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29_0020&fileName=kn_029_002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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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막루국(豆莫婁國)의 위치문제(位置問題)
김정배, 1991
부여인(夫餘人)들이 건국한 두막루(豆莫婁國)의 위치를 고찰하는 데는 앞의 사료에서 보았듯이 다음의 두가지 기사를 주목해야 한다.
가) 豆莫婁國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나) 達末婁自言 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渡那河 因居之 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
가)와 나)의 기사를 견주어서 고찰해보면 우선 고구려(高句麗)에 의해 부여(夫餘)가 멸하게 되자 주민들이 나하(那河)'를 건너가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위치가 물길(勿吉) 북쪽 천리되는 지점의 구부여(舊夫餘)지역으로 실위국(失韋國)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은 바다에 닿는다고 위치와 그 방향을 설정해 놓았다. 나)의 자료는 유귀(流鬼)조의 사료인데 부여인(夫餘人)들이 건넜다는 나하(那河)를 찾게 되면 대략의 위치가 드러나게 된다. 펑자성(馮家昇)은 나하(那河)를 지금의 눈강(嫩江)으로 보고 두막루(豆莫婁)의 중심을 흑이근(黑爾根,지금의 눈강성/嫩江城)에다 비정한 바26) 있다. 백조(白鳥)는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의 합류점 이북인 흑룡강(黑龍江)유역으로 보았고27) 진전(津田)은 지금의 하르빈 대안의 부근으로28) 위치를 선정하였다. 이건재(李健才)는 두막루(豆莫婁)가 눈강(嫩江) 상류 이동에 있어야 하며, 따라서 제일송화강(第一松花江) 이북과 제일송화강(第一松花江) 하류의 호눈(呼嫩)평원 일대로 위치를29) 잡고 있다. 동만륜(蕫万侖)은 나하(那河)를 눈강(嫩江)의 동류(東流)단과 제일송화강(第一松花江)지역으로 보면서 두막루(豆莫婁)는 제일송화강(第一松花江) 이북, 눈강(嫩江) 이동이라는 견해를30) 밝히고 있다. 이 방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같은 견해에 동의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사료를 보는 시각이 다른 경우 위치를 비정하는 과정에서 다른 의견이 나오게 된다. 예컨대 장보취안(張博泉)은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의 부여(夫餘)가 호눈(呼嫩) 평원 일대라고31) 시대와 위치를 달리보고 있다. 이것은 부여(夫餘)의 초기 건국지역을 어느 지역에 비정하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년의 학술성과에 따라 길림(吉林)일대로 발원지를 설정하게 되면 이를 중심으로 그간의 변화 과정을 살피고, 그리고 나하(那河)를 건넜다는 기사를 고려하면 순리에 따른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보취안(張博泉)처럼 부여(夫餘)의 초기 도읍지를 처음부터 호눈(呼嫩)평원 일대라고 보게 되면 완전히 다른 위치비정에 따라 해석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부여인(夫餘人)들이 나하(那河)를 건넜다는 시기는 통념적인 부여사(夫餘史)에서는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두막루(豆莫婁)도 그러한 분위기에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三國志》에서 나오는 부여의 위치와 《魏書》에서 나타나는 두막루(豆莫婁)는 각기 강역이 다르다는 점이다. 사료(史料)에 보이는 녹산(鹿山)이나 서사근연(西徙近燕)이나 나하(那河)를 건넜다는 기사 등은 부여와 두막루(豆莫婁)지역이 상이한 위치에 시간적인 선후관계가 있다는 전제 위에서 해석을 가해야 의미가 떠오르게 된다.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두막루(豆莫婁)가 자리잡은 지역이 ‘구북부여(舊北夫餘)’라는 사실에서 불필요한 사실의 연결을 ‘구북부여(舊北夫餘)’에다 붙이는 것 같다. 이는 부여의 출자와 연결이 되는 문안이고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이 도리에 맞을 것이다. 두막루인(豆莫婁人)들이 ‘구북부여(舊北夫餘)’에 다시 와서 건국을 하였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橐离傳說과 맞물려 해석해 보는 것이나 이 문화(文化)를 일금보문화(日金寶文化)로 파악해 보려는 시도는32) 좋은 착상이라고 하겠다. 두막루인(豆莫婁人)들이 와서 건국한 지역이 구부여(舊夫餘)가 아니고 ‘구북부여(舊北夫餘)’라고 한 것은 깊은 역사성(歷史性)이 내재(內在)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 같다.
