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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⑯] 승리의 바람을 읽어라

 박종평 연구가 입력 2015-10-19 09:58 승인 2015.10.19 09:58 호수 1120 54면 


- 바람의 신 ‘영등할매’위해 ‘풍신제’ 지내다

- ‘태풍’용어 부재 시절 대풍·광풍·미풍·순풍·역풍


<통영 이순신 공원 동상>


이순신은 유비무환의 자세를 생활화했다. 그의 일기는 현재의 우리가 일기를 쓸 때처럼 언제나 날씨로 시작한다. “맑았다”, “흐렸다”, “비가 내렸다”, “바람이 불었다” 등이 그것이다. 그중 바람은 특히 예민한 사항이었다. 배는 무기였고, 이동수단이었다. 지금처럼 동력선이 아닌 시대에 바람은 노를 젓는 군사들의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편리한 에너지이기도 했고, 때로는 거꾸로 배를 파괴하거나, 이동을 어렵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자연환경이었다.


바람까지 늘 대비하다


《난중일기》 1592년 1월 20일에는 처음으로 바람이 등장한다. “맑았으나, 큰 바람(大風)이 불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바람은 상세하다. 이순신은 바람이 부는 강도와 방향도 각각 기록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대풍(大風)·광풍(狂風)·미풍(微風),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동풍·서풍·남풍·북풍, 배가 이동하는 방향과 관련해 순풍(順風)과 역풍(逆風)으로 각각 상황에 따라 기록했다. 또 바람이 불었던 때도 기록했다.


▲ 1594년 1월 18일. 맑았다. 새벽에 출항했다. 역풍이 거세게 일었다. 창신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편리하게 순하게 불었다. 돛을 들어 올리고, 사량에 도착했다. 바람이 다시 거꾸로 불었고, 비가 많이 내렸다.


▲ 1594년 8월 28일. 밤 1시(丑時)에 이슬비가 내리고, 큰 바람(大風)이 불었다. 비는 아침 6시(卯時)에 그쳤으나, 바람은 내내 크게 불었다. 밤새 그치지 않았다.


▲ 1594년 11월 17일. 맑았고, 따뜻했다. 서리가 눈처럼 쌓였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구나. 늦게부터 내내 미풍이 불었다. 밤 10시에 조카 뇌와 아들 울이 들어왔다. 밤 12시에 광풍(狂風)이 크게 불었다.


그러면 매년 여름과 가을에 우리를 긴장시키는 ‘태풍(颱風)’은 나오지 않는 걸까? 태풍은 《난중일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태풍이란 표현이 《난중일기》 이후에 등장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태풍이 처음 쓰여진 것은 중국에서 1634년에 편집된 《복건통지(福建通志)》이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특별한 바람이 단 한 번 기록되어 있다. 태풍의 기원이 되는 바람, 구풍이 그것이다.


▲ 1594년 5월 4일. 흐렸다. 바람이 미친 듯 불었고, 큰 비가 내내 그치지 않았다. 밤새 더 사나워졌다. 경상 우수사의 군관이 와서, “왜적 3명이 중간 크기의 배를 타고 추도에 이르렀는데, 서로 마주쳤기에 붙잡아 왔다”고 했다. 이들을 추궁하여 심문한 뒤 압송해 오라고 일러 보냈다. 저녁에 공대원에게 물었더니, “왜적 등이 바람을 따라 배를 띄워 본토(本土, 일본)로 향했다가, 바다 가운데서 강한 회오리 바람으로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이 섬에 표류해 도착했다”고 했다.


추도에 접근했다가 경상 우수군에 붙잡힌 일본군이 구풍, 즉 회오리바람을 핑계 댄 것이다. 이 구풍을 아라비아 뱃사람들이 타이툰이라고 부르면서, 태풍을 뜻하는 영어 단어 Typhoon가 생겨났다. 이순신의 일기 속 구풍이 언급된 장면을 보면, 일본에서는 구풍이란 바람 표현을 사용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잘 쓰지 않았던 바람의 종류로 보인다.


바람의 신, 영등할매의 심술이 기록


7년 동안 쓴 이순신의 일기 중 상대적으로 유실되지 않고, 또 꾸준히 기록했던 시기를 기준으로 가장 바람이 많이 불었던 시기를 살펴보면, 양력 기준으로 3월과 7월, 9월에 바람 많이 불었다. 이는 오늘날과도 비슷하다.


강제윤의 《걷고 싶은 우리 섬 - 통영의 섬-》에 따르면, 한산도가 있는 통영에서는 바다의 바람 신을 영등할미 혹은 할맛네라고 하는데, 이 영등할매는 음력 2월 1일에 하늘에서 내려와 20일 동안 머물다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영등할미가 머물 때 뱃사람은 일절 배를 띄우지 않고, 영등할매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풍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순신이 일기에 기록한 바람이 많이 불었던 그 시기와 일치한다. 음력 2월, 양력 3월에 남해바다에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년 영등할매가 심술을 부리지는 않는다고 한다. 영등할매가 미워하는 며느리와 함께 올 때는 바람이 거세게 불지만, 사랑하는 딸과 함께 올 때는 바람이 잠잠해진다고 한다. 이 설화처럼 《난중일기》에서도 1596년 음력 2월에는 다른 해와 달리 바람이 상대적으로 덜 불었다. 바람은 이순신이 진영에 머물 때나, 전투를 할 때 수시로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괴롭혔다.


▲ 1593년 5월 26일. 비가 계속 내렸다. 밤 9시부터 큰 바람이 불었다. 각 배를 고정시킬 수 없었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서로 맞부딪치려 했기에 간신히 구해냈는데, 도리어 또 발포 만호가 타는 배와 부딪쳤다.


▲ 1593년 6월 19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큰 바람이 불었고, 그치지 않았다. 진을 오양역 앞으로 옮겼다. 바람이 불어 배를 고정시킬 수 없었다.


▲ 1594년 5월 5일.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지붕이 3겹이나 벗겨져 조각조각 높이 날아갔다. 삼대같은 빗발이 쏟아졌다. 몸뚱이조차 비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큰 비바람이 오후 2시에 조금 멈췄다.


▲ 1594년 8월 11일. 큰 비가 내내 내렸다. 이날 밤, 광풍(狂風)이 불었고, 폭우가 크게 쏟아졌다. 지붕이 3겹이나 벗겨졌다. 비가 새어 삼대처럼 쏟아졌다. 밤새 앉아서 새벽을 맞았다.


이순신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한밤중이라도 벌떡 일어나 배를 바다에서 육지로 끌어올려 파도에 배들이 서로 부딪치는 것을 막으려고 뛰어야 했다. 진영에 머물러 있을 때는 초가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엄청난 바람이 불 때는 비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뚫린 천장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밤새 앉아 있어야 했다. 바람을 걱정하고, 비를 맞으며 밤을 지새우는 이순신이었기에 언제나 승리할 수 있었다.


박종평 연구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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