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61222151604825


관구검에 당했던 동천왕은 재평가가 필요한 전략가

[고구려사 명장면 9] 

임기환 입력 2016.12.22. 15:16 


관구검기공비의 탁본(조선고적도보 1).1906년 만주 집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독자들께서는 어린 시절 위인전 등에서 읽은 '밀우와 유유'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 내용을 환기하면 이렇다.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침공하자 맞서 싸우던 동천왕이 패배하여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은 소수 군사를 거느리고 남옥저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때 동부 출신 밀우가 몸을 던져 적군의 급박한 추격을 막아냈다. 또한 유유는 음식 속에 칼을 감추고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다가 위나라 장수가 방심한 틈을 타서 칼을 빼어 적장을 죽이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다.


밀우와 유유의 충정과 용기는 어린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이런 훌륭한 부하 장수들을 희생시킨 동천왕은 다소 못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고구려 역사 공부를 하면서 어릴 때 가졌던 동천왕의 이미지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동천왕은 지난번 우씨 왕후 이야기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매우 너그러운 품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또 다른 사례가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동천왕이 돌아가자 백성들 중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심지어 신하 중에는 따라 죽으려는 자도 많았다. 아들 중천왕이 금지하였지만, 막상 장례일이 되자 왕릉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다소 과장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당시 신하나 백성들이 진심으로 동천왕을 받들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밀우와 유유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동천왕을 지킨 예화도 단지 군주에 대한 신하의 충심만이 아니라, 그럴 만큼 동천왕이 신하들로부터 애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보다 동천왕의 진면목은 당시 국제 정세를 적절히 이용하여 고구려 대외정책을 추진할 만큼 국제 정세를 읽어내는 탁월한 안목을 갖춘 왕이라는 데 있다.


동천왕이 즉위할 무렵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으로 나뉘어 쟁패를 다투고 있었으며, 여기에 요동 땅에는 공손씨 정권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종종 고구려와 충돌하고 있었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천왕의 아버지 산상왕의 즉위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을 이용하여 발기(發岐)를 지원하면서 고구려를 침공하기도 했다.


동천왕은 이런 국제 정세를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고구려의 대외전략을 새롭게 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233년 오나라는 위를 협공하기 위해 공손씨 정권에 사신을 보냈는데, 공손씨는 이들을 가두어버렸다. 그중 일부가 탈출하여 고구려로 도망하였는데, 동천왕은 이들을 잘 대우하고 오나라로 보내 우호의 뜻을 드러냈다. 이에 오나라 손권은 고구려를 새로운 파트너로 삼기 위해 235년, 236년 거듭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한편 234년에 촉의 제갈량(諸葛亮)이 사망하면서 한숨을 돌린 위나라는 후방 기지로 삼기 위해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234년에 위나라가 고구려에 먼저 사신을 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위, 촉, 오 삼국은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 후방 기지를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촉의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한 것도 그런 의도에서였다. 이제 위나라의 힘이 요동지역으로 밀려오자, 고구려 및 공손씨 정권도 이에 대응하는 전략을 구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구려로서도 위나라와 오나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때 동천왕은 위나라를 선택했다. 아마도 고구려와 충돌이 잦았던 공손씨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위나라와 화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내 자신의 뜻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6년에 오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요동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위를 견제하기 위한 고구려의 전략적 위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천왕은 이러한 위와 오의 정세를 잘 이용하면서 공손씨 정권을 견제하고 있었다.


236년에 위나라는 지략이 풍부한 관구검을 유주자사에 임명하여, 공손씨 정권을 압박하였고, 238년에는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관구검 군대와 합세하여 공손연을 토벌하였다. 이때 동천왕도 군사 1000명을 보내 위나라 군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공손씨 정권이 무너진 뒤 위나라는 오히려 고구려에 대해 견제책을 취하면서, 낙랑, 대방군을 통해 동방의 여러 세력에 대해 통제력을 강화해갔다.


이에 대해 동천왕은 242년 압록강 하구의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하여 요동과 낙랑을 잇는 교통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당시 촉의 강유(姜維)가 북벌을 재개하여 위를 침공하는 틈을 노린 군사 전략이었다. 동천왕이 중국의 분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는 안목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위협을 느낀 유주자사 관구검이 244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이 옥저로 피신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은 위나라를 자극하여 환란을 불러온 오판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천왕은 군사력에서도 관구검의 군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서안평을 공격한 것이다. 이는 개전 초기에 동천왕이 이끄는 2만의 고구려군이 관구검의 군대를 비류수와 양맥에서 연거푸 격파한 데서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동천왕이 거듭되는 승리에 방심하다가 관구검의 역공을 받아 대패한 것이다.


따라서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은 당시 국제 정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를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이용할 줄 아는 탁월한 안목의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후일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고 이어서 낙랑, 대방군을 병합하였는데, 이러한 대외전략을 이미 동천왕이 마련하였던 것이다.


동천왕 때 고구려는 중국의 분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뚜렷이 드러냈다. 비록 한번의 패전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는 동아시아의 패자로 성장하기 위한 한때의 시련이었을 뿐이다.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운 고구려인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해 갔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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