 읊었었다. 보장왕의 치세, 태왕보다도 더 인지도가 높은 인물.
[蓋蘇文<或云蓋金>姓泉氏. 自云生水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개소문(蓋蘇文)<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했다.>은 성은 연(淵)씨다. 스스로 물 속에서 태어났다면서 대중을 현혹시켰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자잘한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고려 말의 역사는 보장왕이 아니라 연개소문이 주인공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연개소문. 고려 보장왕 때의 권신(權臣)이자 무신(武臣). 다른 이름은 개금이고, 원래 성씨는 연(淵)씨이지만 《삼국사》 및 《당서》에는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다.(전錢씨로 기록된 것도 있지만 대개 비슷한 글자를 혼동한 것인듯 하다) 당 고조의 휘인 '연'자를 피해 기록이 천씨로 바꾼 것인데, 안정복 영감이 고증해서 그의 원래 성씨가 천씨가 아닌 연씨였음을 《동사강목》에서 명기해 지금은 연개소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기록은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그의 장남이 634년에 태어났으니 고려 남자들이 첫아들 두는 평균 나이를 대략 15세에서 25세 사이로 잡을 때 609년에서 619년 사이쯤 될 것이고, 대략 615년경으로 잡는다면 수와 한참 피 튀기며 싸우고 있을 때는 연개소문은 아직 안 태어났거나 어린애였거나 했을 거라 한다.
<연개소문이 태어났다고 전하는 강화도 고려산.>
지금 강화도의 고려산에는 연개소문과 관련해서 숱한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고려산 북쪽에 있는 시루미산이 연개소문의 탄생지라고 한다. 연개소문이 여기서 태어났고 어려서 이곳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것은 조선조에 편찬된 《강도지(江都誌)》라는 책에 의거한 것 같다. 고려산은 강화도의 진산(鎭山)으로, 하포(蝦浦), 염점포(鹽岾浦), 말오을포(末吾乙浦)의 물과 두모천(豆毛川), 동락천(東洛川), 고려천(高麗川), 오리천(吾里川)의 강물이 모두 고려산에서 발흥해서 바다로 흘러간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
<강화도 오련정. 연개소문이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전하는 우물이다.>
《강도지》에는 고려산에 연개소문이 살았다는 집터까지 남아있다고 적었다. 산의 서남쪽 시루봉 중턱에 있었는데, 산밑에 삼거리저수지에서 왼쪽 산길로 약 5백여 미터 지나면 바로 나온다나. 1993년에는 아예 강화도 고인돌광장 부근에다가 연개소문유적비까지 세웠다. 고려산 주변에는 그가 말을 기르며 달렸다는 치마대(馳馬臺)니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오련정이니 하는 지명유래담을 숱하게 전하고 있는데, 산에 다섯 개의 우물이 있어 거기서 깨끗한 물이 용솟음쳤고, 훗날 고려가 40년에 걸친 대몽항쟁을 끝내고 몽골과 화의를 맺은 뒤, 몽골인들이 여기에 쇳물을 붓고 쇠말뚝을 박아 물줄기를 막고 지맥을 끊어버린 뒤로 그 넘쳐흐르던 물이 그만 말라버렸다고 전한다. 그럼 저기 저 오련정은 대체 어떻게 된건지 참.
<연개소문과 강화도의 연관성을 전하는 조선조의 향토지리지 강도지. 17세기 실학자 이형상의 저술로, 박헌용 등이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다른 강화도 관련 향토지 6종을 모아 같은 제목으로 1932년에 발간했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난데다, 성격이 호탕해서 자잘한 일에 꿍하지 않는 쿨(Cool)한 사나이. 《삼국사》 열전에 기록된 연개소문의 기록은, 우선 이렇게 시작한다.
[其父東部<或云西部>大人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不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嗣位.]
