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29_0020&fileName=kn_029_0020.pdf

* "豆莫婁國 硏究 - 金貞培" 중 "Ⅱ.두막루국(豆莫婁國)의 建國問題"만 가져왔습니다.


두막루국(豆莫婁國)의 건국문제(建國問題)

김정배, 1991


우리는 《위서(魏書)》 두막루(豆莫婁)조와 《신당서(新唐書)》 유귀(流鬼)조를 통해 두막루(豆莫婁)와 부여(夫餘)11)가 시기를 달리할 뿐 같은 주민이 세운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 두막루국(豆莫婁國)의 건국이 자연 관심의 대상이 된다. 두막루국(豆莫婁國)의 건국에 대해서는 《신당서(新唐書)》 유귀(流鬼)조에서 하나의 큰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유귀(流鬼)조에는 ‘고려멸기국(高麗滅其國)’이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국(其國)은 부여(夫餘)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대로 따르게 되면 달말루(達末婁) 즉, 두막루(豆莫婁)는 고구려가 부여를 멸한 뒤에 건국하였다는 뜻이 된다. 우선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고구려(高句麗)가 부여(夫餘)를 멸하였다는 사료로는 아래의 두 기사가 있다.


가) (大武神王 5년)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吾亦不肖 無以興復.12)

나) (文咨明王 3년) 二月 扶餘王及妻孥以國來降.13)


가)의 경우 고구려(高句麗)가 부여를 공파하여 왕을 살해하는 등 큰 피해를 주었으나 대무신왕(大武神王) 자신이 군신회의에서 ‘미멸기국(未滅其國)’이라고 언급한 점을 보면 부여왕(扶餘王)의 종제(從弟)가 말한 ‘신망국멸(身亡國滅)’은 부여의 멸망으로 볼 수가 없다. 또 2년이라는 연대(年代)로 보아도 이와 연관시켜 두막루국(豆莫婁國)을 운위하기에는 전후사정이 맞지가 않는다.


나)의 경우에는 494년에 부여가 나라를 바침으로써 멸망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펑자성(馮家昇)14)이나 장보취안(張博泉,장박천)은15) 이 자료에 큰 비중을 두고서 494년에 부여가 멸망된 것과 관련시켜 두막루(豆莫婁)가 건국하였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문자명왕(文咨明王) 3년에(494) 부여가 멸망하였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이 기사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견해도16) 있다. 설사 494년에 부여가 멸망되었다고 하여도 이를 기점으로 해서 두막루국(豆莫婁國)이 건국하였다고 보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494년 이전에 이미 두막루(豆莫婁)가 있기 때문이다.


《위서(魏書)》 勿吉전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九年 復遣使侯尼支朝獻 <明年>復入貢 其傍有<大莫盧國>.


태화(太和) 9년에 이어 10년(486)에도 입공(入貢)이 있는 바 이때 대막로국(大莫盧國)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여기의 대막로국(大莫盧國)이 두막루(豆莫婁)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같은 이유에서 보면 두막루국(豆莫婁國)의 건국을 494년 이후에서 구한다는 것이 큰 무리가 따른다는 것을17) 알게 된다. 그렇다면 《신당서(新唐書)》 유귀(流鬼)조에서 ‘고려멸기국(高麗滅其國)’이란 반드시 부여(夫餘)가 멸망하였다는 뜻보다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부여가 심대한 타격을 입고 멸망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이른 것을 말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다른 자료를 대비해서 볼 수가 있다. 이 점은 다시 논의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부여(夫餘)는 고구려(高句麗)로부터만 침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선비(鮮卑)인 연왕(燕王) 모용암(慕容庵)의 침입을 받아 파멸 직전까지 가고 있다. 《진서(晋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조에는 다음의 기사가 있다.


至太康六年 爲慕容庵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18)


285년에 부여는 모용외(慕容庵)의 침공을 받아 크게 흔들리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료를 보면 다음해에 그 아들 위라(依羅)가 진(晋)의 도움을 받아 구국(舊國)을 회복하였다. 큰 피해는 모용황(慕容皝)의 침공을 받으면서 국토가 황폐해졌다.


遣其世子 儁與恪 率騎萬七千 東襲夫餘剋之 虜其王及部人五萬餘口以還.19)


346년에 모용황(慕容皝)은 부여를 침공해서 왕과 5만인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때 부여가 멸망된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가20)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난점이 있어 논의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부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高句麗)와 연(燕)의 침공으로 시달림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부여는 고구려(高句麗)의 침략을 받아 연(燕)나라 가까이 옮긴 적도 있었다.


