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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연 치하의 부여와 부여인


번동아재 님의 글에서 필(ㅡㅡ;;)을 받아 트랙백 했습니다. 나름 5호16국시대를 관통해서 자료를 찾아보고 연재를 했던 만큼 당시에 대한 사료, 최소 자치통감 정도는 읽어본 터라, 번동아재 님의 글에서 나타난 부여의 행적에 대해서 좀 더 정밀하게 추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이렇게 트랙백을 납치하게 되었습니다. 후후후


《삼국지》 시기까지만 해도 8만 호의 인구를 자랑하며 강성하던 부여는 285년 경 모용외의 공격을 받아 급격하게 약화됩니다. 이 공격으로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였고 그 아들들은 옥저로 도망쳤으며, 도성이 함락되어 1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듬해에 서진의 동위교위 하감이 의려의 아들 의라를 원조하여 부여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모용부 및 고구려의 침탈을 받았고, 결국 346년에 모용황의 아들 모용준의 공격을 받아 사실상 멸망하였습니다. 이때 모용연의 영내로 끌려온 인구가 5만 명에 이를 정도였으며, 국왕 부여현까지 포로로 끌려와 진군장군에 제수되고 모용황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부여의 왕족이 모용연의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종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전연의 통치기에는 특별히 부여계 인물의 활약상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연이 멸망할 당시인 370년, 포위된 수도 업의 성문을 열어 함락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인 여울(餘蔚)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산기시랑의 직위에 있던 여울은 업성 내에 있던 부여, 고구려 및 상당(上黨)의 인질 500여 명을 선동하여 성문을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전연 멸망의 일등공신(?) 중 하나였던 여울이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부견 치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모용수 역시 전연의 멸망에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인 만큼, 여울은 이후에도 모용수의 막하에서 활약하였습니다.


384년, 비수대전의 참패 이후 모용수가 거병하였습니다. 이때 여울은 형양의 태수로 임명되었는데, 모용수가 처음 거병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즉, 여울은 모용수의 유일한 배후지이자 근거지였던 곳의 태수로 임명된 것이었으니,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도 여울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울이 형양태수에 임명되자 요서 일대의 선비족과 여러 부락들이 모두 모용수에게 자진해서 복속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들 가운데에는 부여의 부락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직후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면서 여러 부하들을 책봉하였는데, 여울은 부여왕에 책봉되었습니다. 모용수 치세 동안 여울은 후연의 중신으로 계속 활약하였으며, 중원을 상실한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편, 모용수의 거병 소식을 들은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은 한단 일대에서 병력을 모았는데, 이에 호응한 여러 부락들 가운데 부여계로 추측되는 부락이 있습니다. 이 부락의 수장은 여화(餘和)인데, 동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계라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이때 이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여계로 추측되는 또 다른 인물로는 여암(餘巖)이 있는데, 그는 후연의 건절장군으로 385년 가을 무렵에 반란을 일으켜 계(지금의 북경)을 약탈하고 요서군 서부 일대를 점거하였습니다. 여암의 반란은 3~4개월 정도 계속되었으나 곧 모용농이 용성으로 진주하여 진압하였고 여암은 처형되었습니다. 성이 부여계 성씨인 여씨이고, 반란을 일으킨 뒤 점거한 지역으로 볼 때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396년에는 기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평규를 공격하기 위해 진동장군 여숭(餘嵩)이 출진하였는데, 평규에게 패해서 죽고 맙니다. 여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부여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같은 시기 여숭의 아들 여숭(餘崇)이 용성에 진주하였던 모용회의 막하에서 건위장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숭은 모용회의 부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모용회가 모반을 획책할 당시 이를 저지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모용회가 처단된 뒤에도 모용보의 친위대로 선발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398년에 난한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모용보와 모용성을 받들고 유랑하였으며, 이후 모용보가 난한에게 붙잡혀 살해당할 때에도 그를 숙위하다가 먼저 살해당하였습니다.


398년 이후 후연은 중원을 완전히 상실하고 유주 일대의 소국으로 전락합니다. 이후에는 399년에 모용성에게 모반죄로 살해된 산기상시 여초(餘超)를 마지막으로 부여계로 추측되는 인물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실제 부여계의 인물이 모용연의 중신으로 활약한 시기는 후연 초기에 집중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여울의 활약이 대표적인데,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옛 부여왕(故扶餘王)"이라 나타나고 있어 전연 때 끌려왔던 부여현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만큼 요서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록된 뉘앙스만 보자면, 모용수의 거병에도 꿈쩍 않던 요서 일대의 부락들이 여울의 지지가 확실해지자 모용수에게 대거 투항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실상 모용수는 전연이 멸망하기 훨씬 전부터 전연을 떠나 있었고, 전연에서 숙청되다시피 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영향력을 여울이 보충해 주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울 말고는 부여계의 활약이 좀 뜸한 감이 있습니다. 여숭 부자는 부여계인지가 확실하지 않으며, 여암의 경우에는 모반을 일으켜 자립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여암의 반란을 요서 일대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부여계의 반란으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합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여담이지만, 남조계 사서의 요서백제 기록을 이 여암의 반란에 연관짓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와 같은 성씨인지라 남조에서 이를 착각했다고 보는 것이죠.


아무튼 뇌내망상으로 소설을 써보자면, 여울이 부여현의 아들일 경우에 활동 연대가 거의 맞아 떨어집니다. 부여현이 끌려온 것이 346년으로, 이때 모용황의 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면 370년대에서 390년대까지의 여울의 활약 시기와 나이대가 얼추 맞습니다. 390년대 후반에 사망했다고 보면 대략 50대 초중반에 사망한 것이 되죠. 그 이전에 낳은 아들이라고 해도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요서 일대에서 존속했던 부여계 세력의 직접적인 흔적은 잘 나타나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여암의 반란이 거의 유일한 흔적으로 보입니다. 이 반란이 정말 부여계의 반란이었다면 반란이 실패함으로써 부여계 세력이 와해되거나 위축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여울은 여암 이후에도 계속 후연 중앙 정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지라... ㅡㅡ;;


아무튼 이렇게 단편적으로나마 모용연의 치하에서 활약하였던 부여계의 흔적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역밸 제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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