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606188
김재규의 '이상행동'... '남산의 부장들'엔 없는 이 이야기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남산의 부장들>
김종성(qqqkim2000) 20.01.25 12:02 최종업데이트 20.01.25 12:02
▲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 컷 ⓒ 쇼박스
한국 현대사에서 '최악의 독재자'는 박정희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포함해도 '최악의 독재자' 후보에 들어갈지 모른다. 그런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킨 인물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다. 한국 민중의 민주화투쟁이 결정적 원동력이긴 했지만,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에 최후의 일격을 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김재규에 대한 평가에서는 그런 요소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 그가 일으킨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체제가 붕괴한 사실은 부정되지 않지만, 그가 민주화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점들보다는, 그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린 데 대한 불만이나 불안감 때문에 일을 벌였다는 점,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비롯한 미국 측의 부추김을 받아 일을 벌였다는 점들이 훨씬 더 비중 있게 고려되고 있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박 정권이 파탄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결과일 뿐 그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라고 보는 게 일반적 시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독재체제를 무너트리기 위해서였다는 김재규의 항변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귀를 닫고 있는 편이다. 김재규의 동기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이 김재규를 바라보는 시선
지난 22일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김재규를 바라보는 시선은 앞서 언급한 통념과 완벽하게 부합하진 않지만, 그런 부분들을 전혀 배제하진 않았다. 영화는 초반부 자막을 통해, 이 작품이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남산의 부장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이 작품은 일정 부분 기존 관점에 입각해, 배우 이병헌의 모습을 통해 10·26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10·26 사태 40일 전부터의 상황에다가 상상력을 가미한 이 영화는, 법정에서 10·26을 민주화 혁명으로 자평하는 김재규의 실제 육성 진술도 들려준다. 하지만, 관객들이 김재규의 육성을 듣고 그를 민주화 투사나 혁명가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김재규의 행동이나 심리에 대한 묘사를 통해 그에 대한 통념을 일부분 재확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김재규(영화에선 김규평)가 박정희(영화에선 박통, 이성민 분)의 신임을 받으려고 애쓰는 모습, 김재규가 차지철(영화에선 곽상천, 이희준 분)과의 충성 경쟁에 노심초사하는 모습, 중앙정보부장이었다가 박정희의 적이 된 김형욱(영화에선 박용각, 곽도원 분)이 회고록을 출간하지 못하도록 김재규가 적극 제지하는 모습, 김형욱이 프랑스에서 실종되고 피살되는 과정에 김재규가 개입하는 모습, 김재규가 주한미국대사관저에 드나들며 박정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싸늘한 인식을 확인하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또 이 영화는 박정희(육사 2기)가 김재규(2기)를 지칭하면서 "지 후배도 죽인 놈!"이라며 경멸감을 표시하는 장면을 두 번 정도 보여준다. 영화 속의 김형욱(8기) 피살에 대한 김재규의 개입 가능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영화에서 두 사람은 친구로 그려진다).
이런 장면은 관객들이 김재규의 동기를 더욱 더 의심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위해 후배도 죽이는 사람이 민주화를 위해 10·26을 일으켰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는 생각을 품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산의 부장들>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김재규에 대한 기존 통념을 다시 한번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행위를 민주화 혁명으로 자평하는 김재규의 육성이 나오기는 하지만, 관객들한테는 그것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재규
▲ 영화 '남산의 부장들' ⓒ 쇼박스
이병헌·이성민·곽도원·이희준 등의 실감 나는 연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1979년 가을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이 살짝 들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실감 나는 영화이지만, 주인공 김재규에 관해 좀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 영화다.
물론 김재규는 의리가 있는 인물은 아니다. 김재규를 겪어본 사람들은 그가 겸손하고 인간미가 있었다는 평가를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모신 윗사람을 자기 손으로 직접 죽였으니, '의리가 없다'는 평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웬만한 사람들은 하기 힘든 일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또 김재규는 '최악의 독재자'를 중심으로 했던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다. 박 정권이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주로 활용한 기구는 군대보다는 중앙정보부였다. 그는 이 중앙정보부의 부장을 3년간이나 역임했다. 그것도 박정희가 제왕적 대통령이 되고 그의 폭압 통치가 최정점에 달했을 때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체제를 보호했다.
김재규는 1979년 12월 18일 1심 군법재판 최후진술에서 "10·26 혁명은 5·16 혁명이나 10월 유신에 비하면 정정당당한 것입니다"라면서 "10·26 혁명은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유신체제를 정면에서 도전하여 타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그 역시 박 정권의 죄악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정면에서 도전하여 타파'한 유신체제에는 김재규 자신도 포함됐다. 그래서 박정희를 쏜 행위는 어느 정도는 김재규 자신을 쏜 행위와 다름없다. 그는 어떤 경우든 유신체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몸이다.
