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405150302613
안장왕의 죽음으로 끝난 한씨(漢氏) 미녀와의 사랑
[고구려사 명장면 42]
임기환 입력 2018.04.05. 15:03
한강변 행주 일대, 즉 과거 고구려 왕봉현이란 이름에 얽혀 있는 한씨(漢氏) 미녀와 안장왕의 로맨스는 그냥 가공의 설화는 아닐 것이다. 역사상 그리 이름나지 않은 인물인 안장왕을 꼭 찍어 한씨 미녀와 엮은 걸 보면 무언가 어떤 실제 역사를 담고 있으리라 보는 게 타당하다.
안장왕이 고구려로서는 변방이나 다름없는 이곳 한강유역까지 멀리 왜 내려왔을까? 한씨 미녀의 미모에 반해서일까? 하지만 아무리 미인이라 하더라도 왕을 멀리까지 거둥시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연스레 한씨 미녀의 아버지 한씨(漢氏)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또 왕봉현 혹은 한강하류 지역과 한씨는 어떤 관계일까?
이런 물음들에 일일이 답을 얻기 어렵지만, 당시 안장왕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안장왕이 한강유역에 내려와서 그 지역 여인을 만났다는 점에서 신라 소지왕의 로맨스가 떠오른다. 소지왕 이야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22년기에 실려 있다. 잠시 살펴보자.
「(22년) 가을 9월에 소지왕이 날이군(捺已郡)에 행차했다. 그 고을 사람 파로(波路)의 딸 벽화(碧花)는 16세로 뛰어난 미인이었다. 파로가 수놓은 비단 옷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서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열어보니 어린 소녀였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받지 않았다. 왕궁에 돌아와서 그리운 생각을 가누지 못해 두세 차례 몰래 그 집에 가서 벽화를 침석에 들게 하였다.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늙은 할멈의 집에 묵게 되어 물어보았다.
"백성들이 왕을 어찌 생각하는가?"
늙은 할멈이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왕을 성인으로 여기지만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들으니 왕께서 여러 차례 날이군 여자를 만나러 보통 사람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무릇 용이 물고기 옷을 입으면 고기잡이에게 잡히고 맙니다. 지금 왕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신중하지 못하니 어찌 성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왕이 부끄럽게 여겨 몰래 벽화를 맞아들여 별실에 두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설화적인 내용이지만 소지왕 말년의 여러 정황을 살피게 하는 이야기이다. 소지왕은 날이군 지방 출신인 벽화라는 여인을 비공식적으로 궁궐에 들이고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소지왕이 죽자 아들이 없어서 그의 6촌인 지증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벽화와 사이에 낳은 아들은 무시되었던 것이다. 이는 벽화가 지방세력 출신으로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 입장에서는 그 후사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더구나 위 설화에는 다소 상식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 소지왕이 9월에 벽화와 만나고 11월에 사망했으면, 실제로 이때 아들을 낳을 수는 없다. 소지왕이 사망 전에 벽화와 만났다면 최소한 1년 이전 언제일 것이다. 그런데도 소지왕과 벽화의 이야기가 소지왕이 죽는 해에 기록된 것은 어쩌면 소지왕의 죽음이 이런 문제와 깊이 연관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즉 신라 귀족사회에서는 소지왕과 벽화로 대표되는 지방세력의 결합에 크게 반발했였을 것이며, 그것이 소지왕의 죽음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봄직하다. 당시 불만이 만만치 않았음은 고타군 늙은 할멈의 입으로 소지왕을 비난하는 내용에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소지왕의 사례가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를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지난 회에서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장왕은 백제 3만 대군과 오곡원(五谷原) 전투를 치르는 등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격전을 직접 지휘했다. 그때 한강유역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새삼 재인식했을 것이고, 이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지방세력의 움직임도 예의 주시했을 것이다. 안장왕이 한강하류 지역으로 행차한 배경은 이런 점에서 충분히 추리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안장왕 죽음의 배경에도 심상치 않은 면이 있다는 점에서 앞서 소지왕의 사례를 더욱 음미하게 된다. 사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장왕 13년조와 이어지는 안원왕 즉위년조 기사에서는 안장왕의 죽음에 대해 비정상적인 면을 찾아볼 수 없다. 관련 기사는 이렇다.
(안장왕) 13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안장왕이라고 하였다. 안원왕은 이름이 보연(寶延)이고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큰 도량이 있었으므로 안장왕은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에 죽었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즉위하였다.
즉 안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안원왕은 안장왕의 아우로서 안장왕이 후사가 없어서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안장왕이 후사가 없다는 점도 소지왕의 경우와 유사하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기(繼體紀) 25년 12월조에는 안장왕이 피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원왕이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큰 도량이 있다"는 식의 풍모를 고려하면, 혹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듯이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는 아우가 형을 살해한 경우가 아닐까 추정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안장왕이 아우를 사랑했다는 표현을 믿는다면 안원왕이 형을 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안원왕이 아들이 없었음에도 사랑하는 동생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후사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음을 뜻하는데, 그런 안원왕이 사망했다는 것 자체가 돌연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안장왕이 피살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당시 백제 측 정보에 의한 것인데, 여러 정황상 매우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안장왕은 어떤 정치적 연유로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았던 것일까?
신라 소지왕의 사례에서 유추하듯이 지방세력인 한씨 미녀와의 결합이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씨 미녀의 가문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일단 한씨(漢氏)라는 성은 실제 성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수(漢水)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한씨(漢氏)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한씨 미녀는 한강하류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유력가의 딸로 볼 수 있다. 한수 지역에 대한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안장왕은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씨 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 볼 수 있다. 안장왕과 한씨 미녀와의 로맨스는 당시 안장왕이 한강유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치세력을 중앙정계에 등용해 왕권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차산성 장대지 발굴 모습: 아차산성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축성 운영한 한강변의 요충지이다. /사진=광진구청
게다가 안장왕은 아직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씨 미녀로부터 아들을 얻고 그가 왕위를 잇는다면 중앙 정계의 세력 판도가 달라질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기존 중앙귀족들은 한씨 미녀 혹은 한씨 미녀로 대표되는 지방세력의 출현에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새로운 상황을 연출한 안장왕에 대해 기존 중앙 귀족세력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결국 안장왕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추정하면 지나칠까?
지금까지는 작은 단서로 추정해본 어디까지나 역사적 상상일 뿐이다. 그런데 안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안원왕 대에 왕비의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안원왕도 목숨을 잃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앞에서 상상한 안장왕 대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광개토왕, 장수왕대의 번영은 새로운 정치세력이나 사상 등을 적극 받아들이는 고구려 사회의 개방성이나 국제성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100여 년이 흘러 안장왕의 죽음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반기지 않은 기존 귀족들의 기득권 지키기와 폐쇄성을 엿볼 수 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나라와 사회도 개방성을 잃으면 안으로 서서히 몰락해가기 마련이다. 고구려 퇴행의 조짐은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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