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10061800541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34) 50만 고려인의 애환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10.06 18:00 수정 : 2009.10.06 18:33
ㆍ낯선 땅, 차별과 박해 견딘동포들의 아픈 흔적들…
미하로브카 군에 있는 고려인 ‘우정마을’ 전경.
우리에게 블라디보스토크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곳에 동포의 애환이 서려있고, 그 애환을 풀기 위한 그들의 피땀이 흥건히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장을 풀기도 전에 아르촘 공항에서 곧바로 찾아간 곳이 바로 신한촌(新韓村)의 옛터이다. 2009년 7월1일 오후 4시30분, 하바로프스크 거리에 자리한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애잔한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일행은 ‘연해주신한촌기념탑’ 앞에서 촉촉한 옷깃을 여미고 삼가 묵념을 올렸다. 이 기념탑은 1999년 8월15일 해외한민족연구소가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높이가 서로 다른 세 대의 흰 돌기둥으로 구성되었다. 5m쯤 되어 보이는 가운데의 제일 높은 기둥은 인구가 가장 많은 남한을, 그보다 30㎝쯤 낮은 오른쪽 기둥은 북한을, 제일 낮은 왼쪽 기둥은 해외동포를 각각 상징한다고 안내원은 설명한다. 보는 순간 구태여 높이에서 차별을 둘 필요야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상이야 기안자나 조각가의 소관이니 어찌 하겠는가. 밖에는 2.5m 높이의 보호 철책이 둘러쳐져 있다.
원래 마을은 이곳을 시작으로 산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찍이 이곳을 찾은 춘원 이광수는 마을의 정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을은 아무르 만에 면해 있는 절경지로서 집들은 바윗등에 굴 붙듯이 산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러시아풍의 나무로 지은 집은 보통 2~3개의 한국식 온돌방이 있는데, 20여명씩이나 함께 사는 대가족도 있다. 이역에서도 전통을 이어가며 오순도순 정답게 모여 사는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현대적 건물로 꽉 차고 무성한 나무숲으로 뒤덮여 있어 옛 흔적이라곤 남아 있지 않다. 차를 타고 5분 걸려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밋밋한 언덕배기에 ‘알레나’라고 쓴 큼직한 간판이 달린 상점 앞에 멈췄다. 이 상점이 바로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선생의 고택 자리이다. 선생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1907년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될 때 참령으로 강화진위대를 이끌고 대일항쟁을 전개하면서 같은 해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4년 후에는 윤치호 등과 함께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유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1915년 러시아로 망명한다.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이듬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부총리에 취임한다. 성재는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걸출한 애국투사이다.
선생의 고택 옆에는 1912년에 지은 한민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 정문과 교실문마다 태극 문양을 새겨 넣은 이 학교에서는 2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을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교육하고 있었다. ‘보국가’나 ‘대한혼’, ‘애국가’ 같은 학생들이 부른 노래 가사에서 그러한 기상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보국가’ 1절에는 “조국강산 사랑하라 동포형제 사랑하라 우리들의 일편단심 보국을 맹약한다/ 화려할 사 우리 강산 사랑할 사 우리 동포 자나깨나 잊을소냐 길이 보존 우리 국토”라고 절절한 애국애족의 얼과 넋이 넘쳐나고 있다. 학교 건너편의 스탈린구락부 안에는 고려도서관이 따로 있어 성재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고려인들이 이곳에 모여 3·1운동 같은 행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여기서 70여m쯤 내려오니 길 양 옆에 기둥을 세우고 가름대는 솔가지로 장식한 ‘독립문’이 세워졌던 자리가 나타난다. 이 독립문은 신한촌의 대문 역할을 했다. 대문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독립의 의지를 새록새록 가다듬곤 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과대학 교정에 2002년 9월 건립된 ‘안중근 의사 기념비’.
