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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52] 조선의 도로(道路)

일요서울 입력 2016-07-04 10:20 승인 2016.07.04 10:20 호수 1157 49면


<순천 환선정(총독부 유리건판)>


-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가둔 나라

- 로마의 번영과 조선의 한계


역사학자들은 고대 로마가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로 도로와 도로망을 꼽는다. 전통시대의 도로와 도로망은 개방과 소통, 정보와 사람의 이동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로마가 500년 동안 건설한 29개 도로망은 로마를 중심으로 총연장 85,000㎞에 달했다. 당시 유럽은 물론이고 아프리카까지 도로가 깔렸다. 그래서 프랑스의 17세기 작가 라퐁텐(Lafontaine)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기도 했다.  조선의 도로 혹은 교통 형편은 어땠을까. 다음은 오호성 명예교수는 《조선시대의 미곡유통시스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경국대전》의 도로 규격은 대로는 56자(尺), 중로는 16자, 소로는 11자이고, 도로 양측의 배수로 폭은 각각 2자이다. 조선 중후기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따르면, 당시 길의 폭은 대로가 12보(약 7m), 중로는 9보(약 5.4m), 소로는 6보(약3.6m)였다고 한다. 구간에 따라 도로 폭이 일정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말 한 필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소로로 되어 있기도 했다. … 18세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서 수레의 통행이 불편하다.


이 때문에 온 나라의 장사꾼은 모두 말에다 물건을 싣고 다니는데 목적지가 멀면 노자가 많이 들어 소득이 적다. 물건을 옮기는 데는 말보다는 수레가 낫고, 수레보다는 배가 낫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강이 많으므로 배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다. 반면 유형원은 우리나라는 지세가 평탄치 않으나 수레를 사용할 수 있는 지역이 많은데 문제는 수레에 관심있는 사람이 드물어 좁고 굴곡이 심한 도로를 고치려고 하지 않은 데 있다며 도로의 유지보수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하고 있다.


《경국대전》의 규정은 규정일 뿐이었다. 오 교수가 《경국대전》 이후의 여러 실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해서 조선의 도로 사정을 말한 것처럼, 조선의 실제 형편은 산악지형의 영향으로 규정대로 건설되지도 않았다. 또한 기존에 건설되었던 도로도 관리 부실 혹은 무관심한 상황이었다. 육지의 열악한 도로 사정을 극복 혹은 우회하기 위한 교통로가 강과 바다라는 물길이었다. 민력 혹은 국력을 동원한 추가적인 도로 건설이 필요 없었고, 이동에 따른 시간도 짧았기 때문이다.


일본군 추격을 멈추게 만든 진창길


조선시대의 도로 상태를 알려주는 《난중일기》 기록도 있다. 1592년 3월 14일, 이순신은 순천에 있는 순찰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길은 패어 있어 “물이 석 자나 고인 곳이 있었고, 엉망이었다.” 도로가 도로가 아닌 모습이다. 그런 사정은 이순신이 근무하고 있던 전라도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 1593년 3월 10일. “명나라 군사(唐兵)들이 일찍이 송경(松京, 개성)에 도착했으나, 날마다 비가 내려 도로가 진흙탕이라 행군하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맑아지기를 기다려 서울로 들어간다고 약속을 맺었다.”고 한다.


조선을 지원 나온 명나라 군대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로 인해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적극적인 도로 개설에 부정적 인식이 있었다. 외침을 당해온 역사의 관점에서 수세적 입장이 강했다. 편리한 도로망이 오히려 북쪽과 남쪽 외적들의 신속한 진격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농업 중심국가 발상의 한계였고, 생산력이나 국가 재정능력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의 길은 언제나 내륙 중심일 뿐이었다. 바다 건너 세상이나, 대륙 저 너머 세상에는 여전히 무관심했다.


조선시대의 모습을 보면,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의 찬반논란도 오랜 역사적 산물의 결과가 아닐까. 박정희 대통령에겐 분명한 공과가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농업중심국가를 현대적인 산업국가로 전환시킨 것, 내륙 중심의 폐쇄적 사고 대신 바다 너머의 세계와 소통하고 미래를 보았던 시야와 노력만큼은 적극 인정해야 한다. 그의 사고는 오천년 우리 역사에서 분명히 한 획을 그었다.


활쏘기, 무인들의 일상


▲ 1592년 3월 15일. 흐렸고, 가랑비가 내렸다. 늦게 그쳤다. 루(樓) 위에 앉았다.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군관 등은 편을 나누어 쏘았다.

▲ 1592년 3월 16일. 맑았다. 순천 부사가 환선정에 술자리를 만들었다. 더불어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16일 일기를 보면, 15일 일기의 루는 환선정(喚仙亭)으로 보인다. 루(樓)는 수루 혹은 누각이라고 옮길 수 있다. 루와 환성정의 정(亭)은 개념 혹은 사례, 전문가들의 입장에 따라 동일한 경우와 다른 경우가 있다. 《서울의 누정》(2012)에서 이상배는 루와 정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 루(樓)는 사방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땅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 형태의 집이다. 누각은 누관(樓觀), 대각(臺閣), 누대(樓臺)라고도 부른다. 정(亭)은 좁은 의미로 볼 때 건물 이름에 붙어 있고, 휴식과 함께 주위의 자연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간소한 구조의 목조 건물이다. 문을 달지 않고 사방을 바라 볼 수 있게 지은 것과 사람이 잠을 잘 수 있도록 일반집과 마찬 가지 형태로 문을 단 경우도 있다.


반면 신영훈은 《증보 한옥의 정심》에서 규모에 따라 단간인 것을 정(亭), 여러 간인 대규모의 경우를 누(樓)라고 구분하면서도, 비교적 규모가 큰 강릉 선교장 활래정(活來亭) 같은 일반적 정자의 예외도 있다고 한다. 일기에 언급된 환선정(喚仙亭)은 전남 순천시 동외동 동천(東川)에 있었다. 심통원이 1543년에 건립했고,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 1614년, 유순익이 다시 세웠다가 1962년의 수재로 유실되었다. 현재 순천에 있는 국궁장인 환선정은 과거의 환성정의 이름을 딴 것이다.


▲ 1592년 3월 17일. 맑았다. 새벽에 순찰사에게 보고하고 돌아왔다. 선생원에 도착했다. 말에게 여물을 먹인 뒤, 본영으로 돌아왔다.


14일에 순찰사를 만나러 순천에 갔던 이순신이 다시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다. “보고하고 돌아왔다”의 한문 원문은 ‘고귀(告歸)’이다. 본래 의미는 몇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한자 그대의 뜻인 ‘알리고(보고하고) 돌아가거나 온 것’이 있고, 관료가 임금에게 고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휴가를 얻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순신은 다시 자신의 자리에서 밀린 업무들을 처리했다.


▲ 1592년 3월 18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 1592년 3월 19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있는 이순신이다. 이순신의 모습을 보면, 중심이 있는 사람만이 한 나라의 역사든, 한 개인의 역사든 쓸 수 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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