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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Ⅲ.부여의 성장과 교통로" 을 가져왔습니다.
부여의 성장과 교통로
이도학 1997년
송화강을 끼고 있는 길림시 일원을 무대로 하여 성장한 부여의 존재는 복생(伏生)이 저술한 '상서대전(尙書大傳)'에 “무왕(武王)이 상(商)을 꺾자, 해동제이(海東諸夷)와 부여가 복속하였는데, 모두 도로가 통하였다”라고 하여 보인다. 기원전 8~7세기 경에 부여와 주(周) 사이의 교섭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사기(史記) 화식전(貨殖傳)'에도 연(燕)과의 교섭 대상으로서 “북쪽으로는 오환(烏桓)․부여와 이웃하였고, 동쪽으로는 예맥․조선․진번의 이득을 꿴다”라고 하여 보인다. '한서(漢書)' 왕망전에는 “대저 연(燕)은…그 동쪽으로 나오면 현도․낙랑․고구려․부여에 이른다”31)라고 하여, 이들 지역과 왕래할 수 있는 교통로가 확보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로 보아 부여는 주대(周代)부터 한대(漢代)에 이르기까지 중원대륙과 빈번하게 교섭을 가졌는데, 말할 나위 없이 교통로가 개척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여의 중심 거점을 최근의 견해에서처럼 길림시 일원이라고 한다면, 부여와 중국 역대왕조와의 교섭은 지금의 요양에 설치된 요동군치(遼東郡治)를 기점(起點)으로 하여 살펴볼 때 다음과 같다. 즉,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가다가 한대(漢代)의 고업현(高業縣, 지금 심양 남쪽 위가루자/魏家樓子 한성/漢城)을 지나 혼하(渾河) 동북쪽으로 연변을 따라 가면 현도군치(玄菟郡治)였던 혼하 남안(南岸)의 지금 무순시 노동공원(撫順市 勞動公園)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혼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길림성 경계인 유하(柳河)와 휘발하곡도(輝發河谷道)의 분수령인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송화강에 연한 교통로를 따라 곧바로 북쪽으로 가면 지금의 길림시 동교(東郊)인 송화강 右岸의 부여 왕성이 소재한 곳이 된다.32) 부여와 중원대륙과의 교섭은 이 통로를 이용한 것으로 보겠다. 길림시 일원에서 출토되고 있는 전한(前漢)의 오수전(五銖錢)․동경(銅鏡)․삼릉동촉(三棱銅鏃)을 비롯하여 한식(漢式) ‘장락미앙(長樂未央)’ 명(銘 )와당, 오수전 무늬가 있는 한대(漢代)의 도자기편․도조(陶灶)․이환(耳环) 등은 흔히 한대(漢代) 분묘에서 발견되는 명기(皿器)였다.3) 그 밖에 영길현 오랍가 학고촌(永吉縣 烏拉街 學古村)에서 출토된 연호문명대(連弧文銘帶) 동경(銅鏡)도 마찬가지 경우로서, 이러한 중국제 물품은 그곳과의 교섭의 산물임은 의심의 여지 없다.
부여의 영역 또한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가변적이었다. 3세기 단계의 부여는 북쪽은 약수(弱水),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鮮卑)와 경계를 이룬 사방 2천여 리(里)의 영역이었다.34) 이 영역 안에 8만호의 주민이 거주한 것인데,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가축 이름에서 따온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를 비롯하여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고, 제가(諸加)는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관장하였다고 한다.35)
여기서 제가가 관할하는 사출도는 문자 그대로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뻗어나가는 4개 방향의 교통로를 가리킨다. 이는 교통로를 따라 형성된 부여의 행정구획을 말한다. 주지하듯이 중앙인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조성된 4개 통치 구역, 그러니까 전국적으로 모두 5개 통치 구간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제가(諸加)들은 교통로를 따라 형성된 수백 가(家) 혹은 수천 가(家)의 읍락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통치 형태는 부여의 영향을 깊숙히 받은 고구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에 의하면 “△道城民谷民(도성민곡민)”36)라고 하여 ‘△道(도)’ 주변에 성민(城民)이나 곡민(谷民)이 거주하였음을 알려주는데, 사출도와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보겠다.