이어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과대학 정원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를 찾았다. 비는 이 대학과 서울 보건신학연구원 사이에 국제적 협력에 관한 협정서 체결을 기념해 2002년 9월5일 세운 것이다. 비에는 ‘인류의 행복과 미래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란 글발이 새겨져 있다. 비 앞에 서니 저절로 숙연해지며 머리가 숙여진다. 순간 대학 시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쏴 넘어뜨린 하얼빈 역을 찾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의사가 그 장거를 준비해 온 현장이 있다. 그곳이 바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한 크라스키노 연추 하리 마을이다. 의사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곳에서 1909년 2월7일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동맹을 결성한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약손가락을 잘라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만세”를 삼창한다. 애국에 불타고 애족에 결연한 열혈청년들만이 펼칠 수 있는 장엄한 장면이다. 의사는 직접 작성한 맹약에서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심단체한 표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지하에 맹세하오니 … 마음을 변치 말고 목적을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세로 누리옵시다”라고 호소한다. 의사는 비록 태평동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한 방울 이슬로 사라졌지만,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그 영롱한 빙거와 표는 정녕 청사에 길이길이 아로새겨져 있다. 핏방울 형상을 한 ‘단지동맹기념비’(2001년 10월19일 세움)의 아롱진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다음날 오후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기울어질 무렵 고려인(러시아어로는 카레이스키, 즉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처음으로 발을 붙인 개척리를 찾았다. 한인들의 긴 이주사와 더불어 뼈저린 애환이 서린 고장이다. 원래 19세기 중엽부터 벌이를 찾아 계절적으로 극동 시베리아 방면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가족 단위로 본격 이주를 시작한 것은 1863년부터이다.
최초로 인접한 함경북도의 13호 농가가 노브고로드 만 연안의 포시에트로 이주한 이래 이곳을 중심으로 서우펀강(綏芬河) 유역과 우수리스크, 그리고 하바로프스크 등 지역으로 이민이 속속 이어졌다. 급기야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극동지역에만도 이민자가 2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이 모태가 되어 고려인들의 거주와 활동 영역은 전 러시아로 확대되었으며, 그 수는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신한촌 옛터에 1999년 8월15일 세운 ‘연해주신한촌기념탑’.
개척리 마을은 한인들의 고달픈 이주사를 고발하는 현장이다. 1873년 군항의 개항과 더불어 개척된 마을이다. 해안가에서 300m 떨어진 마을은 당시로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부였다. 지금은 프그라니치나야 거리라고 하며 상점과 운동장, 스포츠센터 등 현대적 시설물이 빼곡히 들어서 그 옛날의 모습은 완전히 지워졌다. 당시 이곳에는 민족 언론을 주도하던 ‘해조신문사’와 ‘대동공보사’가 자리하고, ‘성명회’란 반일운동 조직과 한인학교도 함께 있었다. 이상설, 유인석 등 훌륭한 지도자들의 눈부신 활동무대였다. 고려인들의 활동 기세를 우려한 러시아 당국은 1911년 봄 난데없는 장티푸스의 박멸을 구실로 이곳에서 고려인들을 강제로 철거시키고 이곳을 기병단의 병영지로 만들었다. 보금자리를 빼앗긴 고려인들은 당국이 지정한 시 서북 변두리의 생소한 마을, 신한촌으로 옮기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낯선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리는 데는 고통과 슬픔이 앞서게 마련이다. 그러한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고려인들이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제정 러시아 당국이 이른바 ‘황화(黃禍)’란 사시(斜視) 속에 가하는 차별과 박해이다. ‘황색인종으로부터의 화’라는 ‘황화’는 황인종, 즉 아시아인에 대한 유럽인의 해묵은 인종차별이다. 1906년 극동지방 총독으로 부임한 운테르베르게르는 고려인의 인구 증가를 ‘엄청난 위험’으로 간주하고 이민 금지, 관유지 임대 금지, 어장의 고려인 노동자 채용 금지 등 각종 제재조치를 취한다. 