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2KKR_A9999_1_0006274&isEQ=true&kristalSearchArea=P, http://db.history.go.kr/url.jsp?ID=tc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B%8C%80%EC%99%95
신대왕(新大王)
고구려 제8대왕. 태조왕의 동생, 또는 태조왕의 아들 혹은 차대왕의 아들이라는 이설도 있다.
생몰 : 미상∼179년(신대왕 15).
재위 : 165∼179년.
이름 : 백고(伯固) 또는 백구(伯句).
가계
형 혹은 아버지 : 태조대왕
형 혹은 아버지 : 차대왕
왕후 : ?
장남 : 고발기(高拔奇) - 신대왕의 맏아들로 어리석다고 하여 태자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차남 : 고남무(高男武) - 고국천왕
3남 : 고발기(高發岐) - 신대왕의 셋째 아들로 왕위 계승 분쟁을 일으켰다가 자살하였다.
4남 : 고연우(高延優) - 산상왕
5남 : 고계수(高罽須) - 신대왕의 막내아들로, 형인 고국천왕과 산상왕 시대에 장수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마치 태조왕과 차대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위한 이듬해인 166년(신대왕 2) 대사령을 내리고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을 양국군(讓國君)에 봉하면서 토지를 하사하기도 하는 등 반대세력의 무마에 힘쓰는 한편, 당시까지 고구려의 최고위직이었던 좌보와 우보(右輔)를 단일화하여 국상(國相)이라는 관직을 설치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으로써 귀족세력들의 조정, 통제를 도모하는 등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재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176년 왕자 남무(男武)를 태자로 책봉함으로써, 왕위의 부자상속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후한(後漢)과의 충돌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169년과 172년에 후한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의 침공 등을 받기도 하였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요동군을 공격하여 후한의 압박을 분쇄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방으로의 진출을 계속 추진하였다.
또, 169년에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당시 요동·요서지역에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던 공손탁(公孫度)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손탁의 독립세력으로서의 등장이 190년 이후이므로 아마도 이것은 후대의 사실이 신대왕때의 사건으로 잘못 전하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
179년 91세로 죽자 고국곡(故國谷)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B%8C%80%EC%99%95
신대왕(新大王)
고구려 제8대왕. 태조왕의 동생, 또는 태조왕의 아들 혹은 차대왕의 아들이라는 이설도 있다.
생몰 : 미상∼179년(신대왕 15).
재위 : 165∼179년.
이름 : 백고(伯固) 또는 백구(伯句).
가계
형 혹은 아버지 : 태조대왕
형 혹은 아버지 : 차대왕
왕후 : ?
장남 : 고발기(高拔奇) - 신대왕의 맏아들로 어리석다고 하여 태자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차남 : 고남무(高男武) - 고국천왕
3남 : 고발기(高發岐) - 신대왕의 셋째 아들로 왕위 계승 분쟁을 일으켰다가 자살하였다.
4남 : 고연우(高延優) - 산상왕
5남 : 고계수(高罽須) - 신대왕의 막내아들로, 형인 고국천왕과 산상왕 시대에 장수로서 활약했다.
165년 음10월 [차대왕 20년 10월 : 신대왕 1년]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
166년 음1월 [신대왕 2년 1월] 태자 추안(鄒安)에게 구산뢰(狗山瀨)·누두곡(婁豆谷)
167년 음9월 [신대왕 3년 9월]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냄.
167년 음10월 [신대왕 3년 10월] 졸본(卒本)에서 돌아옴.
168년 [신대왕 4년] 한(漢) 현도군(玄菟郡)태수 경림(耿臨)이 침입
169년 [신대왕 5년] 대가(大加) 우거(憂居)와 주부(主簿) 연인
172년 음11월 [신대왕 8년 11월]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지휘하는 고구려군, 후한의 침략군
176년 음3월 [신대왕 12년 3월] 왕자 남무(男武)를 태자로 삼음.
178년 음10월 [신대왕 14년 10월] 그믐, 일식.
179년 음9월 [신대왕 15년 9월]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 죽음.
179년 음12월 [신대왕 15년 12월 : 고국천왕 1년] 신대왕 죽음, 고국천왕 즉위함.
성품이 영특하고 인자하였다고 한다. 형인 차대왕이 신민(臣民)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장차 변란이 발생하여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하여 산곡에 은둔하여 있다가, 차대왕이 명림답부(明臨答夫)에 의하여 살해된 뒤 좌보(左輔) 어지류(菸支留) 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마치 태조왕과 차대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위한 이듬해인 166년(신대왕 2) 대사령을 내리고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을 양국군(讓國君)에 봉하면서 토지를 하사하기도 하는 등 반대세력의 무마에 힘쓰는 한편, 당시까지 고구려의 최고위직이었던 좌보와 우보(右輔)를 단일화하여 국상(國相)이라는 관직을 설치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으로써 귀족세력들의 조정, 통제를 도모하는 등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재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176년 왕자 남무(男武)를 태자로 책봉함으로써, 왕위의 부자상속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후한(後漢)과의 충돌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169년과 172년에 후한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의 침공 등을 받기도 하였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요동군을 공격하여 후한의 압박을 분쇄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방으로의 진출을 계속 추진하였다.
또, 169년에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당시 요동·요서지역에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던 공손탁(公孫度)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손탁의 독립세력으로서의 등장이 190년 이후이므로 아마도 이것은 후대의 사실이 신대왕때의 사건으로 잘못 전하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
179년 91세로 죽자 고국곡(故國谷)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後漢書
三國志
高句麗國相考(盧重國, 韓國學報 16·17,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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