그 같은 원죄가 있다는 점과 함께 그를 평가할 때 반드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게 있다. 그가 순전히 시기심이나 사리사욕만으로 10·26을 벌인 게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박정희 말기의 민주화투쟁이 그의 심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징후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묘사됐듯이, 김재규는 박정희 면전에서도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반대했다. 이러다가는 정권이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그가 박정희의 폭압 통치를 반대하고 민주화운동에 심정적 지지를 보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앙정보부장 직에 있는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에 관해, 2001년에 <정치정보연구> 제4권 제1호에 실린 오창헌 논문 '10·26 사건의 원인 분석: 김재규의 행위와 동기를 중심으로'는 박 정권 말기의 민주화투쟁이 김재규의 심경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1979년 가을의 부마항쟁과 관련하여 논문은 이렇게 기술한다.
"부마항쟁은 김재규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김재규는 부산에 내려가서 사태를 파악한 결과, 그것이 일반 국민들의 폭넓은 반정부 감정이 폭발한 자발적인 민중봉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유신정권의 강압적 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아주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그 불만의 정당성을 확실하게 인정했다."
김재규에 대한 김진우 변호사의 변론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와 2019년 검찰개혁 촛불집회를 TV 뉴스 화면으로 보는 것과 직접 현장에 가서 눈으로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몸소 느끼게 되면, 이것이 쉽게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시대적 대세라는 판단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체험해본 김재규도 그런 느낌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부마항쟁을 계기로 김재규의 심리 상태는 확 달라졌다. 이에 관한 증언들이 있다. 위 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부마사태가 발생한 이후 김재규는 말수가 줄어드는 등 그의 태도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또한 김재규는 자신의 손아랫 동서가 부산사태를 가리켜 '반란'이라는 표현을 쓰자, 그러한 부정적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꾸짖고 '민중봉기'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또한 (부하인) 박선호에게 '흐르는 물을 막을 수는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김재규가 단순한 중앙정보부장이 아니라 '민중봉기에 감화된 중앙정보부장'이었다는 점은, 10·26 직후 불이익을 무릅쓰고 김재규 변호인단을 꾸린 김진우 변호사(1932년 생, 훗날의 헌법재판관)의 증언에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 컷 ⓒ 쇼박스
김진우는 김재규와 함께 김녕 김씨 종친회에서 함께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의 진정성에 대한 김진우의 증언에 높은 신뢰도를 부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참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행한 <기억과 전망> 제12권에 실린 주진우 시사저널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서: 김진우가 본 인간 김재규'에 따르면, 김진우는 부마항쟁 당시의 김재규에 관해 이렇게 증언했다. '김 장군'은 김재규를 지칭한다.
"10·26 당시 부산지방법원장을 하던 분을 나중에 만난 적이 있다. 김 장군이 10·26 직전에 부마사태를 직접 보기 위해 부산에 내려와서 기관장 회의를 소집했는데, 그 석상에서 김 장군이 강조한 첫 번째 사항이 국군이 국민에게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국민이 국군에게 대항해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회의의 끝자락에서 김 장군이 '이런 상황에서는 제3의 길 밖에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0·26이 터지고 나서야 제3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부산지방법원장이 말했다."
김재규는 부마항쟁 대처 방안을 놓고 박정희와 대립했다. 그렇다면 부마항쟁 당시와 그 직후에 김재규가 보인 언행들에 대한 위 논문이나 증언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김재규가 부마항쟁에서 민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발견했으며, 이것이 그를 10·26 밤의 거사로 이끌어간 여러 동기 중 하나가 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쉬움을 살짝 남기는 <남산의 부장들>
이처럼 그가 10·26을 벌인 동기 중에는 민중의 능력에 대한 신뢰도 어느 정도 담겨 있었으리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 같은 측면과 더불어 반드시 고려돼야 할 것은, 동기 여하를 떠나 그가 '최악의 독재자' 박정희를 무너트리는 데 실제로 기여했다는 점, 10·26으로 인해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 국면이 도래했다는 점이다. 그를 마냥 '나쁜 놈들의 일원'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이유다. 동기 여하를 떠나, 좋은 결과를 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한국 사회에 현존하는 김재규와 10·26에 대한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면에서, 역사왜곡 논쟁을 일으킬 일이 별로 없는 무난한 현대 사극이다. 하지만 김재규의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통념에 기초한 해석만 제공했을 뿐, 반드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타 측면들은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부마항쟁 당시와 그 직후에 그가 보인 '이상행동'에 대한 해석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살짝 남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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