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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문

한국의 산성


암문(暗門)은 성에서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 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성문(城門)으로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이다. 이름 그대로 비밀스러운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일반 성문보다 작게 하고, 문루나 륙축(陸築) 등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다.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 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을 요청하거나 원병을 받고 역습을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암문은 평지성 보다는 산성에 축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산성의 경우 지형적으로 암문 설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암문은 성의 방어와 관련된 주요한 시설인 만큼 삼국시대부터 축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산성의 기본적인 구조물로서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은 조선시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암문의 숫자는 성의 규모에 비례하기도 하지만 성의 규모보다는 지형적인 여건이 더 고려되었다. 암문은 여러 가지 효용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방어에 어려움이 커지기 때문에 최소한의 암문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암문 내측에는 석축 옹벽이나 흙을 쌓아서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꾸어 암문이 폐쇄될 수 있게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남한산성 암문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한다. 그중 원성에 11개가 있고,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원성에 있는 11개의 암문은 남쪽에 있는 것이 4개로 가장 많고, 동쪽에 2개, 북쪽에 3개, 서쪽에 1개가 분포되어 있다. 암문의 구조는 대체로 평거식(平据式)과 홍예식(虹霓式)으로 구분되는데 남한산성의 암문은 16개의 암문 중 6개는 평거식이며, 나머지 10개는 홍예식으로, 평거식 중 3개는 봉암성에 설치되고 1개는 한봉성에 설치되었으며, 원성에 설치된 암문은 장경사 옹성으로 나가는 곳에 설치된 2암문과, 수어장대 서남쪽에 있는 제6암문의 2개만 평거식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예식이다.


암문의 규모는 기능과 위치에 따라 크기가 매우 달랐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산성 동쪽 수구문 남쪽 20m 지점에 있는 11암문으로 너비는 286cm이고 높이는 307cm에 달하여 성문에 가까울 정도의 크기이다. 반면 가장 작은 암문은 수어장대 남서쪽의 6암문으로 너비는 77cm이고 높이는 155cm여서 성인이 서서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협소하다.


남한산성의 지형적인 특성상 성문이 성의 1/3에 해당하는 서쪽부분에 남문, 북문, 서문이 밀집되어 있고, 나머지 지역에는 동남쪽으로 치우친 동문 하나만이 있어 성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교통에 어려움이 야기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암문이 주요 통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긴 구간에 4개의 암문을 설치하여 신남성과 남동지역으로의 출입이 원활하도록 하였고 그 중 신남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7암문, 검복리 방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8암문이 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쪽부분 특히 1암문이 용미리나 퇴촌 등 동쪽지역의 교통과 물자이동에 중요한 기능을 분담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북문에서 북장대에 이르는 구간은 3암문과, 봉암성의 12암문, 벌봉부분의 13암문이 주로 이용되어 동북지역으로의 왕래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한산성 암문의 경우 장경사 암문, 서암문 등의 명칭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각 암문에 대한 고유명칭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동문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원성부터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봉암성, 한봉성의 순으로 번호를 부여하였다.


제1암문은 동문에서 능선 말단부를 회절하여 장경사를 바라보게 되는 지점에 있다. 다른 암문들은 좌우측의 성벽을 돌출시켜 치나 적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암문 좌우의 성벽은 돌출시키지 않았다. 암문의 개구부(開口部)는 홍예식이며, 개구부의 너비는 127cm이고 지대석에서 홍예종석까지의 높이는 210cm이다. 이 암문 밖은 계곡을 따라 경사가 완만한 소로가 이어지고, 길을 따라 200m 정도 내려가면 큰골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 큰골 굿당쪽에서 제16암문을 통해 벽수골쪽으로 내려가면 동문보다 쉽게 퇴촌이나 43번 국도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암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2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에 설치된 암문이다. 개구부는 평거식이며, 양쪽에 대형의 장방형 무사석 1매를 종방향으로 받쳐놓고, 그 위에 성돌보다 큰 무사석 하나씩을 얹은 후 장방형의 큰 판석을 걸쳐 놓고 천장석 위에는 천장석과 같은 크기의 장대석을 1매 더 올려놓았다. 개구부의 너비는 130cm, 높이는 143cm로 다른 암문에 비하여 비교적 크기가 큰 편이다. 이 암문은 장경사 신지옹성을 축성하면서 옹성 출입을 위하여 만든 것으로 개구부 주변의 성벽에 일반적인 성돌과 무사석이 혼재되어 있으며, 체성벽을 헐었다가 쌓은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신축된 암문임을 알 수 있다.