고려인들은 러시아인들이 도저히 개간할 수 없는 돌밭을 개간하고 나서는 인근 지역을 야금야금 잠식하면서 친지들을 데려다가 새로운 부락을 만들곤 한다. 그래서 10년 안에 러시아인은 그곳에서 쫓겨나게 마련이라는 것이 총독의 판단이다. 또한 ‘황화의 주범’인 고려인의 존재는 극동 안보에도 위협이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37년 18만 극동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바로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삶을 꿋꿋이 개척해 나갔다. 그들의 근면성과 성실성, 강인성은 지어 총독을 자문하는 지방 경찰서장들까지도 공히 인정하는 바였다고 한다. 술을 마셔도 난폭하지 않고, 중국인들처럼 강도나 살인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러시아인보다 청결하다. 아무리 험악한 땅이라도 그들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농경지가 되며 생산성은 중국인의 2배나 된다. 이것이 고려인들에 대한 러시아 현지인들의 일치한 평판이다. 일찍이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하고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97년)이란 책을 쓴 영국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비숍은 당초 게으름을 조선인의 기질로 여겨 왔었는데, 러시아와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근면하고 잘 사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는 자신의 오판을 후회하면서 조선 사람은 ‘밖에 나가면 더 잘사는 민족’이란 체험적 결론을 내린다.
지금은 ‘엘레나’란 상점이 들어선 이동휘 선생의 고택 자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인들의 애환이 서린 몇 군데를 돌아보고 나서 북방 280㎞의 지점에 있는 노브고르드예프카 발해 고성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미하로브카 군에 있는 ‘우정(友情)마을’에 들렀다. 본래 이 마을은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했다가, 그래도 나서 자란 땅 극동에 되돌아오고 싶어 하는 동포들을 위해 한국주택건설협회가 지어주기로 한 것이다. 계획은 1000가구 분을 지어주기로 했는데 1990년대 말 금융위기가 닥쳐오면서 지원을 포기해 지금은 동북아평화재단과 일부 자원봉사단체에서 돌보고 있다고 한다. 공사가 지지부진해서 이제 겨우 34가구만 입주한 형편이다. 다른 5개 마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건축기자재는 창고에서 불그죽죽하게 녹이 쓸어가고 야외시설들은 폐물로 나뒹굴고 있다. 바람막이도 제대로 안 된 집에 입주한 ‘난민들’은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1년에 고작 3000달러밖에 안 되는 지원금으로 연명한다고 한다. 입주민들의 얼굴에는 수심기만이 가득하다. 인사를 건네도 무덤덤하다. 측은함을 넘어 미안하기만 하다. 고사성어에 귀곡천계(貴鵠賤鷄)라는 말이 있다.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긴다’라는 뜻이나. 삶 속에 녹아난 성어로는 ‘먼 데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말로서 ‘집 떠난 사람을 더 생각하라’는 훈계이다. 우리는 과연 ‘고니’처럼 멀리 집 떠난 그들에게 이 성어가 가르치는 인지상정을 베풀고 있는지. 4000만은 고사하고 40만이 십시일반하면 저 혈육들은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도 남음이 있으련만.
가슴을 짓누르는 반문과 번민 속에 마을을 뒤로 하고 그런 ‘귀곡’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또 하나의 현장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어둠이 살포시 내리깔리는 무렵 발로다르스키야 거리 38번지에 자리한 최재형(崔在亨, 1860~1920년) 선생의 고택을 찾았다. 지금은 러시아인이 살고 있는데, 한국인의 접근을 못마땅해 한다고 하기에 먼 발치에서 카메라에나 담을 수밖에 없다. 구한말 의병조직인 ‘동의회’의 총재, ‘대동공보’와 ‘대양보’의 사장, ‘권업회’ 총재, ‘대한국민의회’ 명예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부임은 못함) 등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격인 선생은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체포되어 총살 당한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다 바친 이 시대 희유의 민족지도자 중 한 분이시다. 대로 가에 휑뎅그렁하게 나앉은 선생의 고택은 어쩐지 소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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