사출도는 부여의 왕성이 소재한 지금의 길림시를 기준으로 할 때, 그 서북편의 주타이(九台,구태)→창춘(長春,장춘)에서 북상(北上)하는 선비로(鮮卑路)와, 그 서남편으로 뻗어 현도군이 소재한 무순과 심양→요동군치인 지금의 요양에 이르는 현도(玄菟)․요동군로(遼東郡路), 그 동남편으로 뻗어 돈화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읍루로(挹婁路), 그 밖에 그 북쪽으로 뻗어가는 약수로(弱水路)를 설정해 볼 수 있다. 이 4개의 교통로 가운데 부여는 선비로를 통해 갑주(甲冑)․병기(兵器) 문화를 섭취할 수 있었다고 보겠다.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 유적을 선비족의 기마문화(騎兵文化)로 간주하는 견해는37) 타당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 유적에서 확인된 병기문화(兵器文化)가 선비의 영향을 받았음은 인정할 만한 것이다. 또, 부여는 현도(玄菟)․요동군로(遼東郡路)를 통해 중국제 물품을 받아들였다. 앞서 언급한 물품들은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유입되어 왔던 것이다. 부여왕의 장례에 사용하기 위해 현도군에 비치해 두었던 옥갑(玉匣)을 통해서 잘 읽을 수 있다.38) 반대로 부여의 특산물인 명마(名馬)라든지 적옥(赤玉), 담비와 원숭이 가죽 등도 이 교통로를 통하여 중국에 수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읍루로는 현도(玄菟)․요동군로(遼東郡路)에 필적할 만큼 부여로서는 비중이 큰 교통로였다. 읍루로의 한 지선(支線)은 고구려와의 연결통로였으며, 부여가 현도와 요동군을 통해서 호사품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크면 클수록,그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할 수 있는 대상은 읍루로를 통한 읍루 지역이었다. 장광재령 동편의 목단강 유역에 거주하는 읍루 영역에서는 오곡과 삼이 재배되었고, 소․말․돼지와 같은 가축이 사육되었으며, 적옥(赤玉)과 담비가죽이 산출되었다.39) 부여의 특산으로 알려진 적옥과 담비가죽 가운데 많은 양은 읍루로부터 징수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해 주는 만큼, 부여의 읍루에 대한 지배의 정도를 가늠케 한다. 마지막으로 북방의 약수로를 통해서 부여가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은, 조․보리와 같은 농작물을 비롯하여 꿩이나 멧돼지도 포함되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40) 漁獵物이 주종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41)
사출도와 관련해 부여의 정치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부여는 현도군과 교섭을 맺으면서 성장했는데, 106년에 지금의 무순 지방으로 이동해 온 현도군과의 상설 교통로가 개설(開設)되어 있었다. 즉, 지린(吉林,길림)→장춘(長春,장춘)→쓰핑(四平,사평)→톄링(鐵嶺,철령)→푸순(撫順,무순) 통로가 양자(兩者)를 연결지어 주는 간선도로(幹線道路)였다고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길림시 동교(吉林市 東郊), 송화강 우안(松花江 右岸)→휘발하곡도(輝發河谷道)→길림성 경내 유하(吉林省 境內 柳河)→혼하 상류(渾河 上流)로 이어지는 하곡도(河谷道)를 설정해 볼 수 있다.42) 그런데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外夷)들을 위력(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43)라고 한다. 부여는 이제는 요동군과 교섭을 가지게 됨에 따라 요동군이 설치된 지금의 요양 지역과의 교통로가 정비․개척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부여의 수도인 지금의 길림시에서 현재의 요양에 이르는 교통로는 현도군 치소인 무순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부여 사신들이 현도군 치소를 통과하면서까지 요동군과의 교섭만 전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부여는 지금의 길림에서 무순을 우회하여 요양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했을 가능성을 제기해 준다. 길림(吉林)→장춘(長春)→사평(四平)→철령(鐵嶺)→심양(瀋陽)→요양(遼陽)에 이르는 교통로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요동태수 공손도는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두 세력 사이에 끼어있는 부여를 통해 이들을 견제하고자, 종녀(宗女)를 위구태에게 시집보내기 조차 하였다.44) 이후 부여는 중국 역대왕조와의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삼국지'에 의하면 3세기대 부여의 정치사를 읽을 수 있는데, 국왕 밑에 마가․우가․저가․구가가 있었다. 또, 사출도를 관장하였던 제가(諸加)들은 국왕에 대한 옹립(擁立)과 외침(外侵)이 있게 되면 자신의 관할 구역을 몸소 지키는 계층이었다. 