그 아버지인 동부(東部)<혹은 서부(西部)라고도 했다.>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이어받아야 했지만, 국인이 그의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을 미워하여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소문은 머리를 숙이고 뭇 사람에게 사죄하며 그 자리를 임시로나마 맡기를 청하고, 만약 옳지 못한 일이 생기면 비록 버림받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하니, 뭇 사람이 불쌍하게 여기고 마침내 관직 계승을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연개소문의 아들로서 훗날 고려를 배신하고 당에 붙어 벼슬하다 죽은 천남생의 묘지명에는 그의 조부, 즉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이 태조(太祚)이며, 할아버지의 이름은 자유(子遊)라고 했다. 재상직인 막리지, 즉 대대로의 벼슬을 세습했던 모양인데, 물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씨를 연씨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에서 나왔다고 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게 했다'고 한 것은 떼놈들이 의도적으로 욕보일려고 깎아내린 것이고, 그 조상이 물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이 동북아시아에서는 넓게 퍼져있던 시조전설의 하나였다. 중국 동진시대 간보라는 사람이 지은 《수신기(搜神記)》에도 잉어 타고 다닌 사람이나 두 마리 용을 낳은 여자 이야기가 실려있고.(동명왕 추모의 어머니가 수신 하백의 딸이라 하지 않던가.) 왕실에 어떤 일정한 공헌을 하고 성씨를 수여받아 귀척이 되었던 국내성파 구귀척들과는 달리, 그는 평양성 천도 이후 새롭게 부상한 평양성파 신흥 귀척이었다.
[原夫遠系, 本出於泉, 旣託神以隤祉, 遂因生以命族. 其猶, 鳳產丹穴, 發奇文於九苞, 鶴起靑田, 稟靈姿於千載. 是以空桑誕懿, 虛竹隨波, 竝降乾精, 式摽人傑, 遂使洪源, 控引態掩金樞, 曾堂延袤勢臨瓊檻. 曾祖子遊祖太祚, 竝任莫離支, 父蓋金任太大對盧, 乃祖乃父, 良冶良弓, 竝執兵鈐, 咸專國柄. 桂婁盛業, 赫然凌替之資, 蓬山高視, 確乎, 伊霍之任]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본래 샘물에서 났으니, 이미 신(神)에 의지하여 퇴지(隤祉)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곳을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단혈(丹穴)에서 난 봉황이 아홉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청전(靑田)에서 난 학이 천년을 묵어 신령스러움을 지닌 것과 같다. 이것은 빈 뽕나무가 비단을 만들고 텅 빈 대나무가 파도를 따르듯 아울러 하늘의 정기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군주의 대권[金樞]를 가리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에 이르렀음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자유(子遊), 할아버지는 태조(太祚)로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이셨으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전단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밑거름이었고, 봉래산[蓬山高]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였다.
『천남생묘지명』
평양성파 신흥 귀척, 그 중에서도 연씨 일문은 당시 무기이자 화폐의 재료로 널리 쓰이던 '쇠'를 특히 잘 다루었고, 그것을 통해 쌓아올린 재력을 기반으로 창검이나 기사(騎射) 같은 온갖 무예를 익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연개소문의 증조부(남생에게는 고조부) 때ㅡ평양성파 신흥 귀척들이 평원왕에 의해 대거 등용되던 그 무렵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양왕 때에 이르면 연씨 가문은 고려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진 대족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연자유와 아버지 연태조에 대해"이윤(은 탕왕의 재상)과 곽광(한 무제의 재상)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천남생묘지명》이 평가할 정도다.
그렇게, 남생의 묘지명에서 말한 것처럼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쏘는[良冶良弓]' 집안으로서 스스로를 물의 자손이라 칭하는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고려의 동부ㅡ옛 환나부를 이끌던 대인(大人)인 연태조가 죽었을 때, 연개소문이 아들로서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고자 했으나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까칠하고 포악한(?) 성격이 애로사항이었다.
서부(西部)의 살이(薩伊) 연태조(淵太祚)가 죽으니 아들 연개소문이 살이의 직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늘 격렬하게 당을 치기를 주장하므로, 영류왕과 모든 대신과 호족(豪族)들은 다 연개소문을 평화를 파괴할 인물이라고 위험시하여 그가 직위 물려받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는 곧 연개소문의 정치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자기의 소신이 아주 굳어서
“내가 아니면 고구려를 구할 사람이 없다.”
