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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의 인기 비결은

[ 미디어오늘 1230호 사설 ]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승인 2019.12.21 10:17


12월21일이면 조용수(1930~1961) ‘민족일보’ 사장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된 지 58년이 된다. ‘민족일보’는 1961년 2월에 창간돼 평화통일과 남북 협상을 지지하고 노동자 권리를 옹호했다. 박정희 군부는 5·16 쿠데타 사흘 뒤 민족일보를 폐간시킨데 이어 조용수 사장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과거사위원회 재심 권고를 받은 법원은 2008년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다. 


해방 이후 현직 언론인으로 사형당한 이는 정국은과 조용수 2명이다. 둘 다 30대 젊은 나이에 간첩혐의로 처형됐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조용수 사장이 조봉암의 비서 이영근의 지령을 받아 평화통일방안을 주창하면서 조총련이 준 자금 1억환을 이영근에게 받아 1961년 2월 민족일보를 창간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뒤집어씌웠다.  


조용수는 1930년 경남 진양군 대곡면 양반 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 연세대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에 피난 가 외삼촌 하만복 국회의원(무소속)의 경호 비서를 했다.  


▲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1951년 9월 선배의 권유로 일본에 유학 가 민단 기관지 민주신문 편집부장과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용수는 10년 일본 생활을 마치고 4·19 혁명 직후 귀국해 자유당 원내총무와 국회 부의장을 지낸 4선 의원인 삼촌 조경규를 찾아가 선거구를 물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이후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조용수는 일본에서 반이승만 운동을 펴던 이영근과 의논해 재일교포를 상대로 신문발행 자금을 모금했다. 민단 제일의 재력가 박용구, 진주중 동문들, 장인 등이 신문발행 자금을 지원했다.  


1961년 2월 민족일보는 창간하자마자 동아 조선 등 보수 일색인 언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렀다. 금세 발행부수가 4만5000부로 증가했다. 가판은 월등했다. 민주당 구파인 장면 내각은 민족일보 자금이 조총련 자금이라는 의혹을 갖고 출처를 은밀히 내사했다. 


조용수 등 혁신계 인사들이 신문편집에 너무 관여한다며 오소백 부국장과 일부 기자들은 사임했다. 국내 실정을 잘 모르는 조용수는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조용수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틀 뒤 군부에 연행했다.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 등 민족일보 임원들은 8월12일 1심에서 반국가단체 고무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무기로 감형 됐지만 조용수는 그해 12월21일 처형됐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조용수의 죽음은 박 장군이 본인의 사상적 문제를 입증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도 민족일보에 제공된 돈이 전혀 문제없는 것임을 알았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도 ‘신문연구’ 1990년 여름호에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이란 글에서 5·16 군사정권의 정통성 획득을 위한 노력의 희생물이 민족일보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박정희는 자신의 사상을 의심하는 미국에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교류를 주장했던 사람들까지 대량 검거해 반공 정권임을 분명히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1961년 2월13일에 창간됐던 민족일보. 국회도서관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형수).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령 3개월만에 단명한 민족일보가 그토록 짧은 기간 4만부가 넘는 부수에, 가판을 휩쓸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민족의 미래와 노동자 같은 소외된 세력에게 파격적인 지면을 할애해서다. 조용수 사장은 1961년 2월13일자 민족일보 창간호 1면에 ‘우리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합니다’라는 제목의 창간사를 썼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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