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64>大雪國辱(대설국욕)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78호] 승인 2014.12.29 09:24:32
“가서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백성에게 치욕을 준 불의의 세력 응징한 명장
<이순신 장검>
재난이나 위기가 닥쳐오면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늘 중심을 지키며 자신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소위 의인(義人)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평상시에는 이름도 없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던 사람들이다.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난을 제외하고, 인간사에서 가장 큰 재난은 인간들의 탐욕이 만든 전쟁이다. 그럴 때마다 수많은 의인들이 나타난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전란기 때면 어김없이 등장했던 의병자과 의병이 그들이다. 가장 최근에는 일제 침략기에 나타났다. 안중근ㆍ윤봉길 의사, 김구와 이승만 등의 애국지사들이 그들이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도 그들 중의 한 분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한국 유학자 최후의 자존심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유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양반 유학자들이 망해가는 나라에 무관심했지만 그는 붓 대신 칼을 들었다. 송병준ㆍ이용구 등의 일진회가 한일 병합을 청원하자 그는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라며 처벌을 주장했다.
일본 헌병 분견대 소장 노전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으니 반역이라며 김창숙에게 처벌 건의문을 취소하라고 하자 말했다. “사직(社稷)이 임금보다 중한지라, 난명(亂命, 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 충성하는 길이다.”
그 후 김창숙은 독립운동을 위해서 친일파 고명복의 집을 털었고, 일제의 밀정 김달하를 처단했다. 1926년에는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회사ㆍ식산은행 폭탄 투척 사건을 기획했다. 체포된 뒤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그의 자식들도 아버지처럼 독립운동을 했다. 장남은 1927년 일제의 고문으로 죽었고 차남도 감옥에 갇혔다.
해방 후 그는 인재 양성을 위해 성균관대학을 설립했지만 자신은 집 한 칸도 없었고, 여관과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가난과 고독 속에서 결국 돌아갔다. 그가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는 나라의 수치를 씻고, 나라를 지키고, 통일을 꿈꾼 한 선비의 삶과 집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뜻한 일 이미 어긋나 실패하고 몹쓸 병만 부질없이 오래 가네. ……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무나.”
그의 절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안팎의 불의한 세력들과 호시탐탐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이빨을 드러내는 강대국들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수치스런 삶을 때론 외면하고, 때론 한탄만하며 살고 있다.
치욕을 잊지 말라
1592년, 이웃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지나간다며 길을 빌려 달라는 일본군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침략해 왔다. 침략자들은 이 땅에 들어와 가족과 이웃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해 갔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 장수 이순신은 침략자를 격퇴해 나라의 치욕을 씻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가 말한 ‘설국가지치(雪國家之恥)’란 말이다. 이순신의 분노가 담긴 이 표현은 경상도로 구원 출전을 하겠다는 첫 장계에 등장한다.
“적의 세력이 이처럼 커져 ‘큰 진영을 연이어 함락시키고 또 육지 안까지 침범했다’고 합니다. 몹시 원통해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아 아뢸 말씀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하로서 누구나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해 나라의 수치를 씻기 원치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擬雪國家之恥의설국가지치). ‘같이 출전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엎드려 기다립니다.”
또한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자에는 이순신이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어머니가 다시 전장터로 떠나는 이순신에게 당부한 말이 나온다.
“가서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大雪國辱 대설국욕).”
불의한 세력의 침략에 이순신은 “몹시 원통해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다”고 하면서 스스로도 그 치욕을 씻겠다고 다짐했고, 군인을 아들로 둔 어머니마저도 아들의 안위 대신 치욕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이순신과 그 어머니는 나라에 대한 자존심과 침략에 대한 분노,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말한 ‘나라의 치욕을 씻는다(雪國恥)’는 것은 문종 때 간행된 《동국병감(東國兵鑑》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고려 숙종 때 명장 윤관과 고종 때 김희제가 각기 한 말이다. 고려의 명장 윤관이 여진족을 정벌할 때, 부원수 오연총이 여진족 정벌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말하자 윤관이 말했다. “이제 공과 내가 아니면 누가 죽음의 땅으로 나가서 나라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겠소(雪國家之恥 설국가지치)? 이미 결정된 마당에 또 무엇을 의심하시오!” 그의 결의처럼 그는 여진족을 평정한 뒤 정복지에 9개의 성을 쌓고, 공험진에 국경 경계선을 표시하는 비를 세웠다.
또 고려 고종 때인 1226년, 동진국 우가하의 군사들이 고려를 침략한다는 것을 들은 병마부사 김희제는 병마판관 손습경ㆍ송국첨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우가하는 우리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땅을 침입해 우리 백성들을 잡아가는데도 이를 막아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야말로 나라의 수치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저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토벌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도록 합시다(雪國恥설국치).” 김희제 등은 동진국으로 쳐들어가 승리했다.
이순신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동국병감》에 나오는 윤관과 김희제의 말, “설국치”와 달리 《자치통감》에는 “사직의 큰 수치를 깨끗이 씻는다(雪社稷大恥 설사직대치)”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왕조 시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순신과 그의 어머니, 윤관과 김희제의 “나라의 치욕을 씻다(雪國恥설국치)”와 《자치통감》의 “사직의 큰 수치를 깨끗이 씻는다(雪社稷大恥 설사직대치)”는 개념상 큰 차이가 있다. 중국의 신하들은 사직, 즉 왕조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지만, 이순신과 고려의 신하들은 사직보다 이땅을 더 중요시했다. 특정 왕조나 임금이 아니라 이땅과 이땅의 진정한 주인인 백성을 우선시하는 발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어야 특정 왕조의 사직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과 고려의 장수들은 이땅과 백성에게 치욕을 준 불의한 세력을 응징하고자 결의했고, 결국 그 치욕을 돌려주었다. 그들 모두 치욕을 잊지 않으며 자신을 반성하고 준비를 했던 사람들이다. 이순신처럼, 고려의 명장들처럼 승리하는 사람들은 치욕을 부끄러워하고, 잊지 않으며 치욕을 씻기 위해서는 몇 배 더 노력하고 뛴 사람들이다. 치욕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치욕을 극복할 실천을 하라. 그것이 이순신식의 치욕의 씻는 법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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