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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51] 전운(戰運) 도는 조선

일요서울 입력 2016-06-27 09:45 승인 2016.06.27 09:45 호수 1156 49면


- 예측된 전쟁, 전쟁 준비에 바쁜 사람들

- 육지 전투 위해 수군 폐지?… 극렬 반대


"전라순찰사 이광을 만나다!"


<이순신 장군 묘비>


흔히들 임진왜란은 예측되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순신의 일기 혹은 《선조실록》이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조정의 핵심 그룹에서는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고, 준비도 하고 있었다.


▲ 1592년 3월 13일. 아침에 흐렸다. 순찰사의 편지가 왔다.


▲ 1592년 3월 14일. 큰 비가 내내 내렸다. 이른 아침에 순찰사를 만나러 순천으로 갔다. 비가 크게 내렸다. 가는 길을 구별할 수 없었다. 선생원에 간신히 도착했다. 말에 여물을 먹인 뒤, 해농창평에 도착했다. 길에는 물이 석 자나 고인 곳도 있었다. 순천부에 이를 때까지 길은 엉망이었다. 저녁에 순찰사와 해결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순신은 13일 전라순찰사의 편지를 받고, 14일에 순찰사를 만나러 순천에 갔다. 일기 속 순찰사는 이광(李洸, 1541~1607)이다. 이순신과는 친척관계다. 1589년 2월에는 45세의 이순신을 자신의 조방장으로 특별히 발탁해 이순신이 정읍현감이 되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전라순찰사로 출전했다가 용인전투에서 패전해 백의종군하기도 했다. 이광의 후임 순찰사는 이광과 함께 용인전투에 출전했던 훗날의 행주대첩 명장 권율이다.


순찰사 이광의 주근무지는 순찰사영이 있는 전주다. 이광이 순천에 온 까닭은 관할지역을 점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시기의 다른 기록을 보면, 전라순찰사 이광은 물론 경상순찰사 김수(1547~1615)도 똑같이 관할 지역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광이나 김수가 시찰했던 이유는 전쟁 대비를 위한 점검이었다.


이광의 시찰 기록은 김종의 《임진일록》과 오희문의 <임진남행일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종은 1592년 3월 6일 일기에서 “전라순찰사가 장계해 함열 현감 김입휘를 파직하고 임피에 다시 가두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오희문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 강진 사람들이 순찰사의 임박한 시찰에 대비해 성을 수리하고 해자를 파고, 군사훈련을 하고, 무기를 점검하는 데 소란스러운 모습, 그에 따른 군사와 백성의 원성을 보았다. 이순신의 3월 23일 일기에도 전라순찰사 이광이 전라도 해안지역을 순찰하는 모습이 엿볼 수 있다. 즉, 이광이 보낸 편지에 “발포 권관이 군사를 이끌 인재로 적합지 않다”는 내용이 있다.


남해안 시찰하는 경상순찰사


경상순찰사 김수도 경상도 순시에 아주 바빴다. 임진왜란 초기까지 김수를 보좌했던 이탁영(1541~1610)의 《정만록》에 김수의 시찰 여정이 나온다. 이탁영은 경상 감영 근무를 위해 3월 9일 의성에서 출발해 14일 창원을 거쳐 15일 경상우병영에 도착했다. 그 즉시 이탁영은 김수를 따라 웅천부터 안골포·가덕·천성·제포·영등포·거제·옥포·지세포·조라포·경상우수영·당포·사량·가배량·고성·소비포·삼천진·적량·미조항·상주포·곡포·평산포·남해·사천을 시찰하고 4월 7일에 진주에 도착했다. 이탁영도 진주에 도착한 뒤에는 방비차지(防備次知)에 임명되어 경상우수영의 각 진포를 정신없이 드나들며 점검했다.


이순신의 3월 25일 일기에서도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兵使, 조대곤)가 평산포(平山浦)에 도착하지 않고 곧바로 남해(南海)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만나지 못해 유감이라는 답장을 써보내는 모습이 나온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역시 경상순찰사 김수와 동일하게 시찰하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3월 3일자에는 조대곤 대신 김성일을 경상우병사로 삼았다고 했지만, 다른 실록 기록들을 보면 이 시기까지는 조대곤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다.


이탁영의 기록을 보면, 경상순찰사 김수는 22일 동안 경상우도 연해안의 모든 진포(鎭浦)를  순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의 순시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1592년 3월에는 전라도는 물론이고 경상도에서도 해당 지역의 고위 관리들이 모두 관할 지역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4월 7일, 비변사에서 보낸 공문을 받는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경상순찰사 김수와 경상우병사 조대곤의 장계에 따른 후속조치로 보인다. 비변사는 의정부와 역할이 다르다. 의정부는 평상시 정책조정 기관이다. 반면 비변사는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과 관련해 만들어진 전쟁을 관할하기 위한 최고기관이다.


비변사가 이순신에게 비밀공문을 보냈다는 것, 이광, 김수, 조대곤이 각기 시찰을 다녔다는 것, 2월 달에 신립과 이일이 각기 경기도와 황해도, 전라도와 충청도의 전쟁준비 상태를 점검한 것, 또 《선조수정실록》 3월 3일 기록이긴 하지만, 당시 경상우병사 조대곤이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체직시키고, 그 자리에 김성일을 임명한 것 그 모두 임박한 전쟁과 관련된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선조가 김성일을 임명한 이유로 김성일이 일본군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게다가 그가 적극 나서서 경상도에서 전쟁 준비하는 것을 비판했었기에  거꾸로 김성일에게 전쟁 준비에 적극 나서게 했다고 한다. 즉 실록의 이 문맥을 보면, 선조는 전쟁 걱정으로 전쟁 발발 가능성을 소극적으로 인정하며, 전쟁준비의 폐단을 거론한 김성일에게 전쟁 준비를 시킨 것이다.


선조의 전쟁 대비에 대한 의지는 “비변사가 ‘성일은 유신(儒臣)이기에 이런 때에 변방 장수 임무에 부적합하다’”고 반대했어도 임명을 관철시킨 것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김성일은 전쟁 발발 직전의 자신의 입장과 달리, 전쟁 발발 후에는 전란 수습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경상도 수군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해도(海道, 경상·전라·충청) 의 주사(舟師, 수군)를 없애고 장수와 군사들은 육지에 올라가 전쟁을 대비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전라 수사 이순신이 긴급히 “바다와 육지의 전투와 방어에서 그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됩니다”라고 보고했기에, 호남의 주사만 온전하게 되었다.


2월의 이일의 시찰, 3월의 이광과 김수, 조대곤의 시찰 등의 결론은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으로 전환시켜 육지에서 전투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을 유일하게 반대하고 수군을 존속시킨 것이 이순신이었다. 이순신과 이억기의 전라 수군이 조선의 바다를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다. 또한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수군이 왜 그렇게 부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3월 14일 일기에서 이순신이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고 했는데, 여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박취문의 《부북일기》에는 말 먹이로 “조(租), 콩(太), 죽좁쌀(粥小米)”이 나온다. 조선시대 길이를 재는 자로는 악기 제조에 사용되는 황종척, 천문관측과 토지 측량 등에 사용된 주척, 옷감이나 성벽이나 건물을 건축할 때 사용되는 포백척이 있다. 특히 포백척은 전선을 비롯한 선박 건조를 할 때 사용하던 자이다. 포백척을 기준으로 본문의 석 자(尺)의 길이는 약 138센티미터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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