하고 자처하는 인물이었지만 또한 어릴 때 타향과 외국에서 두 번이나 종 노릇한 경력이 있어 굽혀야 할 때 굽힐 줄을 아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다. 직위를 물려받지 못하자 곧 4부(部)의 살이와 그 밖의 호족들을 찾아다니며
“개소문이 불초하나 여러 대인들께서 큰 죄를 가하지 않으시고 다만 직위 계승만 못하게 하시니 이것만으로도 그 은혜가 지극하여, 오늘부터 개소문도 힘써 회개하여 여러 대인들의 교훈을 좇으렵니다. 바라건대 여러 대인들께서는 개소문으로 하여금 직위를 계승케 하셨다가 불초한 일이 있으면 직위를 도로 빼앗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여러 대인이 그의 말을 애처롭게 여겨 서부 살이의 직을 맡아보게 하였다.
<조선상고사> 12편 中
연개소문을 가리켜 조선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라 손꼽으시던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빌어서 소개해봤다. 선생의 글이 아니더라도, 연개소문이 영류왕이나 그 무렵 국내성파 귀척들과는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놓여있었던 평양성파, 영양왕의 대수전쟁에 참가했던 대당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이었음을, 그가 아버지 연태조의 관직을 이어받는 것을 다른 대신들이 반대했다는 《삼국사》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조선상고사>는 읽어보면 《삼국사》보다 자세하기는 한데, 단재 선생께선 대체 이걸 어디서 보신 거지?)
[而凶殘不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그러나 흉악하고 잔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러 대인은 왕과 더불어 그를 죽이기로 몰래 의논했는데 그 일이 누설되었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사실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선생은 영류왕 말년에 있었던, 당 간첩의 나포 사실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해상잡록》이라는 고서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단재 선생께서 이 책을 꽤나 애독을 하셨던지 <조선상고사> 여기저기 인용된 흔적이 보인다)
전에 당 태종이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려고 자주 밀사를 보냈는데 당인(唐人)은 번번이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발각되므로, 남해 가운데 있는 삼불제국(三佛齊國)의 왕에게 뇌물을 주고 고구려의 군사 수효와 군대의 배치와 군용 지리와 그 밖의 내정을 탐정해주기를 부탁하였다. 삼불제국은 남양(南洋)의 한 조그만 나라로 옛날부터 고구려에 호시(互市: 국제 무역)를 하고 조공을 바쳐 그가 오면 마음대로 각지를 돌아다닐 수 있었으므로, 삼불제국의 왕이 이를 쾌히 승낙하고 조공한다 일컫고 정탐할 사선을 고구려에 보냈다. 그래서 사신이 와서 여러 가지를 정탐하여 귀국한다고 하고는 바다로 나가 당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바다 가운데서 고구려의 해라장(海羅長)ㅡ해상경찰장(海上警察長)에게 잡혔다. 해라장은 강개(糠慨)한 무사요, 연개소문을 천신(天神)같이 숭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늘 조정이 연개소문의 계책을 써서 당을 치지 아니함을 분개하다가 이제 당의 밀정 삼불제국의 사신을 잡으니, 그 비밀 문서는 빼앗아 조정에 올리고 밀정은 옥에 가두려다가
“아서라, 적을 보고 치지도 못하는 나라에 조정 같은 게 어딨냐?”
하고 문서는 모두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 사신은 먹으로 얼굴에다가 다음과 같이 글자를 새겼다.
面刺海東三佛齊 해동 삼불제(三佛齊)의 얼굴에 자자(刺字)하여
寄語我兒李世民 내 어린아이 이세민(李世民)에게 이른다.
今年若不來進貢 금년에 만약 조공이 오지 않으면
明年當起問罪兵 명년에 마땅히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키리라.
라는 한시 한 편을 새기고 다시
“고구려 태대대로(太大對盧) 개소문의 군사 아무개가 쓴다[高句麗太大對盧淵蓋蘇文卒某書].”
이라고 덧붙였다. 얼굴은 좁고 글자 수는 많아 먹의 흔적이 흐리어 알아볼 수가 없다하여 다시 그것을 종이에 베껴서 그 사신에게 주어 당으로 보냈다. 당태종이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곧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침노하려고 하니 모시고 있던 신하가 간하였다.
