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명산성(牛鳴山城)
강원도 춘천과 함경남도(현재 북한의 강원도) 안변으로 비정된다고 합니다.
자료로는
1. 삼국사기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 한국사DB
http://db.history.go.kr/id/sg_020r_0020_0190
삼국사기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영양왕(嬰陽王) 十九年夏四月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 608년 04월(음) )
여름 4월에 신라 우명산성(牛鳴山城)註 035을 쳐서 빼앗았다.
註 035
우명산성(牛鳴山城)은 함경남도 안변군 안변면 동쪽으로 추정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9 安邊都護府 古跡條에 “鐵垣戌-在府東派川社海口 有小石城 世稱戌城 在江原道歙谷縣境 “이라 하였는데, ‘牛鳴’과 ‘鐵垣’은 모두 ‘쇠울’로 공통점을 가진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高句麗의 南進과 對新羅 領域向方 - 장창은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39351&res=yURL
그런데 고구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608년 2월 고구려는 신라 북변에 침입하여 8천명을 사로잡아 회군하였다. 또한 4월에는 신라의 牛鳴山城을 함락시켰다. 우명산성의 위치는 강원도 안변과 춘천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역시 위치 비정의 결과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 간 영역 판도의 결과가 다르게 분석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점에 유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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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08년 2월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고 牛鳴山城[춘천 일대]을 내주고 말았다. 다만 우명산성 전투로 되찾은 고구려의 죽령로 영유에 대한 주도권은 지속되지 못했다. 612~614년 고구려가 수와 국운을 건 전쟁을 치루는 틈에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 500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가 608년에 차지한 우명산성은 신라에 다시 귀속되었고, 신라는 한강 본류 방면에서도 북한산성을 교두보로 하여 북방진출을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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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603년 8월 北漢山城[아차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신라군에 패했다. 신라는 북한산성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604년 南川州를 폐지하고 北漢山州를 다시 설치하면서 한강 이북의 방어체계를 본격적으로 마련했다. 그러나 608년 2월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고 牛鳴山城[춘천 일대]을 내주고 말았다. 다만 우명산성 전투로 되찾은 고구려의 죽령로 영유에 대한 주도권은 지속되지 못했다. 612~614년 고구려가 수와 국운을 건 전쟁을 치루는 틈에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 500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가 608년에 차지한 우명산성은 신라에 다시 귀속되었고, 신라는 한강 본류 방면에서도 북한산성을 교두보로 하여 북방진출을 가속화했다.
3. 그외 참고 자료
https://blog.naver.com/kmji98/220297544237
https://blog.naver.com/giveurhand/15016154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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