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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도 벌벌 떤 대한민국 검사님

김형민(SBS CNBC PD) 호수 636 승인 2019.11.30 13:03 


‘피카소 반공법’과 ‘송아지 반공법’으로 이름을 떨친 김종건 검사는 기자를 협박하고 방송사 간부를 잡아 가두기도 했다. 그는 이후 법무부 차관을 거쳐 법제처장까지 역임하며 세상을 뜰 때까지 우러름을 받았다.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 미술관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파블로 피카소의 이름은 알 거야. 우리나라와는 별 인연이 없는 것 같지만 피카소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유명한 그림을 남긴 사람이기도 해.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이야. 1980년대 수정주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쓴 책 〈한국전쟁의 기원〉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던 이 그림은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났던 대학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


배를 내민 임신부, 영문을 모른 채 총 앞에 선 남녀, 아직도 흙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와 영문을 알아차릴 만큼은 철이 들어 공포에 질린 채 엄마에게 달려드는 아이를 향해 중세 기사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군대가 총을 겨눈 모습이야. 신천 대학살에서 신천군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000명이 죽어갔다지. 북한은 미국이 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교세가 막강했던 그 지역 기독교인들과 좌익들의 대립 와중에 발생한 ‘우리끼리의 대학살’이라는 설이 유력해. 어쨌든 신천 대학살 소식은 국제적으로도 큰 파문을 일으켰어. 피카소의 귀에 들어갔을 만큼.


막상 이 그림은 피카소가 가입했던 프랑스 공산당 등 좌익들에게 환영받지 못해. “저 군대가 어느 나라 군대인지 알 수 없잖나”가 그 이유였지. 총을 겨눈 로봇 군단을 ‘미 제국주의자들’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으니 선전 재료로 써먹기에는 2% 부족했던 거야. 반면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는 20세기 예술의 거성 피카소에게 불만과 감시의 눈초리를 부라리게 되지.


전쟁이 막 끝난 1950년대 한국에도 피카소의 근황과 예술적 성취에 대한 언론 보도는 심심찮게 등장하지.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피카소(〈동아일보〉 1959년 7월22일)”라는 투의 소개 기사도 이따금 눈에 띌 정도니까. 그런데 1959년 12월22일 어느 〈동아일보〉 기자는 참 웃기는 일 다 본다는 투의 기사를 쓴다. “서울 중부서에서는 피카소의 화첩을 압수하여 불온성 여부를 검토한 적이 있다. (···) 기자는 그만 흥분하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요?’ 하고 따지자 당황한 K 사찰계장은 ‘업자들이 임의로 제출하길래 다만 연구해볼 뿐이요’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무지한 일을 감행하고 있다고 느꼈는지 혹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느꼈는지 카메라맨을 숫제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빨갱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이를 갈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피카소 화첩을 불온 문서로 모는 건 기자가 보기에 어이없었고 경찰이 보기에도 적잖이 민망했던 모양이지. 그 어이없음과 민망함 모두를 떨쳐버린 인물이 등장해. 대한민국 검사 김종건이라는 사람이야.


“검찰은 프랑스 화가 피카소를 찬양하거나 그 이름을 상표, 광고, 옥호 등에 쓰는 행위가 반공법 제4조 1항 ‘국외 공산 계열의 찬양·고무·동조’에 해당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사에 나섰다. 서울지검 공안부 김종건 검사는 이날 ‘피카소 크레파스’ ‘피카소 수채화 물감’ 등의 이름으로 상품을 만들어내온 삼중화학공업 대표 박정원씨(44)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그 회사 제품의 광고를 중지시켰다(〈중앙일보〉 1969년 6월9일).”


피카소에 대한 김종건 검사의 말,말


피카소의 이름을 상표로 썼다고 반공법을 적용한 거야. 피카소의 이름을 썼다는 자체로 반공법 위반 혐의가 있다는 게 ‘검사 영감님’의 판단이었지. 이것도 어이가 없지만 공안 검사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 방송국 TV의 쇼에서 피카소를 쳐든 곽규석씨와 TV 드라마에서 피카소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킨 모 민간방송의 드라마 제작 경위 등에 대해서도 그 배후를 수사하고 있다(〈중앙일보〉 1969년 6월9일).” ‘후라이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코미디언 곽규석은 생방송에서 누군가 괴발개발 그린 그림을 보고 ‘피카소 같다’고 내뱉었다가 경을 친 거지. 드라마 속 인물이 피카소라는 별명을 지녔다는 이유로 그 배후를 쫓고 있으니 이게 경악할 일일까, 실소할 일일까.


