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77082
울산에 있는 고래고기집, 흑산도에 없는 이유
[고래의 섬, 흑산도 ⑨] 박인순씨의 증언으로 재구성한 포경근거지
17.11.19 14:21 l 최종 업데이트 18.01.03 10:22 l 이주빈(clubnip)
사람들은 '고래' 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 기자 말
▲ 현재 조성돼 있는 고래공원 뒤편이 일제 강점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있던 곳이다. 흑산도 고래공원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안내글 하나 없다. ⓒ 이주빈
아버지가 일본 포경회사 직원이었던 박인순씨의 증언
조선총독부 직원록과 공문, 당시 발행된 사진집과 신문 기사 등은 일제 강점기 흑산도에 고래를 잡는 포경근거지가 설치됐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흑산도에 포경근거지가 설치됐던 장소는 어디일까.
<전남사진지>는 '대흑산도 예촌 포경근거지'라고 기록했다. 지금의 흑산도 예리다. 흑산도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지목하는 장소가 있다. 주민들이 '고래 작업장 터' 혹은 '고래 해체장 터'라고 부르는 자리는 지금의 '고래공원' 일대로, 전남 신안군 흑산면 예리 1길 주변이다. 하지만 고래공원 어디에도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역사와 공간 구성 형태를 알려주는 자료가 없다.
이 헛헛함을 메꿔주는 증언자가 있다. 박인순씨다. 박씨는 1935년 흑산도 예리에서 태어나 군대 생활 기간을 빼고는 생의 전부를 흑산도에서 살며 지냈다. 1969년 흑산도 수협에 입사한 박씨는 1993년 58세 나이에 정년퇴직한 뒤, 8년 동안 흑산도 수협 이사를 역임하면서 수협 조합장 직무대행을 잠시 맡기도 했다.
박씨의 증언이 신빙성이 높고 특별한 까닭이 있다. 아버지는 고 박복철씨로, 일본 포경회사의 직원이었다. 아버지의 일터가 바로 흑산도 포경근거지 즉 일본 포경회사의 흑산도 사업장이었다.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는 박인순씨는, 일본 포경회사에 다니는 아버지 덕분에 포경근거지에 놀이터처럼 놀러 다녔다. 그는 지금도 포경근거지 각 공간들을 매우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박씨가 흑산도 고래공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리에서 옛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공간 구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위치 및 공간 구성을 구술 증언하고 있는 박인순씨. 아버지가 일본 포경회사 직원이었다. ⓒ 이주빈
▲ 구술 증언자 박인순씨의 증언대로 그려본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의 공간 구성. ⓒ 이주빈
고래 끌어롤리던 기계 설치 자리 그대로, 고래 삶던 자리도 그대로
"현재 고래공원이 있는 자리는 원래 바다였는데 매립한 것이고 원래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는 고래공원에서 안으로 약 10미터 들어간 곳에 있었어. 바다와 뭍이 접한 곳에는 고래를 끌어올리는 길이 있었는데 그 경사는 약 15도에서 35도였으며 고래를 끌어올리는 길 바로 위에는 고래 해체장이 있었지. 바로 이 자리에서 작업부들이 포획되어온 고래를 해체했어.
고래 해체장 바로 옆엔 고래를 삶는 대형 가마솥이 2개가 설치돼 있었어. 그리고 대형 가마솥 옆엔 고래수염을 튀기는 곳이 있었고. 고래 해체장 바로 위로 '싱구리(シングル single) 히보이' '다구리(たぐり 줄을 번갈아 끌어당기는 일) 히보이'라 불리던 고래 끌어올리는 기계가 설치돼 있었지. 기계 왼쪽 옆으로 증기동력으로 돌아가는 보일러실이 있었고, 보일러실 뒤로 창고가 있고, 그 창고 뒤로 포경회사 직원용 목욕탕이 있었는데 나도 아버지 따라서 그 목욕탕엘 다녔지. 고래 해체 작업은 워낙 힘들고 또 고래 해체하면서 나는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수시로 목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어."
박인순씨가 놀러 다녔다는 포경회사 사무실은 고래 작업 기계 뒤편, 그러니까 창고와 목욕탕 사이 오른쪽 옆에 있었다고 한다. "사무실은 군대 막사 모형으로 가운데 통로를 따라 좌우 양 옆으로 사무를 보는 책상이 배열돼 있었다"라고 박씨는 기억했다. 특히 그는 "사무실 오른쪽 뒤 예리 앞산 가는 길에 '혼다약국'이 있었는데 포경회사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겐 마치 보건소 같은 역할을 했다"라고 했다.
