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413151202683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을 재평가한다

[고구려사 명장면 17] 

임기환 입력 2017.04.13. 15:12 


요동성총의 요동성 성곽도. 고구려는 요동 지배의 거점인 양평(襄平)을 차지한 후 요동성(遼東城)으로 이름하였다. 요동성 성곽도는 1953년에 평안남도 순천시 북창면 용봉리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4세기말 5세기초 요동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중흥의 기틀을 만든 소수림왕,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자리 잡게 한 광개토왕. 이 두 왕 사이에 고국양왕이 있다. 소수림왕의 아우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과 아들이 워낙 빛나는 업적을 쌓아서인지, 역사책에서 고국양왕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게다가 고국양왕은 불과 8년 동안만 왕 노릇을 했다. 사실 8년이라면 뭐라도 제대로 된 성과를 만들어내기에 그리 충분한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물론 소수림왕은 불과 재위 5년 안에 율령 반포, 불교 공인 등을 다 해치웠지만 말이다.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소수림왕의 아우인데 고국양왕이 그리 무력한 인물일 리는 없지 않을까 싶다. 기록에는 없지만 소수림왕의 개혁 정치에서 형을 도와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또 아들 광개토왕이 18세에 즉위한 이후 이룬 행적을 보면 태자 시절에 충분히 왕자 수업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즉 아버지 고국양왕이 태자를 잘 훈육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니, 고국양왕도 범상치 않은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흔히 광개토왕을 마케도니아의 정복군주 알렉산더와 비교하곤 하는데, 알렉산더도 저 혼자 잘난 게 아니다. 아버지 필리포스 왕은 마케도니아 왕국을 부흥시키고 그리스를 무릎 꿇린 출중한 야망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알렉산더는 아버지를 계승하고 그를 넘어서려는 욕망으로 위대한 정복군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고국양왕 역시 형이나 아들 못지않은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국양왕의 이름은 이련(伊連) 혹은 어지지(於只支)인데, 소수림왕이 재위 14년 만인 384년 11월에 별세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소수림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국양왕의 재위 기간이 짧았던 것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이때 제법 나이가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국양왕이 즉위할 때에 아들 광개토왕이 불과 열 살 남짓이었으니, 아버지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국양왕의 아버지 고국원왕이 41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또 형인 소수림왕이 16년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른 만큼, 이때 고국양왕의 나이가 결코 적을 수는 없겠다. 그리고 소수림왕도 아들이 없었음을 보면 당시 고구려 왕실에 아들이 귀했을 수도 있겠다. 혹 광개토왕은 고국양왕이 뒤늦게 본 귀한 아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고국양왕을 다시 평가하려면 결국 그가 뭘 했는가가 중요하다. 고국양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인 385년 6월에 군사 4만명을 내어 요동을 공격하였다. 당시 중국 대륙은 화북을 통일하였던 전진(前秦)이 383년에 비수 전투에서 동진(東晋)에 대패하면서 다시금 화북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있었다.


전진의 부견 아래에 귀의하였던 모용수(慕容垂)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전연(前燕)이 망한 지 14년 만에 다시 연나라의 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384년 정월에 연왕(燕王)에 올랐다. 후연의 등장이다. 이후 모용수는 전연의 고토를 회복하는 전쟁을 벌이면서, 모용 선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요서, 요동으로 진출하였다. 모용수는 대방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요동 관할의 책임을 맡겼다. 이때 후연이 요동지역을 다스리는 치소는 요서의 용성(龍城·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이었다. 즉 당시 후연은 요서지방은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지만, 요동지역에 대한 통할력은 상대적으로 약했을 것이다.