“대대로(大對盧)는 연개소문이 아니니, 이제 사신의 얼굴에 자자한 연개소문이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고, 하물며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연개소문의 부하 군사의 죄로 맹약을 깨뜨리고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먼저 사신을 보내서 밀서(密書)로 왕에게 알아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당태종이 그의 말을 좇아 사실의 진위(眞僞)를 알려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조선상고사> 12편 中
당과 서로 통하고 있었다는 삼불제라는 나라 말인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백제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거나 백제와 관련된 세력을 적은 것이 아닐까 한다.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걸핏하면 《해상잡록(海上雜錄)》을 들먹이면서 거기서 봤다느니 거기 보인다느니 하고 말씀을 하시니 이 이야기도 대충 《해상잡록》이라는 그 책에서 보고 쓴 듯 한데 문제는 그 책이 지금까지 전해지지도 않고 그런 책이 있었다고 적어놓은 책도 없다는거야 썅.
영류왕이 밀서를 보고 군사를 보내 해라장을 잡아다가 문초하였다. 해라장이 강개하여 자백하고 조금도 기탄하지 않으니, 영류왕이 크게 노하여 서부살이 연개소문 한 사람만 빼놓고 다른 여러 살이와 대대로, 울절(鬱折) 등 여러 대신을 밤에 비밀히 소집했는데, 해라장이 당의 임금을 모욕한 것은 오히려 조그만 일이거니와, 그 끝에 태대대로도 아닌 연개소문을 '태대대로'라 쓴 것과, 또 허다한 대신들 가운데 다른 대신을 말하지 않고 홀로 연개소문을 들어 그의 휘하 군사로 일컬은 것을 보면, 저들 연개소문을 따르는 자들이 그를 추대하는 것이 분명하고 또한 연개소문이 항상 당나라 칠 것을 선동해서 조정을 반대하여 인심을 사니, 이제 그를 죽이지 않으면 후환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으니 벼슬을 박탈하고 사형에 처함이 옳다고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였다. 그러나 전날 같으면 한 번 명령해서 군사 한 사람을 보내 연개소문을 잡아오면 되겠지만, 지금은 연개소문이 서부 살이가 되어 많은 군사를 장악하고 있으니, 그 억센 천성이 체포를 받지 않고 열에 아흡은 반항할 것이 틀림없으니, 조서로 연개소문을 잡으려면 한바탕 국내가 소란해질 것이었다. 이제 연개소문이 장성의 축조 역사 감독의 명을 받아 떠날 날이 멀지 않아서 오래지 않아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러 올 것이니, 그때 그의 모반한 죄를 선포하고 잡으면 장사 한 명의 힘으로도 넉넉히 그를 잡을 수 있으리라 하여, 여러 대신들은 왕의 앞에서 물러나와 비밀히 그날이 오기만 기다렸다.
<조선상고사> 12편 中
평소 연개소문을 존경해 마지않던 그 해라장(해상수비대장)의 젊은 혈기가 결국 고려와 당 양국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기에 이르고, 안 그래도 평소에 연개소문 저놈 영 마음에 안 드는데 하고 기분나빠하시던 영류왕께서는 마침내 연개소문을 뺀 모든 대신들을 모아 이 문제를 논의하고,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저 연개소문이라는 남자를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그 양반이 장성 축조 감독 나가기에 앞서서 왕한테 문안인사 드리러 오면 죽이자, 이렇게 계획을 세웠는데, 음원유출.... 아니 계획이 노출됐다.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幷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賓至, 盡殺之. 凡百餘人.]
소문은 부병(部兵)을 모두 소집해 장차 열병할 것처럼 꾸몄다. 또한 술과 음식을 성의 남쪽에 성대하게 차려놓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보자고 했다. 손[賓]들이 오자 모두 죽였다. 무릇 그 수가 100여 명이었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여담인데 연개소문의 쿠데타 시점에 대해서는 《삼국사》와 단재 선생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부식이 영감은 《당서》를 인용해서 영류왕과 대신들이 연개소문을 죽이려 한 것은 연개소문이 장성축조 총감독으로 발탁되어 평양을 떠난 뒤의 일이라고 했고, 단재 선생은 장성축조 총감독으로 발탁되고도 미처 나가지 않고 평양에 남아있던 연개소문을 이른바 '자자 사건'을 빌미로 왕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고 했다고 해서 차이가 있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장성축조 총감독으로 나가기 전이냐, 그 뒤의 일이냐는 뒤에 전개될 역사와는 그닥 상관이 없어보이지만 일단 여기에 적어둔다.
