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평 이순신 이야기-66> 진정한 충성심이란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66>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80호] 승인 2015.01.12 10:16:18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런 마음”
백전노장 충성의 대상은 ‘나라’와 ‘백성’
<현충사 정문앞 필사즉생 비(碑)>
전쟁이 일어난 나라나 전쟁을 일으킨 나라나 누구 하나 편안히 살 수 없다. 특히 침략을 당한 나라의 사정은 더더욱 곤궁하고, 민생은 지옥과도 같다. 전쟁터에서 전투를 하고, 군사를 유지하는 일은 장수의 가장 큰 일이다. 이순신이 영의정 류성룡에게 쓴 편지 초안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이 한 몸,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아
살피지 못했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그리운 마음 간절합니다. 일찍이 영의정의 몸이 편안치 않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먼 바다를 지키는 임무로 지금껏 안부도 여쭤 보지 못했습니다. 애만 태우고 그리움만 커갈 뿐입니다.
적의 형세는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연일 정탐을 해보았더니, 굶주려 파리한 모습이 많습니다. 그 목적이 반드시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는 것인데 그 숨겨진 계획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방어는 곳곳이 허술하고, 곳곳이 어긋나 방어하고 지키는 형세가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적(倭賊)·왜놈(倭奴)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수군인데도 수군이 되어 전투에 나가고자 하는 자가 없습니다.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냈어도 점검하고 감독할 생각이 없습니다. 군량조차 의뢰할 곳이 없어 온갖 생각을 다 해보았지만 조치할 방법이 없습니다. 수군은 머지않아 파탄이 나고 그만두어야 할 처지입니다. 제 한 몸이야 만 번 죽어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랏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중일기》, 1593년 3월 22일 이후에 기록된 편지 초안)
군량 부족과 군사 부족으로 온 밤을 고뇌하며 답답한 마음을 류성룡에게 전하고 있다. 그의 번민의 핵심은 “제 한 몸이야 만 번 죽어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랏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如某一身一身, 萬死無惜, 其於國事如何)”이다.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수군까지 군사를 충원할 수 없는 상황, 있는 수군조차 굶주림에 허덕이는 현실에서 이순신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어릴 적부터 충성심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지금 이순간도 다양하게 충성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직의 높은 사람들은 충성심을 요구하고, 구성원들도 자발적으로 충성을 다하려고 하거나 강요된 충성에 허덕이기도 한다.
이 편지 초안은 진정한 충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이순신의 편지글에는 그 어떤 조각의 사심(私心)도 없다. 오직 자신의 일인 나라를 걱정하는 것 외엔 다른 그 무엇도 없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몸은 만 번 죽어도 좋다고 했다. 나라만 걱정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충성의 대상은 임금도, 당시 지배층도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 자신이 살아온 땅, 선조의 땅이 충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달랐다. 그가 절규하듯 수군 입대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임금을 비롯한 높은 사람들은 그 어느 하나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자였고, 무기력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만 번이라도 죽을 각오로 자신을 다졌고, 자신의 땅과 백성에 충성을 다하려고 했다.
광양 현감 어영담이 암행어사의 잘못된 정보에 입각한 판단으로 파직되었을 때, 이순신은 그의 무고함을 규명하고 그의 복직을 요청했다. 그 때 그가 쓴 어영담의 유임을 청하는 장계에도 그의 충성심의 기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영담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이순신의 곁에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던 백전 노장이다.
어영담의 파직 소식을 들은 광양현의 백성들이 이순신에게 올린 구명 청원서에는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여러 차례 출전했을 때도 제 몸을 잊고 앞장서서 돌격해 섬멸한 공로가 가장 컸던 사람”이라며,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과 자기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광양 백성들이 어영담을 평가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순신도 인정했던 것이기에 그들의 청원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자세,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공익(公益)을 우선하는 자세를 이순신도 주목한 것이다. 이순신과 어영담의 충성의 대상은 나라와 백성이다. 그 충성에는 사익(私益)과 사심(私心)이 없다.
公心으로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할 충성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구닥다리 이야기, 시대에 뒤쳐진 사멸된 단어와도 같은 ‘충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을 유지하고, 조직을 발전시키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충성의 대상이 모호하거나 왜곡된 경우가 많다. 게다가 전체가 아니라 부분, 혹은 조직·집단이기주의, 우상숭배와도 같은 특정 개인에 대한 충성심일 경우가 많다.
필자가 이순신 장군을 공부하면서 느낀, 이순신이 생각하고 실천한 ‘충성심(忠誠心)’은 그 뜻 그대로이다.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런 마음” 그 자체이다. 진정성은 특정한 개인의 이익과 출세를 위한 마음이 아니다. 사익(私益)과 사심(私心) 대신 공익(公益)·공익(共益)을 위한 공심(公心)․공심(空心)이 바탕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이 충성을 다하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바르지 않거나, 리더이면서도 조직 전체 대신 사적인 감정에 묶인 리더는 결코 충성스러운 구성원을 갖을 수 없다. 그의 곁엔 오직 충성을 가장해 아부하는 구성원만이 넘쳐날 뿐이고, 훗날 후회의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럽게 배신당할 뿐이다. 그런 역사적 전례들은 일일이 거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허다하다.
이순신이 불멸의 신화를 남긴 것은 그 자신 그 스스로가 하늘에 떳떳했고, 백성과 나라에 진심을 다해 충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비극적으로 운명을 마감했지만, 그는 영원히 살고 있다. 그 당시 백성들은 그가 떠나자 울며불며 그를 기렸고, 지금의 이 땅의 국민들은 물론, 우리와 관계없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도 그의 삶을 고귀하게 평가한다. 이순신처럼 사랑과 존경, 두려움과 권위를 동시에 인정받았던 리더가 몇이나 있었는가.
밤기운이 몹시 서늘해 잠들 수 없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도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憂國之念 未嘗小弛). 배의 뜸집 아래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났다. (《난중일기》, 1593년 7월 1일)
이순신은 나라 걱정에 마음을 졸이며, 잠을 못 이루고 온갖 상념 속에서 자신의 충성을 다하려고 했다. 반면 당시 최고의 리더였던 선조는 피난지인 의주에서 이렇게 자신의 신세를 처량하게 한탄했다.
나라 일이 다급한데, 누가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같은 충성을 다할까?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이었다. 회복은 그대들에게 달려있구나. 전쟁터에 뜬 달 아래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아프구나. 신하여! 오늘 이후에도 또 다시 서인(西)·동인(東)으로 나뉘어 여전히 싸우려느냐!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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