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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⑮] 어영담

일요서울 입력 2015-10-12 10:02 승인 2015.10.12 10:02 호수 1119 54면


- 바다의 만리장성을 만든 조력자

- 해신을 탄생하게 한 바다 전문가


<통영 강구안 거북선>


지난 호에서 인연을 이야기하며 이순신의 도약대가 되어준 전라관찰사 이광의 이야기를 했다. 이광의 발탁과 류성룡의 후원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만들었다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도 아주 많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1천여 명의 인물들이 그들이다. 그래도 꼭 꼬집어 말한다면,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에 기록된, 이른바 이순신의 다섯 아들이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순신의 실제 아들이 아니다. 이순신의 막하 장수들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는 병법가 오자가 말하는 부자지병(父子之兵, 아버지와 아들 같은 장수와 부하의 긴밀한 관계)을 이순신이 어떻게 실천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부하를 동지로 여기는 사람


실록에는 이순신의 다섯 아들 중 권준, 배흥립, 김득광 세 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이 빠졌는데,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어영담과 정운일 가능성이 높다. 어영담 대신 한글음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일 수도 있다. 그들 대부분 이순신이 1591년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후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한 인물들이다. 권준은 순천부사, 배흥립은 흥양현감, 김득광은 보성군수, 어영담은 광양현감, 정운은 녹도만호, 이순신(李純信)은 방답첨사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만났다.


《난중일기》에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순신과 그들은 일방적인 수직관계가 아니다. 거꾸로 이순신이 가장 많이 의지했고, 가장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한 마음으로 나라를 지키고 침략자를 무찌르려는 동지, 그 자체였다.  그들 중 광양현감 어영담이 처음 등장하는 일기가 1592년 1월 22일 일기이다.


▲ 1592년 1월 22일. 맑았다. 아침에 광양 현감(어영담)이 와서 인사했다.


설날이 지난 후 상관인 이순신에게 어영담이 찾아와 인사를 올린 장면이다. 이 일기 이전의 일기 중 생소한 용어 혹은 이순신의 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들어있는 일기를 간략히 소개하고 어영담의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 1592년 1월 18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여도의 천자선(天字船, 제1호선)이 돌아갔다. 우등계문(優等啓聞)과 대가단자(代加單子)를 봉해 순찰사영으로 보냈다.


▲ 1592년 1월 21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감목관(監牧官)이 와서 묵었다.


천자선(天字船)은 배의 번호를 뜻하는 것으로 첫 번째, 즉 제1호선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순서를 표기할 때,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즉 천(天)·지(地)·현(玄)·황(黃)으로 그 순서를 표시했다. 이순신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대포의 종류도 그래서 그 크기와 무게를 중심으로 큰 것부터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로 명명했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대부분 1호선·2호선과 같이 기록했다. 천자선은 이날 일기에만 나온다.


우등계문은 무예 성적 시험을 보아 뛰어난 사람의 명단을 기록해 보고한 문서이다. 대가단자는 조선시대 관직 임명과 관련된 특수한 제도이다. 어떤 사람이 공로를 세워 승진할 기회를 얻었을 때, 자신 대신 아들이나 친척이 승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비난당할 제도이나,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가단자와 같은 제도를 운영했다.


제도개혁가 이순신, 목장책임자를 만나다


 감목관은 국가 소속의 목장과 말을 관리하는 책임자이다. 이순신이 관할하는 전라좌수영 지역에는 국영 목장이 많았다. 나라 목장에서는 백성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오직 말 등 가축을 키우는 일만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쟁 기간 중 일본군을 피해서 온 사람들, 굶어죽고 떠도는 사람들을 위해 농사가 금지된 나라 목장을 활용해 그들을 살렸다.


이순신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고심하다가 자신의 관할지에 있던 나라 목장을 농토로 활용할 생각을 하고, 조정에 규제 완화를 요청한 결과였다. 그 목장이 한 편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말을 키웠고, 다른 한편에서는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게 했다. 그것이 이순신의 목마구민(牧馬救民)의 일석이조 개혁정책이다. 이는 오늘날의 위정자들 깊이 생각해야 할 규제와 규제 완화의 목표에 시사점을 준다. 이순신과 감목관의 만남이 훗날 그런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다.


어영담(魚泳潭, 1532~1594)은 경남 함안 출신의 장수이다. 이순신이 정읍 현감에 임명되었을 때, 광양 현감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에 함께 활약했다. 《명량 이순신》을 저술한 노기욱 박사에 따르면, 어영담은 《난중일기》에 바로 이날인 1592년 1월 22일부터 사망하던 1594년 4월 9일까지 60회가 나온다고 한다. 이순신이 7년 동안 일기에서 어영담을 언급한 것이 약 100회다. 불과 2년 3개월 정도의 기간에 60회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이순신에게 어영담이 얼마나 비중이 컸던 인물인지 알려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어영담은 1564년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한 뒤 사천현감·고령현감·무장현감·언양현감·광양현감 등을 역임했다. 경상도와 전라도 바닷가를 중심으로 지방관으로 활약했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임진왜란 때의 어영담의 역할을 이렇게 말했다.


“(이순신이) 어영담의 귀신과 같은 이끎을 받아 큰 공로를 이룰 수 있었다. … 얕고 깊은 바다 속 상황과 나무하고 물을 얻을 수 있고 없는 섬, 험한 암초 등을 다 알고 있어 수군이 영남 바다에서 일본군을 수색하고 토벌할 때는 언제나 집안을 돌아다니듯 했다. 그 때문에 어렵거나 위기를 초래하지 않았다. 수군 중에서 전공을 가장 많이 세웠다.”


바다를 훤히 꿰뚫고 있던 어영담이 있었기에 이순신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영담은 이순신과 함께 활약하다가 전쟁 중에 광범위하게 번진 전염병으로 1594년 4월 초 사망했다. 1594년 4월 9일, 이순신은 어양담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아프고 탄식이 나오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라며 가슴을 쳤다. 어영담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겸 고위관료였던 미암 유희춘이 처족이기도 하다.


《미암일기》에도 “재주와 행동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어영담은 이순신처럼 평생을 변방을 전전했다. 특히 그는 바닷가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료로 전문성을 쌓아 이순신의 역사를 만드는 데 함께했다. 이순신과 어영담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인간관계의 성공 사례를 보여준다. 동고동락하면서 상생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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