[馳入宮弑王, 斷爲數段, 棄之溝中.]
말을 타고 치달려[馳] 궁궐로 들어가 왕(영류왕)을 죽여버리고, 시체를 수십 토막을 내서 수챗구멍에 버렸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기실 연개소문의 옹호론자, 단재 선생을 포함한 많은 연개소문 지지자들은 그에 대해 '흉악하고 잔인한' 성격이라 언급한 《삼국사》 및 《당서》기록들은, 후대 사람들이 왕을 죽이고 스스로 권력을 쥔 그를 역적으로 몰아세우면서, 고려 멸망의 책임을 전적으로 돌리고자 일부러 왜곡시킨 것이라고 했다. 하기사 '당당함'과 '거만함', '호전성'과 '잔인함'은 서로 종이 한 장 차이. 딴 사람 같았으면 '카리스마가 넘치는 성격'이라고 얼마든지 돌려서 말할 수 있는 것을 유독 그만은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이라고 일부러 직선적으로 표현한 것도 편향적인 감이 짙다. 그가 죽고 얼마 안되어 고려가 멸망했으니, 망한 나라 사람들이 좋게 기록될 수는 없겠지. 살해된 신하가 백명이 넘었대 하고 굳이 숫자를 부기한 것은 이만큼 많이 죽였으니 연개소문은 나쁜놈이다 하고 애써 강조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이보다 더 많이 죽이고도 존경받는 사람도 세상에 널렸거든?
이 무렵 왜에 갔던 고려의 사신에 의해, 이때의 쿠데타ㅡ고려 조정의 변란은 왜국에도 알려졌는데, 《일본서기》 황극기(皇極紀, 고교쿠키)는 실제 시점보다 1년 앞당겨서 왜황 황극(고교쿠) 원년(641)조에 수록해놨다.
[壬辰, 高麗使人, 泊難波津. 丁未, 遣諸大夫於難波裏, 檢高麗所貢金銀等, 幷其獻物. 使臣貢獻旣訖, 以諮云 "去年六月, 弟王子薨. 秋七月, 大臣伊梨柯須彌弑大王. 幷殺伊梨渠世斯等百八十餘人. 仍以弟王子兒爲王, 以己同姓都須流金流爲大臣."]
임진(6일)에 고려 사신이 난파(難波, 나니와)에 왔다. 정미(9일)에 여러 대부를 난파리(難波裏, 나니와리)에 보내어 고려국에서 올린 금은 등, 아울러 그 헌상한(?) 물건을 점검하게 하였다. 사신은 헌상을 마치고 아뢰었다.
"지난해(641년?) 6월에 제왕자(弟王子)께서 돌아가셨소. 가을 9월에 대신(大臣)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가 대왕을 시해하고,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여 명을 죽였소. 그리고 제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동족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았소."
《일본서기(日本書紀, 고교쿠키)》 황극기(皇極紀, 고교쿠키) 원년(641)
《일본서기》에서는 실제 시점(642)보다 1년 정도 앞당겨 기록한 고려의 쿠데타, 그 쿠데타에서 영류왕의 다음으로 옹립된 왕의 아버지 제왕자라면 분명 《삼국사》에서 말한 대양왕일터다. 보장왕 즉위 이듬해(원년) 왕으로 추봉되었던 인물인데, 《니혼쇼키》 기록대로라면 그가 죽은 것은 서기 641년. 그리고 그가 죽은 이듬해에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일어나 영류왕이 살해되고, 제왕자 대양군(고려에서는 봉왕이나 봉작이 아닌 봉군제를 썼던 것 같다)의 아들 장이 신왕으로 옹립되었던 것이다.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支.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
왕제의 아들 장(臧)을 세워 왕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그 관직은 당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직과 같았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부식이 영감은 《당서》를 인용해 이 막리지라는 관직은 '당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과 같다고 설명을 달아놨으니, 오늘날로 치면 국방장관에 국무총리를 겸한 자리쯤 되려나?