제3암문은 동장대에서 서쪽으로 57m 거리의 해발 494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동장대에서 거의 직선을 이루며 연결된 성벽이 능선을 따라 밖으로 돌출되며 만곡을 이루는 곳으로서 암문 서쪽의 돌출된 성벽이 적대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이 암문은 원성과 한봉외성 및 봉암외성을 연결하는 주 출입구로서 남문이나 동문처럼 이용빈도수가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을 차단할 경우 동장대 좌우로 약 1km 범위 내에는 출입문이 없으며, 원성 외부의 지형이 가파르기 때문에 이암문의 기능은 다른 암문에 비해서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러한 기능은 암문의 크기에도 반영되어 있다. 원성에 설치된 대부분의 암문이 외측의 개구부는 홍예식이더라도 내측은 평거식인데 비해, 3암문은 외면과 내면 모두 홍예식이다. 또한 개구부는 남한산성 암문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게 축조되어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개구부의 외측은 양쪽에 무사석으로 두단을 쌓고 그위에 7매의 홍예돌을 쌓아 반원형의 홍예문을 구축하였는데 홍예부분이 미려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개구부의 위나 좌우측에는 육축(陸築)시설을 하지 않고, 일반 성돌을 그대로 쌓았다.


동장대에서 서북쪽으로 263m 거리의 해발 426m 지점에 있다. 이곳은 동편에서 능선을 따라 돌출된 성벽이 곡저부를 따라 만입하며 거의 직각을 이루고 있는 지점으로서 동쪽의 돌출된 성벽이 암문을 보호하는 적대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구부의 바깥쪽은 홍예식, 안쪽은 평거식으로 구축하였는데 홍예는 양쪽으로 43× 90×110cm, 50×97×105cm 크기의 장방형 무사석을 횡방향으로 세우고 그 위에 3매의 홍예돌을 올려 간단하게 구축하였다. 암문의 크기는 너비 95cm, 높이는 180cm이다. 평거식(平据式)인 안쪽은 너비 170cm, 높이 170cm로 바깥쪽에 비해 두배 정도 넓으며, 성문의 길이는 470cm 로서 성인 1명이 쉽게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이다.


이 암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암문에서 연결된 소로를 따라 1km 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하사창동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성의 북쪽에서 옥정사나, 망월사 등으로 가기 위해서는 주로 이 제3암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5암문은 서문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m 거리의 해발 458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연주봉 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서 암문의 서쪽에는 체성벽에 2m 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 옹성이 연결된다. 이 암문은 북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개구부는 홍예식으로 구축되어 있다. 지대석 위의 양쪽에 높이 106cm의 장방형 무사석을 놓고 그위에 3매의 홍예돌로 홍예를 구축하였는데 너비는 95cm이고 높이는 180cm로 성인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이다. 홍예종석 위에는 거칠게 다듬어진 부형무사석(缶形武砂石)을 올려놓고 7-8단의 석축을 하였는데 암문 좌우편의 성돌은 다른 체성벽의 성돌과 형태가 다르고 축성방법도 틀린 것으로 보아 후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개구부의 내부는 평거식이며, 암문의 길이는 5m 정도로 성벽의 안쪽으로 길게 연결하고 좌우측에 석축옹벽을 구축하여 유사시 암문을 폐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장은 대강 다듬은 5매의 장대석으로 구축하였다.


제6암문은 수어장대에서 서남쪽으로 100m 지점의 해발 474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성벽이 청량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크게 회절하며 곡성의 형태를 이루고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회절부이다. 암문은 성벽의 흐름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북동쪽의 돌출된 성벽이 적대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암문은 장경사 옹성부근에 설치된 2암문과 함께 개구부가 평거식이다. 암문의 너비는 77cm로 매우 좁고, 높이도 155cm 정도여서 성인은 서서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협소하다.체성벽의 축조방법이나 위치상 이곳은 암문을 설치하기 위하여 설계된 것으로 보지만 현재 남아있는 암문 주변의 성돌이 체성벽의 성돌과 달리 정형성이 없고 축조방법이 다른 것으로 보아 후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암문은 폐쇄되어 출입이 안된다.