박인순씨가 증언하는 장소 일대는 현재 사유지로, 특히 고래를 삶던 대형 가마솥이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목조 건물은 창고로 이용되고 있다. 창고엔 폐그물과 어망 등, 많은 어구들이 꽉 차 있고 출입문은 잠겨 있어 내부 상태와 상황, 고래 삶던 대형 가마솥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고래를 끌어올리던 기계가 있던 자리엔 볼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콘크리트 바닥에 기계를 단단히 죄기 위해 박아두었던 것이다. 기계가 컹컹거리며 지반을 흔들면 흔들 수 록 흑산바다에서 잡혀 온 고래의 신음소리도 거칠어졌을 것이다.
▲ 고래를 끌어올리던 기계가 설치됐던 자리에 볼트와 쇠고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이주빈
▲ 고래를 삶던 대형 가마솥 두 개가 보존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건물. ⓒ 이주빈
임금 대신 받은 고래고기 내다팔아 생계 유지한 흑산도 주민들
박씨는 "고래작업은 석탄으로 증기 보일러를 돌려서 수증기로 기계를 작동했고, 지금 예리 가산토건 자리가 일본 포경회사가 석탄을 실어다 싸두던 자리"라면서 "고래 해체 작업은 '싱구리 히보이' '다구리 히보이'가 고래를 바다에서 끌어올리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라고 했다.
박씨는 "포경회사 사업장에는 부서별로 사람들이 배치돼 있었는데 뼈 가공팀, 고래 수염(잇염) 가공팀, 껍질 가공팀, 고래기름 가공팀 등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고래 해체처럼 힘든 칼질과 막노동은 조선인 직원이 하고, 일본인 직원들은 주로 관리사무팀에 배치돼 작업을 총괄했다고 한다. 잡아 온 고래를 해체하고 가공작업이 끝나면 원판선에 실어 일본으로 보냈다고.
이 같은 증언은 1917년 간행된 <전남사진지>가 기록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전남사진지>는 "(포경선이 포획한 고래를)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서 직접 해체하여 적육, 지방육, 경근, 경수, 경유, 골분, 혈분 따위로 처리하여 운송선에 실어 식용품은 시모노세키(下關)로, 비료는 효고(兵庫)로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술증언자 박인순씨에 따르면, 고래 해체 작업이라는 힘겨운 노동을 한 조선인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현금 대신 '고래고기'라는 현물로 지급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엔 흑산도에 고래 요리집은 따로 없었어. 그러면 일제시대 땐 어떻게 해서 고래 고기가 유통됐냐? 일본 포경회사가 월급 대신 고래 고기로 줄 때가 있었거든. 그때가 바로 춘궁기야. 월급 대신 받은 고래 고기가 엄청 나. 그것을 흑산 사람들에게도 팔고 비금도·도초도, 목포에까지 가서 내다 팔았어. 그래서 예리 사람들은 춘궁기에 고래 고기를 먹고 살았다고 할 정도였지."
즉 임금대신 받은 고래 고기를 대흑산도 주민 혹은 비금도나 도초도, 목포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고래 고기를 내다 판 곳이 비금도와 도초도인 것은 두 섬은 벼농사를 짓기 때문에 고래고기와 쌀을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즉 일제 강점기 일본의 포경회사 흑산도 사업장이 있던 자리. 전남 신안군 흑산면 예리 1길 일대다. ⓒ 이주빈
흑산도 역시 울산이나 장생포처럼 일제에 의해 포경작업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진 곳이다. 하지만 대흑산도에는 울산이나 장생포만큼 고래와 관련한 음식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목포엔 아직도 고래고기를 파는 식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서 월급 대신 지급된 고래고기가 비금도와 도초도는 물론 목포에까지 유통되어 하나의 식문화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목포에 고래고기를 유통시킬 수 있는 곳은 지리상으로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제일 근접했기 때문이다.
박인순씨의 구술 증언처럼 흑산도에서 고래고기는 흔하게 즐길 수 있는 여가의 산물 즉 식문화로 자리잡지 못했다. 월급 대신 받은 현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신안 군도의 배후 도시로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린 목포의 유산자들은, 고래고기라는 매우 특별한 음식을 즐기는 식도락을 누렸다.
일본 포경회사를 다니던 조선인 직원들에게 고래고기는 월급 대신 받아온 노동의 대가였다. 춘궁기에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흑산도 주민들에게 고래고기는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목포를 비롯한 인근 지역 유산자들에겐 고래고기는 특별한 호사거리가 되었다.
바다에서 학살당해 뭍으로 끌려와 산산이 해체 당한 뒤 나카사키로, 효고로 실려 갔던 흑산바다 고래들. 죽어 누군가의 밥이 되고, 누군가의 돈이 되어주던 흑산바다 고래들. 원혼 깊은 흑산바다에 고래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 다음 기사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특별한 까닭'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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