이 막리지라는 관직은 고려 제1관등이었던 대대로이며, 다수의 막리지 중에서 3년마다 대대로로 선출된 것이라 보기도 하고, 고려 말기에 귀척 세력이 강해지자 원래 있던 1품 대대로 대신 2품직인 태대형(막하하라지)을 막리지라 해서 정치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게 했다고도 한다. 연개소문 자신이 맡았던 벼슬은 '막리지'이지만, 실제로 연개소문이 역임했던 벼슬은 태대대로, 즉 대막리지라고 알고 있다. 남생의 묘지명에서 이른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대대로였는데 연개소문 자신은 태대대로였으니, 막리지에서 높여서 대막리지라고 불렀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권을 장악한 뒤 뭇 막리지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높다는 의미로 '대(大)' 자를 앞에 붙여서 '대막리지'라는 국정과 병권을 총괄하는 새로운 관직을 신설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른뒤, 대막리지라는 관직을 아예 종신직으로 삼았다. 단재 선생이 말한 이두문 읽기 방식으로 '신크말치'라고 읽는 '대막리지'는 이 시기에는 태왕을 능가하는 최고의 실권직, 일본 막부시대 덴노를 능가하는 쇼군(將軍)의 위상과도 맞먹는 위치였다. 관리 임명이며 국고 관리, 전쟁 선포같은 모든 일을 대막리지가 결정해서 태왕에게 올리면 태왕은 그냥 거기에 도장만 찍어주고 수결만 해주면 끝나는, 고려 역사상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특권을 연개소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리게 된 것이었다.
[於是, 號令遠近, 專制國事, 甚有威嚴. 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 而履之, 出行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迸, 不避坑谷. 國人甚苦之.]
이에 원근에 호령하여 나랏일을 제멋대로 하는데 심히 위엄이 있었다. 온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니 좌우에서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항상 말을 타거나 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貴人)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해서 그 등을 밟고 디뎠으며, 출행할 때에는 반드시 대오를 풀어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긴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구덩이나 웅덩이도 안 가리고 모두 달아나 도망쳤으니, 국인이 무척 괴로워했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연개소문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구당서》에서 인용한 것인데, 원래 《구당서》에서는 '속관(屬官)'을 엎드리게 해서 밟고 올랐다고 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삼국사》에서는 '귀인 무장'으로 바꿔놨다. 온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기에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지를 못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칼을 많이 찬다고 해도 두 자루면 될걸 뭐하러 다섯 자루씩 찰까 싶은 생각을 하면그의 모습이 꽤나 괴이하기는 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연개소문의 캐릭터 이미지.(마음에 들어서 퍼왔음)>
그런데 《한원(翰苑)》이라는 책에 보면, 고려 사람들의 의복에 대해서 이런 기록이 있다.(고려가 망하기 전인 서기 660년에 편찬된 책이라서 고려 말년의 모습을 가장 잘 전하고 있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左佩礪, 而右佩五子刀]
(허리띠)왼쪽에 숫돌을 차고, 오른쪽에는 오자도(五子刀)를 찬다.
오자도라는 건 칼 한 자루에 짧은 칼이 네 자루 붙어있는 칼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칼 한 자루에 네 자루의 단검이 칼집에 꽂혀있다>
대충 얼버무리자면 모두 다섯 자루. 이걸 고려 사람들이 허리띠 오른쪽에 차고, 왼쪽에다는 그 칼을 갈 숫돌을 차고 다녔다는 것.그러니까 고려 사람들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그 나라에서 그리 특별하다거나 할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 풍속이 그렇다는 뜻이다.
연개소문은 그냥 고구려 풍속에서 하는 대로 칼을 다섯 자루나 찬 것 뿐이지, 뭐 특별히 튀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이 다섯 자루나 되는 칼을 어떤 용도로 썼느냐 하는 건데... 단지 대막리지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까?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5>제28대(마지막) 보장왕(1)|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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