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CCHrH9


동부여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동명(東明)이 일어날 조짐을 피해 동해의 가섭원(迦葉原)에 왕도를 옮기고 동부여(東扶餘)라 이름하여 나라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에 나타난 동부여(東扶餘)의 기록은 기이(紀異)1 북부여(北扶餘)조를 통해 “「고기(古記)」에 전한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기원전 58년) 4월 8일에 천제자(天帝子)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고 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하였다.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고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으며, 왕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기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이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다.”라 하여, 북부여왕 해모수가 상제의 명령을 피해 도읍을 옮긴 곳이 동부여이다. 기이1 동부여조에 따르면,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이 곳을 피해가거라.[동명(東明)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이른다.]동해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하다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니,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하였다. 또한 기이1 고구려조에는 “북부여왕 해부루가 먼저 피해 간 땅이 동부여다.(北扶餘王解夫婁 卽避地于東扶餘)”라고 나타내고 있다. 앞서 살펴 본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북부여조에서는 해모수가 옮겨 간 곳이 동부여이고, 동부여조와 고구려조에서는 해부루가 도읍을 옮긴 곳을 동부여라고 하여 기록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동부여의 기록은 권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1 동명성왕(東明聖王) 14년조와 권32 제사지(祭祀志)를 통해서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동부여(東扶餘)에서 죽었다.(王母柳花薨於東扶餘)”하여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동부여의 명칭을 찾아 볼 수 있는 사료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로 “동부여는 본래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도중에 조공해오지 않아 왕이 몸소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라는 기록을 싣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및 「광개토대왕릉비」 등에는 “부여(扶餘)-동부여(東扶餘)-북부여(北扶餘)-졸본부여(卒本扶餘)”라 지칭되는 다양한 부여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여와 북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면서, 동부여를 따로 떼어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북부여와 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본래 주몽의 고향은 송화강 유역의 북부여로서 기원후 5세기 말에 합병되었으며, 동부여란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씨의 공격을 받은 북부여족의 일족이 세운 나라로 즉 북부여에서 갈라진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다. 북부여란 탁리국 출신의 동명집단이 중심이 되어 길림지방을 그 중핵지로 기원전 3-2세기 말경 국가를 형성하여 4세기 중반경 농안지방을 중심으로 이동 하였고 이후 494년까지 존속한 부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동부여란 고구려 건국 당초부터 실재했던 것이 아니고 기원 후 285년 선비 모용외의 1차 부여 공격으로 부여의 일부 핵심 지배집단이 옥저지방으로 건국한 나라로, 41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사행동에 의해 멸망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박경철, 1994; 노태돈, 1999; 송기호, 2005) 


또 다른 견해로 송눈 평원의 북부여(원부여)와 송화강 유역의 부여 및 원부여 동쪽의 동부여의 실재를 인정하는 견해가 있다. 동부여는 동해안 일대에 실재했던 국가라기보다는 원부여의 동족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는 견해이다. 송눈평원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던 원부여의 세력과 달리 길림 일대를 중심으로 서단산 문화를 조영하면서 발전하던 예족의 세력이 송눈평원 일대 예맥족계의 한 지파가 이주해 새로이 성장하게 되자 이를 동부여라고 불렀다는 견해이다.(송호정, 1997)


동부여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옥저와 예의 관련성 속에서 접근하여 그 위치를 함남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공석구, 1990) 한편 치구루(置溝婁)가 책성이라는 입론 위에서 동부여를 혼춘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노태돈, 1999) 또 최근 동부여의 입지로서 단결문화(團結文化=크로우노브카문화)를 남긴 북옥저 지역에 주목하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송기호, 2005) 이에 대해 혼춘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 북옥저 지방을 고구려가 국초부터 그 세력을 진출시킨 지역이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 동부여의 소재지를 혼춘이 아닌 화룡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주장되기도 하였다.(박경철, 1994)


참고문헌


공석구, 1990, 「廣開土大王陵碑의 東扶餘에 대한 考察」『韓國史硏究』70.

박경철, 1994, 「부여사의 전개와 지배구조」『한국사2-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2』, 한길사.

송호정, 1997, 「부여」『한국사 4: 초기국가- 고조선·부여·삼한』, 국사편찬위원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송기호, 2005, 「扶餘史 연구 쟁점과 자료 해석」『韓國古代史硏究』37.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동부여)


東扶餘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夢 天帝降而謂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謂東明將興之兆也] 東海之濱 有地名迦葉原 土壤膏腴 宜立王都 阿蘭弗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夫婁老無子 一日祭山川求嗣 所乘馬至鯤淵 見大石相對<淚>流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爲太子 夫婁薨 金蛙嗣位爲王 次傳位于太子帶素 至地皇三年壬午 高麗王無恤伐之 殺王帶素 國除


동부여

북부여(北扶餘)왕 해부루(解夫婁)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이 곳을 피해가거라.[동명(東明)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이른다.]동해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하다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니,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부루(夫婁)가 늙고 아들이 없어서 하루는 산천에 제사지내 후사를 구하였다. 탔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고 하고, 이에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자라자 태자(太子)로 삼고 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는 자리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壬午)에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이를 쳐서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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