고국양왕의 요동 공격은 이런 국제 정세와 힘의 공백을 이용한 시의적절한 군사행동이었다. 이에 모용좌는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도록 하였지만, 고구려군은 이를 격파하고 요동군과 현도군을 함락시키고 남녀 1만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후연은 고구려의 요동 점령에 대해 곧바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북중국 내에서 여전히 전진의 잔여세력이나 주변 세력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385년 10월에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慕容農)이 3만 군대를 이끌고 용성에 이르러, 지난 7월에 반란을 일으켰던 부여계 유민 여암(餘巖) 형제를 참하였고, 내친김에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요동군과 현도군을 다시 회복한 후 용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모용농은 방연(龐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양평(襄平·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에 주둔시켰다. 후연은 평주자사(平州刺史)를 평곽(平郭·지금의 랴오닝성 가이저우)에 전진 배치하고, 요동태수를 임명해 요동 지역 경영을 본격화하였다. 즉 385년 고구려의 요동반도 진출은 후연의 반격으로 인해 불과 5개월 만에 좌절된 셈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고국양왕 때 요동을 둘러싼 정세를 보여주는 기록은 모두 중국 측 기록이다. 즉 후연의 입장만 반영하고 있을 뿐, 고구려 측의 공세나 정세 변화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기록을 차지한 자가 역사의 승자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후의 정세를 보면 곧이은 고구려의 공세를 추정할 수 있다. 우선 후연이 요동태수 방연을 임명한 기록을 특기하면서도 현도태수 임명 기록이 없는 점을 고려하면 모용농이 귀환한 뒤 다시 고구려의 반격으로 현도군을 상실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385년 당시에 고구려는 신성(新城·지금의 랴오닝성 푸순)에서 한걸음 더 전진하여 지금의 선양 일대를 거점으로 양평에 있는 후연의 요동군과 대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가 요동반도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광개토왕비문의 영락(永樂) 5년조 기사에 보인다.


이 기사는 395년에 광개토왕이 거란족의 일부인 비려(稗麗)를 정벌하고 '양평도(襄平道)'를 통해 귀환하면서 영토를 순수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비문에서 양평도를 통해 역성(力城), 북풍(北豊·지금의 요령성 슈옌) 등을 거치는 광개토왕이 귀환한 경로는 어디일까? 광개토왕의 순수길은 당시 고구려의 요동지역 지배 양상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이를 양평에서 평곽 부근으로 남하하다가 북풍을 거쳐 압록강 하구 일대를 경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경로는 요동반도 중부 일대를 두루 거치는 것으로 영역 통치권의 확인 행위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무렵에는 아직 고구려가 양평과 평곽 일대를 장악하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 즉 후연이 평곽과 양평을 차지하고 있고 고구려가 후성과 북풍의 동쪽 지역을 차지하여 요동반도를 양국이 분점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400년 이후에야 고구려가 요동을 장악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위 영락 5년 기사처럼 광개토왕이 양평도를 통해 순수한 것을 보면 이때는 요동반도 대부분을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광개토왕이 5년에 요동 일대를 순수할 수 있음은 그 이전 언젠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언제일까? 흔히 요동 장악을 광개토왕의 업적으로 알고 있는데, 요동의 영역을 안정시켰다는 점에서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실 광개토왕비문이나 <삼국사기>에는 즉위 초에 광개토왕이 요동지역으로 군사 행동을 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즉 광개토왕 즉위 이전에 요동반도 일대가 이미 고구려 영역 내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는 고국양왕 때 앞서 본 요동군, 현도군에 대한 공격 이후일 것이다. 모용농이 이를 다시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고구려도 다시 반격에 나서서 요동반도 대부분을 장악해갔을 것이고, 후연은 평곽 일대에서 요동군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요동이 갖는 경제적, 인적,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장차 고구려 국가 기반의 핵심 지역이 되는 요동 지역에 대해 공세를 취하고 이를 차지했다는 성과만으로도 고국양왕은 소수림왕 못지않은 업적을 쌓았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왕도 이때 아버지에게 배운 바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재평가해야 할 인물이 많지만, 그 첫자리에 고국양왕을 충분히 꼽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형과 아들 사이에 끼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인물, 그에게 역사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곧 요동 정복의 사실을 탐색하는 길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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