2012년 세상을 떠난 김종건 검사(위)와 1969년 6월9일 〈경향신문〉 기사. ⓒ(왼쪽)법조신문·경향신문 갈무리


예나 지금이나 어렵기로 소문난 시험을 통과한 공인 수재 김종건 검사의 기염을 더 들어보자. “피카소의 예술작품 자체를 두고 일률적으로는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미 공산 블록에 참가하여 예술을 방편으로 공산주의의 정치적 선전에 가담한 행위는 순수예술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다음 말은 가히 피카소의 입체화보다도 해석이 어려워. “피카소의 작품을 단순히 미술품으로 소장, 감상하거나 그의 예술에 대한 연구를 하는 행위는 반공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네 입에서 ‘말이야 방귀야?’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구나. 피카소가 공산주의자이고 불온한 인물이라면 비싼 돈 주고 그 그림을 소장하는 사람을 잡아가는 게 옳지, 크레파스 팔기 위해 피카소 이름 빌려온 사람을 때려잡는 게 될 말이냐. 드라마 대본에 ‘피카소’ 별명을 지닌 인물을 등장시킨 작가의 배후를 의심하는 게 도무지 가능한 상상이냐. 이 대단한 김종건 검사의 명망은 비단 피카소 크레파스 사건에 국한되지 않아.


1964년 임용 2년 차였던 김종건 검사는 이른바 ‘송아지 사건’으로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력이 있어. 대전방송국에서 방송된 〈송아지〉라는 프로그램의 대본이 빈부격차 문제를 다뤘다고 해서 김정욱 작가(〈대전일보〉 편집부장)를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한 사건이었지. 김종건 검사는 “유산계급에 대한 증오심을 북돋워서 모순된 사회구조의 타파를 위한 무산계급의 봉기를 선동한 내용으로서, 공산주의의 기본적인 이론을 자연스럽게 전개, 선전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자극시켜 북괴 및 공산계열의 상투적인 선전에 동조하고 북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한 것(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2〉)”이라고 준엄하게 논고했어. 다행히 판사가 “서울 처녀와 시골 소녀의 심리를 순수하게 묘사했고 작품 전체의 흐름이 반국가단체를 고무·찬양했다는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무죄를 선고했지만 별안간 북한 찬양 방송을 한 죄를 뒤집어쓴 방송국 부장은 얼마나 데굴데굴 구르며 억울해했겠니.


그는 굵직굵직한 ‘공안’ 사건으로 명망을 떨쳤다. 정권의 판사 길들이기에 맞서 판사들이 사표를 내던지며 항거했던 1차 사법파동 때에는 “언론이 지나치게 법원을 편드는데 신문사도 조심해야 할 것”이라면서 기자들을 협박하는 ‘기개’를 선보이기도 했어(〈동아일보〉 1971년 8월5일). 기자를 협박하고 드라마를 핑계로 방송사 간부를 잡아 가두기도 하고, 세계적 예술가를 들먹인 죄로 빨갱이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데 거침이 없었던 공안통 검사는 이후 승승장구 쾌속 항진했고 법무부 차관을 거쳐 법제처장까지 역임하시지. 은퇴한 뒤에도 변호사로 활동하며 여러 상과 우러름을 받다가 2012년 77세로 숨을 거둔다.


수천 명을 헤아리는 전·현직 검사 가운데 어두운 시절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사과한 사람은 오른손 손가락만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귀하단다. ‘피카소 반공법’과 ‘송아지 반공법’으로 사람들을 옭아맸던 김종건 검사도 마찬가지였지. 검사라면 가슴에 새겼을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는 구호가 “하늘이 무너져도 검찰은 영원하다”로 보이는 것은 바로 김종건 검사 같은 이들의 행적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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