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tcha.com.ne.kr/koreaman/goguryo/man7-gomu.htm


미천왕의 아들이며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우이다. 342년(고국원왕 12) 요동(遼東)을 장악한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즉,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세자였던 모용황(291~348년)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용을 닮은 얼굴에 이마가 넓적하고 키가 7자8치(약 234cm)나 되는 거구에다 씩씩하고 용감하며 유교 경전 배우기를 좋아하고 천문(天文)에 능통했었다.

이것은 하북성 업()에 도읍을 정하고 천왕(天王)을 자처하던 후조(後趙)의 석호(石虎, 335~349년)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수륙 양면으로 연나라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도료(渡遼) 장군 조복(曹伏)으로 하여금 청주(靑州; 산동 서쪽의 황하 하구 이남지역) 사람들을 거느리고 발해만 입구의 섬으로 나가 지키게 하면서 곡식 300만섬을 실어다 주었다. 또 배 300척에 곡식 30만섬을 실어 고구려에 주었고 전농 중랑장(典農中郞將) 왕전(王典)으로 하여금 사람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바닷가에서 둔전(屯田)을 일구도록 하였다. 그 다음 다시 청주자사에게 명하여 전선 1000척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내분과 서쪽의 강적인 조나라 때문에 그동안 고구려의 태도가 못마땅했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모용황은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는지 고구려를 침공하여 자웅을 가리려 한다. 그동안 고구려도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꾸준히 군비를 증강해 왔었다.

고국원왕은 고무에게 5만의 정병을 주어 연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된 북도(北道)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소수의 병력으로 험하고 비좁은 남도(南道)를 지켰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모용황이 이끈 주력부대 4만은 모용한과 모용패(覇)를 선봉으로 삼아 남도로 침입하였고, 북도에는 장사(長史) 왕우(王寓)가 이끈 1만 5000의 군대가 침입하였다. 이에 남도를 지키던 고국원왕은 크게 패하였으나, 북도를 지킨 그는 왕우의 연나라군을 섬멸하였다.

전쟁의 결과에 초조해진 모용황은 철군을 서둘면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거두어가고,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周)씨와 왕비를 포함한 남녀 약 5만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그를 연왕에게 보내어 미천왕의 시체를 돌려받았다. 즉, 이에 왕궁을 불사르고 성벽을 허문 다음 포로를 이끌고 회군하려는데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라는 자가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귀띔하였다.

“고구려 땅은 군대를 남겨 지킬 수 없는데 이제 그 임금이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졌다 하나 산골짜기에 잠복해 있을 터이니 대군이 가고 나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그 남은 불씨를 거둬들여서 아마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청컨대 그 부왕의 시신을 싣고 생모를 잡아가두어 돌아가서 그(왕)가 스스로 몸을 묶고 귀순해 오면 되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 어루만지십시오.”

이에 황은 고국원왕의 선왕인 미천왕릉을 발굴하여 그 시신을 싣고 미천왕비인 대비 주씨를 비롯한 비빈과 왕족들을 포로로 잡아 급급히 회군해 돌아갔다. 미천왕 생존시에는 모용황의 부친인 모용외가 항상 미천왕에게 패배했었는데, 이제 그 아들대에 와서는 고국원왕의 전략적 실수로 그 화가 미천왕의 시신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야만적이고 비겁한 전술에 밀려 모용황과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저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국원왕은 13년(343) 2월에 왕제를 연나라에 보내 신하를 일컫는 수모를 참아내며 부왕의 시신을 찾아온다. 그러나 저들은 모후를 인질로 잡고 끝내 풀어주지 않아 주대비는 무려 13년 동안이나 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모용황이 죽고 그 아들 모용준(儁)이 등극하여 수도를 계()로 옮기고 황제를 일컬은 지(352년) 3년이 지난 뒤인 고국원왕 25년(355)에야 주대비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모용씨들의 고구려 공포증은 체면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이처럼 심각하였던 모양이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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