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office.kbs.co.kr/tongil1/archives/4308
평양의 도성과 궁성
KBS 날짜: 2006-03-19
오랜 역사의 도시 평양에는 그런 만큼 많은 성터들이 남아있다. 고조선의 왕검성에서 시작하여 낙랑군의 토성이 자리잡고, 그후 이곳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많은 성곽시설을 남겼다. 고구려 멸망 이후 한동안 잡초가 무성한 채로 버려졌던 이곳은 고려의 등장 이후 3경의 하나인 서경(西京)이 되어 다시금 도시가 정비되고, 성곽이 마련되고 궁궐이 지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서북지방의 행정적 중심지로 기능하면서 지속적으로 성곽시설이 보수되었다. 그 결과 평양은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성곽 유적을 갖는 곳이 되었다.
대성산성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처음 장수왕대 고구려가 수도를 옮긴 곳은 지금의 대성산성 일대로 짐작된다. 이 일대에는 평지성인 청암리토성과 산성인 대성산성, 그리고 평지궁성인 안학궁성이 남아있다. 현재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에 위치하는 대성산성은 해발 274m의 을지봉 등 6개의 봉우리를 연결하고 그 안에 큰 계곡을 끼고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의 둘레만도 7km가 넘는다. 안학궁성은 대성산성 남쪽에 자리잡은 평지 왕궁성으로 성곽의 둘레는 2,488m이며, 궁성안의 건물지는 52채이다. 남쪽의 3개의 성문을 통하는 남북 중심축에 따라 3개의 큰 궁전이 배치되어 있다. 청암리토성은 안학궁성과 장안성과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대동강을 남쪽으로 끼고있는 낮은 구릉지대에 5km의 성벽이 자리잡고 있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복원도
이러한 평양의 성곽시설과 그 배치는 사실상 이전의 수도인 국내성의 그것을 계승한 모습이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유사시에는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였다. 물론 평지성은 도시 전체를 포괄하는 큰 규모는 아니고 주로 왕과 관청, 귀족 등 일부 사람들만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산성과 평지성을 하나의 세트로 구성하는 것이 고구려의 독특한 도성 구조로서, 평양 지역에도 다시 구현된 것이다. 아마도 낙랑토성이 대동강 이남에 자리잡은 것과는 달리, 고구려 도성이 대동강 이북에 자리잡은 점도 국내성 때의 지리적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새로 이주를 해서도 웬만하면 그동안 살아본 방식대로 살게 마련이다.
그런데 고구려인들은 평양에서 새로운 도시 구조를 만들었다. 새로운 도성을 계획도시로 구상한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안학궁성 남문에서 대동강다리까지 남북방향으로 주작대로와 유사한 큰 도로를 만들고, 이를 기준으로 좌우의 평지에 田자형 주민거주구획을 설정하였다. 바로 이방제(里坊制)와 유사한 제도가 시행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점에서 평양 천도는 새로운 도시 구상의 실험이기도 하였다.
평양성 외성 도로유적(양 옆이 배수로)
평양의 주요 성곽 및 고분 유적 지도
장안성으로의 천도
평원왕은 586년에 도성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겼다. 천도라고 하지만, 장안성은 기존의 도시에서 불과 십여km 서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장안성의 천도는 평양을 떠나려는 것이 아닌 다른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장안성 천도가 이루어진 해는 수나라가 대국으로 성장하여 중국을 통일하고자 할 때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장안성 천도는 수가 침입할 것에 대비하는 뜻이 있다. 사실 장안성의 축성 자체가 급변하는 대외정세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하였다. 장안성은 양원왕대인 552년에 축성이 시작되었는데, 그 전해인 551년에는 돌궐이 고구려를 침입하였고, 신라가 남방에서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높이는 시점이었다. 또한, 중원에서는 550년에 동위를 대신하여 북제가 건국되고, 서위 또한 몰락을 앞두고 있는 때였다. 머지않아 국가적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고구려는 보다 견고하고 안전한 도성의 필요성을 느껴 장안성을 건립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산성의 방어시설
장안성은 실제로 수나라의 침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612년(영양왕 23년)에 대규모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한 수양제(煬帝)는 요동성에서 가로막히자, 우중문(于仲文) 등이 이끄는 30만 별동부대로 하여금 수군(水軍)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케 하였다. 그런데 내호아(來護兒)와 주법상(周法尙)이 이끄는 수군의 임무는 평양을 직공하는 육군에게 군량과 무기 등을 보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호아는 단독으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들이쳤다가, 장안성 외성 안에 복병을 숨기고 적을 유인한 영양왕의 동생 건무(建武)의 전략으로 패배를 당하였다. 한편 을지문덕에게 유인된 육군은 군량이 부족한 채로 평양성까지 유인되었다. 그러나 평양성을 본 수나라 군대는 그 견고함에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결국, 전의를 잃고 후퇴하던 수나라대군은 살수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이처럼 방어성으로 만들어진 장안성은 그 축조 기간이 42년이나 걸릴 정도로 대역사였으며, 성곽이 자리잡은 그 지리적 위치나 다중 성곽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가장 견고한 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장안성의 지리적 형세를 보면, 성곽의 남쪽에는 대동강이 S형으로 흐르고,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다. 고구려시대 평양성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말의 평양성의 구조에서 단서를 얻을 수밖에 없는데, 평양성은 외성.중성.내성.북성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3km이고, 성안의 총면적은 약 12k㎡이다.
평양성 복원도
또한 각 성의 성격은 내성은 궁성, 중성은 행정기관과 최고위 귀족의 저택이 있는 성, 외성은 일반 주민이 거주하는 성, 북성은 궁성의 보호성으로 추정된다. 각 성의 기능으로 보건데, 외성은 일종의 나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내성에서의 궁전지는 만수대 일대로 추정되며, 또한 북성은 궁성의 후원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외성에서 확인된 도시 유적은 안학궁성 앞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田자형의 거주구역을 갖추었다.
평양성의 구조
장안성에서 고구려인들은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바로 하나의 세트로 구성한 평지성과 산성을 하나의 성곽으로 결합한 것이다. 나아가 주민의 거주지를 둘러싼 나성(외성)을 축성한 점도 새로운 설계이다. 즉 산성+궁성+나성의 3중 구조를 갖춘 장안성은 고구려 도성 성곽 발전의 최종적인 완성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정한 방어력은 견고한 성곽 그것보다는 바로 민심이다. 668년 결국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오랜 영화를 한순간 폐허로 변하게 한 배경에는 지배층의 분열과 민심의 이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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