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29_0020&fileName=kn_029_0020.pdf
* "豆莫婁國 硏究 - 金貞培" 중 "Ⅰ.《위서(魏書)》 두막루전(豆莫婁傳)의 검토(檢討)"만 가져왔습니다.
《위서(魏書)》 두막루전(豆莫婁傳)의 검토(檢討)
김정배, 1991년
부여(夫餘)와 두막루(豆莫婁)를 비교 검토하려면 각기 이에 해당하는 사료를 대비해 보아야 한다. 부여에 관해서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부여(夫餘)조를 곧바로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두막루(豆莫婁)라는 이름은 《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의 두막루(豆莫婁)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위서(魏書)》의 두막루(豆莫婁)조는 동이전(東夷傳)이라는 특별한 전(傳)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는데 특성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彊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 以六畜多官 邑落有豪帥 飲食亦用爼豆 有麻布衣 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俗▼(女+䍃) 尤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 穢貊之地也.
이 두막루(豆莫婁)조는 168자(字)로 이루어 졌으며 십중팔구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조의 기사가 그대로 전재되어 있다.4) 따라서 두막루국(豆莫婁國)의 사료를 면밀히 분석하면 펑자성(馮家昇,풍가승)의 지적처럼 다음의 개수오구(開首五句)만5) 첨가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전부 부여(夫餘)조의 기록을 요약한 것이다. 그 5구(句)는 다음과 같다.
豆莫婁國在勿吉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夫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이 5구(句)는 《三國志》의 부여(夫餘)조에는 없는 내용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부여(夫餘)조의 기사는 “夫餘在長城之北……北有弱水”이다. 다시 말해서 부여의 위치를 설명하는 이 구절에 대응하는 것이 두막루(豆莫婁)조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5구의 문안이다. 따라서 부여(夫餘)의 강역을 표시하는 ‘부여 재장성지북(夫餘 在長城之北)’ 등 개수오구(開首五句)의 문안 대신에 두막루(豆莫婁)조에서는 5구(句)로 두막루(豆莫婁)國의 강역을 서술하고 있다. 양자의 이같은 차이만을 제외한다면 그 외의 내용은 두막루(豆莫婁)조의 기록이 《삼국지(三國法)》 부여(夫餘)조의 기사를 축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두막루국(豆莫婁國)이 시기를 달리하여 건국하였을 뿐 실질적인 역사의 내재된 흐름은 기왕의 부여의 역사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부여(夫餘)와 두막루(豆莫婁) 간에는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논의가 될 것이다.
그런데 두막루(豆莫婁)조의 지리위치를 언급한 대목에 대해서 펑자성(馮家昇)은 물길사신(勿吉使臣)의 보고를 토대로 해서 이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두막루 사신(豆莫婁使臣)으로부터는 들을 수 없었을 것으로6) 이해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관점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물길(勿吉)을 강한 나라로 파악한 전제 위에서 논리가 전개되었다는7) 논점 이외에도 물길(勿吉)의 사신 파견 때에는 두막루(豆莫婁) 등 다른 나라들도 동시에 사신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그같은 관점은 약점이 될 수 있다. 《위서(魏書)》 물길(勿吉)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九年復遣使侯尼支朝獻 明年復入貢 <其傍有大莫盧國> 覆鍾國 莫多回國 庫婁國素和國 具佛伏國 匹黎爾國 拔大何國 郁羽陵國 庫伏眞國 魯婁國 羽眞侯國 前後各遣使朝献.