이 암문의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남한지』에 기록되어 있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 밤중에 적군이 서쪽 성벽을 넘어서 쳐들어 왔다. 이 지역은 수어장대와 가까운 곳이며 행궁으로 통하는 곳이므로 아군에게는 매우 긴요한 곳이었다. 적병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몽둥이로 쳐서 성밖으로 떨어뜨렸으며 적군이 세 번이나 야습을 감행하여 돌을 굴리고 포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아침에 적이 침공한 성 아래를 보니 눈과 빙판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서암문 파적지’라 함은 바로 그때의 승리를 두고서 부르게 된 것으로서 ‘파적’은 ‘적을 깨뜨렸다’는 뜻이다. 또한 『남한지』에는 이와 관련한 다음의 시가 전한다.


- 서암문 파적처를 보며 -


장사가 창을 깨고 호관(虎關)을 지키니

서문에서 한판 싸움 굳었던 얼굴 폈구나.

지금도 치(雉)와 첩(堞)이 구름과 연한 곳에

오히려 당시 싸움의 핏자국이 얼룩져 있구나.

- 이민서


제7암문은 남문을 지나 제1남옹성과 치가 있는 곳에 있다. 이 암문은 제1남옹성과 신남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서, 남쪽의 암문중 가장 이용빈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구부는 홍예식이며, 무사석으로 쌓은 2단의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로 홍예문을 구축하였다. 외벽의 홍예종석 윗부분에는 부형무사석(缶形武砂石) 없이 성돌로 9단을 정연하게 쌓아올리고 여장을 구축하였다.


제6암문에서 동쪽으로 192m 거리의 해발 440m 지점에 있다. 이곳은 성벽이 능선 정상부를 따라 거의 100m 정도 굴곡이 없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구간으로서 암문의 보호를 위해 성벽을 회절시킨 제7암문과 달리 이곳에는 암문 동편에 치를 길게 쌓음으로써, 적대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제2남옹성의 남서쪽 성벽을 암문 입구까지 연결하여 암문도 보호하고 옹성으로의 출입도 원활하도록 하였다. 암문의 개구부는 홍예식이며, 내부는 평거식이다.


제8암문은 제2남옹성과 제3남옹성 사이에 위치한다. 제2남옹성에서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만곡하던 성벽의 끝부분이 밖으로 돌출해 회절하다가 다시 동쪽으로 꺽이는 지점으로, 암문 좌측에서 회절하면서 8m 정도 돌출된 성벽이 적대의 역할을 하고 암문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개구부의 바깥쪽은 홍예식이며 안쪽은 평거식이다. 홍예부는 장대석의 무사석 두 개를 양쪽에 세우고 3개의 홍예돌을 얹었으나 외형상 양쪽을 받치고 있는 무사석은 위에서 흘러내린 흙과 잡석으로 인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내벽은 정교하게 다듬은 장방형 성돌로 6단을 쌓았으나 입구쪽은 흙더미에 덮여 있다.


제9암문은 제3남옹성에서 동쪽으로 69m 떨어진 해발437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발달된 능선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어 있는 곳으로 암문에 가까운 성벽이 굴곡을 이루며 돌출해 있어 마치 적대와 같은 기능을 하면서 암문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암문 서쪽의 돌출된 성벽의 너비는 약 8m 정도이며, 암문의 입구는 남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는다. 암문의 바깥쪽은 홍예식이며, 안쪽은 평거식이다. 홍예는 우측에 44×117×106cm 크기의 무사석을 종방향으로 세우고 좌측에는 무사석을 횡방향으로 놓고 무사석을 한단 올려놓은 후 3개의 홍예돌을 올려 놓아서 간단하게 축조하였다. 이 암문은 동쪽으로 제10암문에 이르기까지 약 500m 범위 내에서 성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므로 이 암문을 통해 검복리 쪽으로 출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암문은 홍예부의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개축시에 문폭을 줄이면서 홍예돌을 일부 줄인 것으로 보인다.


제10암문은 수구문 남쪽 20m 지점의 해발 305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암문은 남한산성에 소재하는 16개의 암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무너져서 기저부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외면은 홍예식이고 내면은 평거식이며, 측면은 높이 154cm 까지 무사석으로 쌓고 반원형의 암문을 구축하였다. 훼손되어 거의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였는데 1997년 복원공사를 실시하였다. 특히 이 암문은 내부에 너비 3.1m의 암도(暗道)가 길이 13m 정도 구축되어 있고, 양쪽에는 석축으로 옹벽을 구축하여 유사시 암문을 폐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암문 바깥쪽은 경사가 심하기 때문에 외부의 일정구간을 성토하고 외부에는 석축으로 마감을 하여 진입로를 전방우측으로 우회시키면서 경사를 최대한 낮추어 하천의 서편으로 조성된 도로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 암문은 동문의 보조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문의 경우 위엄있게 보이기 위하여 도로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성문밖에 계단을 설치하게되어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성내에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위한 수레나 일반인들의 통행은 주로 이 암문을 이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 지적도상에 나타난 도로의 표시를 살펴보더라도 동문쪽에서 연결되는 도로보다 이 암문으로 연결되는 곳이 더 평탄하고, 도로도 더 넓었음을 알 수 있는데 두 도로는 동문밖에서 합류하고 있다.


