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350


가야사를 한번 거들떠 보자 2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승인 2014.12.1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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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삼국유사의 가야사 연구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편찬태도와 서술적 결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은 권두의 왕력에 가락국의 왕대기를 삼국과 나란히 등재하여 사국시대와 같은 역사인식을 보였다.


아울러 고려 문종 30년(1076)에 금관지주사가 편찬한 『가락국기』를 축약, 채록하여 본기에 해당하는 ‘기이(奇異)’의 독립 항목으로 설정하였고, 5가야에 관한 기술을 남겨 삼국사기의 서술적 결여를 보완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술 그대로를 가야사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락국기』에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가락국 지배집단이 통치의 합목적적 의도에서 만든 설화나 전승과 같은 건국신화의 부분도 적지 않다.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의 도래 전승이나, 금관성파사석탑, 어산불영에 관한 기술 등에 보이는 불교적 윤색도 가야사의 복원에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요소이다.


9.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가야사 기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역사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경남 일원의 건치연혁이나 고적 등의 항목에 가야 관련사료를 채록하였다. 이 가야 관련 사료는 가야사 복원에 중요한 지명 고증에서 고대와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고령현 건치연혁조의 가야산에 붙여 전하는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가락국기의 건국 신화와 대조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가락국기의 건국신화가 김해 중심의 전기가야를 보여준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건국신화는 후기가야의 중심국인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합천군야로면의 월광사와 월광태자에 관련된 전승 채록은 가야불교의 존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가야인들 자신이 남긴 역사는 몇 자의 토기 명문을 제외하면 전혀 없다. 더욱이 남아 있는 사료라고 하더라도 타자적 입장에서 기록되었던 것이 대부분이고, 후대의 이데올로기나 역사관에 의해 윤색되었던 부분도 많이 있었다.


사서 편찬에서도 가야사의 서술은 미미할 수 밖에 없었고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자 기록에 의거할 수 밖에 없는 가야사 연구는 출발부터 많은 제약을 포함할 수 밖에 없었으며 본격적인 가야사의 연구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Ⅱ. 조선 후기의 가야사 연구


개인적인 가야사 연구는 조선 후기 17~18세기의 실학자들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조선의 강역과 문화 그리고 지명의 기원과 같은 인문지리적 관심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


1. 동국지리지 - 한백겸


삼국의 기원에 대한 관심에서 삼한에 대한 고증을 시작하였다. 변한을 백제의 기원으로 보거나, 변한을 고구려의 전신으로 보는 것을 비판하고 삼한은 한강 이남이며, 변한은 가야의 전신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변한을 전기 가야 또는 가야의 전신으로 보는 현재의 통설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2. 동사강목 - 안정복


이익의 마한 정통론을 계승하면서도 정통에서 제외된 여러 나라의 독립성을 인정하였다. 부여나 발해와 마찬가지로 가락과 대가야에 대한 고증을 전개하였다. 가락국과 대가야의 왕계를 적어놓고 가야의 세력 범위를 지도에 그려 넣었다.


지도에서 고령가야와 대가야를 구분하는 혼동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삼국유사와는 다르게 전라도의 동남지역까지 가야문화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근거의 제시는 없었지만 근래 전북 임실, 남원, 장수, 진안, 금산 등에서 확인되고 있는 가야 문화의 고고학 자료와 일치하고 있다.


 3. 강역고 - 정약용


가야에 관해서 가장 많은 서술을 담고 있는 강역고에서는 가야사 관련 논고로 삼한총고, 변진고, 변한별고 등을 꼽는다. 가야 관련의 어원 및 지명 고증에는 지금도 참고할 만한 점이 적지 않다. 근년까지 부산의 동래로 비정하고 있던 독로국의 위치를 거제도로 비정하였다.


거제도의 옛 이름 상군이 두루기로 발음되는 것에서 독로가 두루와 음통인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동래의 지명이 신라 경덕왕 때(757) 비롯되었던 점, 삼국사기가 당시의 동래 지역을 거칠산국으로 전하는 점, 근년 거제도에서 관련 유적이 확인되기 시작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고증은 다시 빛을 찾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진과 가야의 어원에 대해서 변(弁)은 갓(冠)이므로 가야는 갓의 방언에서 비롯되었다고 고증하였다.


1994년 김해 구지로 고분군의 1세기대 토광목관묘에서 삼각형 고깔모양의ㅏ 철제관을 앞 이마에 두른 인골이 조사됨으로써 그 관련성이 새롭게 언급되었다.


그러나 실학자들에 의한 연구는 조선시대의 김해, 거제, 함안, 고성 등에 대한 지명의 어원이나 역사적 유래를 검토하는 과정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연구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강역에 대한 기원적 고증과 복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가야 관련의 지명 고증이었다는 데에 한계가 있다.


더구나 조선 후기의 정통론적 역사 서술에서는 정통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었던 가야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폭을 축소시킬 수 밖에 없었던 한계를 노출하기도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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