부여족(夫餘族)의 두막루인(豆莫婁人)들은 나하(那河), 즉 눈강(嫩江) 하류와 제일송화강(第一松花江)을 건너 호눈(呼嫩)평원, 또는 송눈(松嫩)평원 일원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두막루(豆莫婁)의 영역을 언급하면서 동쪽의 위치를 가리키는 ‘동지어해(東至於海)’의 위치에 대해서도 견해들이 다르다. 이 ‘해자(海’字)를 제일송화강(第一松花江)과 오오츠크해(海)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3) 이는 바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큰 호수를 ‘해자(海’字)로 표시한 것이라고 하여 지금의 박랑호(博朗湖)로34)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두막루(豆莫婁)의 위치문제는 변방 쪽보다는 중심과 주변 국가와의 관계가 중시되어야 할 것 같다.
나하(那河)를 건너간 두막루인(豆莫婁人)들은 자연 실위(失韋)·물길(勿吉) 등 주변 민족들과 접하면서 살게 되었다. 원래 부여(夫餘)의 언어는 고구려(高句麗)와 같았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이 자료는 부여와 고구려의 전반적인 법속(法俗)이 같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한 부여인(夫餘人)이 지역을 옮겨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설한 후에는 주위 민족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된 것 같다. 그러한 변화 가운데 하나가 언어라고 하겠다. 《위서(魏書)》 실위국(失韋國)조에는 다음의 기록이 나온다.
語與庫莫奚契丹豆莫婁同.35)
이것은 실위(失韋)의 말이 고막해(庫莫奚)·거란(契丹)·두막루(豆莫婁)와 같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여기에 두막루(豆莫婁)가 등장하는 것은 그들의 말에 변화가 왔다는 것을 뜻한다. 원래 사용하던 부여(夫餘)의 언어 대신에 시간이 흐르면서 인접 국가의 언어가 스며 들게 되었다. 두막루(豆莫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은 두막루(豆莫婁)의 국세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두막루어(豆莫婁語)가 예맥어(濊貊語)와 동호족어(東胡族語)의 혼합이라는 견해는36)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두막루(豆莫婁)가 위치한 주변 국가와의 상황을 고려하면 납득이 가는 일이다. 사료에는 두막연(豆莫宴)가 조공(朝貢)에 참여하는 기록이 두 차례 나타나면서 차츰 그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다.
가) 三年十月(567) 突厥大莫婁失韋百濟靺鞨等國 各遣使朝貢.37)
나) 五年二月(569) 大莫婁國 遣使朝貢.38)
여기의 대막연(大莫宴)는 물론 두막루(豆莫婁)이다. 6세기에 와서 조공(朝貢)관계로 두번 이름이 사서에 보이고 있다. 8세기에 와서는 당(唐) 현종대(玄宗代)에 한번 등장하고 있다.
(開元)十二年(724) 達莫婁大首領諾皆諸來朝 開授折衝 放還藩.39)
여기서 보이는 달말루(達莫婁) 역시 두막루(豆莫婁)를 일컫는다. 이 기사를 끝으로 두막루(豆莫婁)는 사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주석
26) 馮家昇, 〈豆莫婁國考〉(《禹貢》 半月刊 第一·二·三 合期, 1937), p.20.
27) 白鳥庫吉, 〈東胡民族考〉(《史學雜訪》 23) p.261∼262.
28) 津田左右吉, 〈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吿》 1).
29) 李健才, 《東北史地考略》(吉林文史出版社, 1986) p.38.
30) 蕫万侖, 《東北史綱要》(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p.108.
31) 張博泉, 앞의 책(1982) 및《東北地方史稿》(1984) p.74 참조.
32) 干志耿, 〈橐离文化硏究〉(《民族硏究》 二期, 1984).
33) 李健才, 《東北史地考略》(吉林文史出版社, 1986) p.38.
34) 張博泉, 〈魏書豆莫婁傳中的幾個問題〉(《黑龍江文物叢刊》 第二期, 1982) p.38.
35) 《魏書》 권10, 列傳 제8 失韋조.
36) 傳朗云·楊暘,《東北民族史略》(吉林人民出版社, 1983) p.93.
37) 《册府元龜》 권969, 外臣部 朝貢2.
38) 《册府元龜》 권969, 外臣部 朝貢2.
39) 《册府元龜》 권975, 外臣部20 褒異 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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