이 기사는 485년, 486년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데 ‘기방유대막로국)其傍有大莫盧國’은 물길(勿吉)과 접해서 대막로국(大莫盧國)이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대막로(大莫盧)가 두막루(豆莫婁)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많은 중국 학자들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이 자료로 미루어 보아도 위의 12국(國)들이 ‘전후각견사조헌(前後各遣使朝獻)’하였음이 틀림없기 때문에 두막루(豆莫婁)의 위치 등을 알게 된 것은 두막루(豆莫婁) 등의 사신의 보고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 점에서 이 사실을 물길사신(勿吉使臣)의 보고에 의해서 알려진 것처럼 단정한 펑자성(馮家昇)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 의견은8) 옳은 방향을 잡았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점을 갖게 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부여(夫餘)와 두막루(豆莫婁)의 역사가 전후(前後)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고대사의 사료가 담겨있는 중국정사(中國正史)의 경우 동이전을 중심으로 기본자료들이 실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기간 동안 연구자들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몰두하느라 두막루(豆莫婁)조를 간과해 버리는 누를 범하게 되었다. 실제로 두막루(豆莫婁)조가 실려있는 《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만 하여도 각국(國名)이 나열된 순서는 다음처럼 기재되어 있다. 즉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물길(勿吉)·실위(失韋)·두막루(豆莫婁)·지두우(地豆干)·고막해거란(庫莫奚契丹)·오락후(烏洛侯)의 순으로 서술되고 있다.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위서(魏書)》를 비교한다고 할 때 위에서 보이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읽고 나면 그 뒤는 바로 물길(勿吉) 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이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의 역사는 그 이전의 좋은 사서(史書)가 있으므로 《위서(魏書)》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게 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위서(魏書)》에는 신라(新羅)에 관한 자료가 없으므로 그 점에서도 많은 눈길이 가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뇌리에 자리잡고 있는 동이(東夷)·북적(北狄) 등 사이(四夷)에 관한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실위(失韋)·거란(契丹) 등과 섞여 있던 두막루(豆莫婁)를 소홀히 지나쳐 버린 것이 아마도 큰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예컨대 《신당서(新唐書)》에서는 거란(契丹)이 북적)北狄전에9) 실려 있다. 그렇지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위서(魏書)》에서는 거란(契丹)이 고구려(高句麗)나 두막루(豆莫婁) 등과 같이 나란히 하나의 열전(列傳) 속에 나오고 있어 특별히 주목하지 않는 한 자칫 오해나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이같이 외형이라는 형식에 얽매이기 때문에 전후좌우의 내용을 검토하지 않게 되면 두막루(豆莫婁)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사료가 되는 《신당서(新唐書)》 유귀(流鬼)조의10) 내용도 그대로 스쳐버리고 가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유귀(流鬼)조는 고구려·백제·신라·일본과 같이 이번에는 동이전(東夷傳)에 실려 있으나 일본 다음에 나올 뿐만 아니라 유귀국(流鬼國)에 대한 생소함과 그 내용의 간단한 성격 때문에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유귀(流鬼)조에는 다음과 같은 귀중한 구절이 있다.
開元十一年又有達末婁達姤二部 首領朝貢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渡<那河>因居之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
이 자료는 《위서(魏書)》의 두막루(豆莫婁)조와 함께 두막국(豆莫國)의 역사를 조명하는데 극히 중요한 사료이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미루어 왔던 부여(夫餘)와 두막루(豆莫婁)의 역사가 서로 연결된다는 친연관계를 잠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위서(魏書)》 두막루(豆莫婁)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豆莫婁國> 在勿吉北千里……<舊北扶餘>也.
이 자료는 두막루(豆莫婁)가 구북부여(舊北扶餘)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막루(豆莫婁)조에서 개수오구(開首五句)를 제외하고 나머지 내용이 《삼국지(三國志)》 부여(夫餘)조의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 바로 두막루국(豆莫婁國)이 구북부여(舊北扶餘)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위의 사료만 보아도 두막루(豆莫婁)國과 북부여(北夫餘)가 전후(前後)관계에 서 있는 나라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신당서(新唐書)》 유귀(流鬼)조에 보면 두막국(豆莫國)의 전개과정이 아주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앞에서 본 유귀(流鬼)조에 나오는 달말루(達末婁)는 두막루(豆莫婁)이며 이같은 견해는 이 방면 연구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달말루인(達末婁人)들이 북부여(北扶餘)의 후예라고 자신(自言)한다는 이 기사는 앞에서 살펴본 《위서(魏書)》 두막루(豆莫婁)조의 사료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두막루(豆莫婁)는 북부여(北夫餘)지역에서 뒤를 이어 건국한 나라임이 명백해진다.
주석
4) 馮家昇, 〈豆莫婁國考〉(《禹貢》 半月刊 第一·二·三 合期, 1937), p.195.
5) 馮家昇, 〈豆莫婁國考〉(《禹貢》 半月刊 第一·二·三 合期, 1937), p.195.
6) 馮家昇, 〈豆莫婁國考〉(《禹貢》 半月刊 第一·二·三 合期, 1937), p.196.
7) 《魏書》 권10, 列傳 제8 勿吉조, “於東夷最强……常輕豆莫婁等國 諸國亦患之.”
8) 魏國忠, 〈豆莫婁考〉(《學習與探索》 三期, 1982) p.137.
9) 《唐書》 권219, 列傳 제14.
10) 《唐書》 권20, 列傳 제145
'한국사 > 부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막루국의 위치문제 - 김정배 (0) | 2019.10.12 |
---|---|
두막루국의 건국문제 - 김정배 (0) | 2019.10.12 |
동부여 - 문화콘텐츠 (0) | 2019.10.12 |
북부여 - 문화콘텐츠 (0) | 2014.12.13 |
조선 중기, 십만 대군도 아내가 두려웠다 - 오마이뉴스 (0) | 2014.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