제12암문은 제3암문을 통하여 원성에서 나와 한봉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암문이다. 개구부의 외부와 내부 모두 홍예식이다. 이 암문은 상당부분 훼손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제13암문은 벌봉에서 서쪽으로 42m 거리의 해발 424m 지점에 있다. 암문이 있는 곳은 법화봉에서 거의 고저차가 없이 등고선방향을 따라 일직선을 이루며 남쪽으로 연결된 성벽이 수직으로 꺽여 벌봉쪽으로 올라가며 회절(回折)하는 지점이다. 양쪽의 성벽이 적대의 역할을 할수 있기 때문에 암문 보호를 위한 별도의 시설은 설치하지 않았다.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인데, 좌측에 4단 우측에 5단의 무사석을 쌓고 장대석을 얹어 문구부를 결구하였다. 암문 안쪽의 좌측면에는 석축을 높이 2m, 길이 2m 정도 쌓았는데 이것은 유사시 암문을 폐쇄할 수 있는 석재로 활용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암문은 봉암성에서 가지울을 지나 상산곡동이나 하남시 쪽으로으로의 출입을 위하여 구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암문을 통하지 않은 경우 제14암문을 지나 벌봉을 우회하여야 하기 때문에 장경사 부분의 제1암문과 제3암문 제16암문과 함께 이용빈도가 상당히 높았던 암문이며, 암문 바깥쪽으로는 옛길로 보이는 소로가 잘 남아있다.


제14암문은 봉암성의 외동장대지 동남쪽 42m 지점에 있다. 벌봉을 지나 회절하여 거의 일직선상으로 능선을 따라 온 성벽은 외동장대 북편에서 만곡하여 동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회절하여 남쪽으로 향하는데, 남쪽의 성벽과의 너비가 19.2m 정도로 좁아지는 병목구간이다. 암문의 서쪽은 만입된 성벽이 능선을 따라 약간 돌출해 있고, 남동쪽으로는 곧게 내려온 성벽이 90°정도의 각을 이루며 회절하며 경사를 따라 올라가고 있어 암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암문의 개구부는 안과 밖 모두 평거식이며, 현재 문안쪽에서 토사가 밀려내려와 1/3정도가 매몰된 상태여서 전체 규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 암문은 제13암문과 봉암성의 제16암문까지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시설이 없기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크기도 작고 연결되는 도로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13암문에 비해 사용빈도가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15암문은 봉암성에서 한봉성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외동장대 남쪽부터 남북에서 내려온 두 성벽이 병목처럼 좁아들어 내려오다가 능선 남쪽의 넓은 완경사지역을 포용하기 위하여 다시 벌어진 후 발모양처럼 마무리되었다. 한봉성은 봉암성의 남동쪽 끝부분에 연결되어 있는데 암문은 연결부위에서 서쪽으로 10m 지점에 있다. 개구부는 내외 모두 평거식으로 양쪽에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 2개씩을 놓고 상단에 천장석을 얹었는데 균형이 매우 잘 잡혀있어 단아한 느낌을 준다.


제16암문은 봉암성에 연결되는 한봉성의 기점에서부터 473m 지점에 있다. 해발 506m인 한봉성의 기점에서 능선을 따라 약간의 굴곡을 이루며 내려온 성벽이 가장 저점에 다다르는 해발 381m 지점에 16암문을 구축하였다. 개구부는 평거식으로 양쪽에다 정방형에 가까운 무사석으로 두단을 쌓고, 그 위에 장대석으로 천장을 얹어 결구하였다.


이 암문은 조선시대의 고지도에도 주요 길목으로 표시되어 있듯이 외성에 설치된 암문중 가장 이용빈도가 높은 암문 중의 하나였다. 장경사 부근의 제1암문을 나와서 큰골을 경유하여 이 암문을 통과하여 벽수골로 내려가는 길은 동문로보다 퇴촌방면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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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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