初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21)


이 기사는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고구려(高句麗)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이처럼 나라를 옮기던 부여는 346년 모용황(慕容皝)의 침입으로 국세가 기울어졌으나 《진서(晋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자료만으로는 부여멸망을 단언하기가 어렵다. 《위서(魏書)》 고종기(高宗紀)를 보게 되면 문성제(文成帝) 태안(太安) 3년조(457)에 다음의 기록이 나오고 있다.


是月(十有二月) 于闐 <扶餘>等五十餘國 各遣使朝獻.22)


이 기사는 457년에 우전(于闐)·부여(扶餘) 등 50여 국이 북위(北魏)에 사신을 파견하는 사료이다. 이 때문에 적어도 457년까지는 부여가 멸망하지 않았음을23) 알려주고 있으며 부여의 멸망을 346년 모용황(慕容皝)의 침공에서 찾는 것은 그 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막루국(豆莫婁國)의 건국문제를 풀기 위해 고구려(高句麗)가 부여를 멸망시켰다는 494년설의 견해와 모용황(慕容皝)의 침공으로 인한 부여의 멸망년대 346년 등을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457년에 부여가 사신을 파견하는 기사가 있고 486년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두막루,豆莫婁)가 이미 사서(史書)에 등장하므로 고구려(高句麗)와 부여의 침공문제는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二十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属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國……


이 기록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410년(庚戌,경술)에 부여(夫餘)를 정벌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부여(餘城)에 진공하였다는 것은 부여(夫餘)가 심대한 타격을 받았음을 뜻한다. 이로 말미암아 부여인(夫餘人)들이 흩어지고 일부가 이를 기점으로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설하였다는 견해도24) 있다. 이것은 《신당서(新唐書)》 유귀(流鬼)조에 보이는 사실을 가장 근사하게 접근하는 연대는 될 수가 있다. 사실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 고구려(高句麗)는 사해(四海)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점하게 되었음은 능비(陵碑)가 여실히 중명하고 있다. 이같은 방대한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북위(北魏) 세조(世祖)가 435년에 이오(李敖)를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에게 보냈을 때 그는 고구려(高句麗)의 영역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었다.


敖至其所居平壤城 訪其方事云 遼東南一千餘里 東至柵城 南至小海 北至<舊扶餘>.25)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의 영역이 舊夫餘에 이르렀다는 것은 410년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영토팽창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신당서(新唐書)》 유귀(流鬼)조의 ‘고려멸기국(高麗滅其國)’을 구태여 찾는다면 이 광개토왕대(廣開土王代)의 정복이 가장 이에 합당한 기록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나타나는 부여의 기사를 고려한다면 두막루(豆莫婁)는 부여의 완전소멸 이전에 건국을 한 것이다. 《위서(魏書)》 고구려(高句麗)전에서 ‘今夫餘爲勿吉所逐’은 부여의 역사가 사라져감을 뜻하는 것이다.



주석


11) 夫餘·北夫餘·東夫餘 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와 있다. 이 점은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어 여기서는 논하지 않는다.

12) 《三國史記》 권14, 高句麗本紀 第二.

13) 《三國史記》 권19, 高句麗本紀 第七.

14) 馮家昇, 〈豆莫婁國考〉(《禹貢》 半月刊 第一·二·三 合期, 1937)., p.197.

15) 張博泉, 〈魏書豆莫婁傳中的幾個問題〉(《黑龍江文物叢刊》 第二期, 1982)

16) 李丙燾, 《國譯 三國史記》(197) p.295.

17) 李健才, 《東北史地考略》(吉林文史出版社, 1986) p.3.

孫進己,《東北民族源流》(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p.132.

___,《東北歷史地理〉(北方史地叢書, 黑龍江人民出版社) p.12.

18) 《晋書》 권97, 列傳 제67.

19) 《晋書》 권109, 載記 제9 慕容皝조.

20) 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p.295.

21) 《資治通鑑》 권97, 晋紀 17 穆帝 2년조.

22) 《魏書》 권5, 帝紀 제 5 高宗紀.

23) 蕫万侖, 《東北史綱要》(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p.106.

24) 李健才, 앞의 논문(1986) p.35∼36.

干志耿·孫秀仁, 《黑龍江古代民族史綱》(黑龍江人民出版社, 1986) p.158.

25) 《魏書》 권10, 列傳 제8 高句麗조.

'한국사 > 부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여의 성장과 교통로 - 이도학  (0) 2019.10.12
두막루국의 위치문제 - 김정배  (0) 2019.10.12
위서 두막루전의 검토 - 김정배  (0) 2019.10.12
동부여 - 문화콘텐츠  (0) 2019.10.12
북부여 - 문화콘텐츠  (0) 2014.12.13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