여기서 제가(諸加)와 대축명 가(六畜名 加)와의 관계가 궁금하다. 제가(諸加)는 육축명 가(加)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가(加)를 가리키는 호칭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에 기재된 그것은 육축명 가(加)에 한정해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우가(牛加)의 조카로서 대사(大使)에 있던 위거(位居)가 권력을 틀어쥐어 해마다 위(魏) 조정(朝廷)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위군(魏軍)의 고구려 원정시 대가(大加)를 파견하여 군량을 제공해주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것을 놓고 볼 때, 가(加)가 지방을 통치하는 장관이라면, 대사(大使)는 중앙의 장관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육축명 가(加) 계층은 우가(牛加)의 조카인 위거가 대사가 되어 정무를 장악하였듯이 중앙정계와 연계되어 존재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요컨대 중앙귀족층이 지방을 관장하는 육축명 가(加)로서 파견되었음을 시사해준다. 그것도 수도를 축(軸)으로 한 간선도로(幹線道路)인 사출도(四出道)를 장악하였음은, 중앙권력과 지방세력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중앙권력의 확대선상(擴大線上)에서 육축명 가(加)들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한편 부여왕 간위거의 서자(庶子)인 마여(麻余)는 제가들의 옹립을 받아 즉위하였다. 그러므로 마여의 권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가(牛加)의 형(兄)의 아들인 위거(位居)가 디사(大使)가 되어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을 뿐 아니라, 위(魏)의 수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위거에게 살해된 그 계부(季父)인 우가(牛加) 부자(父子) 또한 야심을 품고 있었고, 또 상당한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볼 때 마여 재위시 부여 중앙귀족들간에는 중국 군현이나 그 본토와의 개별적인 교섭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에 필요한 공물은 읍루를 통해 조달받기 위해 가혹한 수탈을 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견디지 못하여 읍루는 황초(黃初) 연간(20~26)에 반란을 일으켜 부여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부여에서는 여러 차례 출병을 하였지만, 읍루의 산험(山險)한 지세와 전율(戰慄)할 만한 위력(威力)을 지닌 그 독화살 때문에 끝내 복속시키지 못하였다.45) 여러 차례에 걸친 읍루 정벌의 실패와 더불어 ‘제가자전(諸加自戰)’식의 전투로 인한 소속 읍락의 피폐, 그리고 읍루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함에 따라 이 교통로를 관장했던 가(加)의 급속한 세력약화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선비로의 경우도 285년 모용선비의 기습적인 부여 공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선비세력의 압박에 따라 군사적 부담의 증대에 따라 상대적으로 교역의 침체를 가져왔다고 보겠다. 다만 현도․요동군로만 그 비중은 변함없이 가위 절대적이라고 하겠는데, 이 교통로와 인근 촌락을 관장했던 가(加)는 우가(牛加)로 추정된다. 우가(牛加)는 이로써 정치․경제적으로 든든한 토대를 쌓았을 뿐 아니라, 부여 조정과 중국군현이나 왕조를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석
31) 漢書 권9, 王莽傳.
32) 王綿厚․李健才, 앞의 책, pp.37~38.
33) 武國勛 著․李道學 譯, 夫餘 王城新考-前期 夫餘 王城의 發見 (우리 文化 1월호, 1989) p.36.
34) 三國志 권30, 夫餘 條.
35) 三國志 권30, 夫餘 條.
36) 韓國古代社會硏究所,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1992) p.94.
37)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楡樹 老河深(1987) pp.1~86.
38) 三國志 권30, 夫餘 條.
39) 三國志 권30, 挹婁 條.
40) 靺鞨의 各部 가운데 제일 북쪽에 위치한 黑水部의 産物이 참고된다(王承禮 著․宋基豪 譯, 발해의 역사, 1987, p.49).
41) 약수로의 존재는 그 효용성으로 볼 때 불투명하다. 사출도를 北路는 선비로, 西路는 현도․ 요동군로, 東路는 읍루로라고 할 때 南路는 고구려와의 연결 통로일 가능성을 제기해 준다.
42) 王綿厚․李健才, 앞의 책, pp.35~38.
43) 三國志 권30, 夫餘 條.
44) 三國志 권30, 夫餘 條.
45) 三國志 권30, 挹婁 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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