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08069


국가란 무엇인가, 중국 우한 교민 수송을 보며

20.01.31 16:51 l 최종 업데이트 20.01.31 16:51 l 임병식(montlim)


어제(1월 30일)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날이다. 384년 전 이날 조선 백성은 가장 춥고 치욕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무능한 왕, 무기력한 관리들 때문이다.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8일 만에 한양을 접수했다. 인조는 백성들을 뒤로한 채 도망 길에 올랐다. 47일 만에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 앞에 무릎 꿇었다.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절하고는 신하가 됐다.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해 50만 명은 심양으로 끌려갔다. 당시 조선 인구를 600~700만 명으로 어림잡으면 10%에 가깝다. '피로인(被擄人)'으로 불린 민간인 전쟁 포로였다.


자국민 10%가 볼모가 된 상황은 국가 시스템 부재가 빚은 참사였다. 더 큰 치욕은 피로인을 데려오고, 돌아온 아녀자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조선 정부는 왕족과 군인 중심으로 송환에 나섰다. 일반 백성은 알아서 가족을 데려와야 했다. 이 과정에서 몸값인 속환금(贖還金)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사대부들이 경쟁적으로 웃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은 속절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다. 무능한 국가는 백성을 지키지 못했고, 또 신분마저 차별한 것이다. 사대부 아녀자들 또한 돌아온 뒤 말 못할 고통에 처했다.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은 이런 분위기를 한층 부추겼다. 수절하지 않은 재혼한 여자가 낳은 자식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대가는 멸시였다. 사대부들에게 능욕 당한 여자는 집안 남자들 앞길을 가로막는 화근이었다. 혈육보다 사대부로서 명분과 이익이 더 중요했던 셈이다. 자신들이 무능해 힘없는 백성과 아녀자가 겪은 고통을 헤아리는 대신 밖으로 허물을 돌렸으니 참으로 못났다. 전형적인 국가폭력이자 희생양 찾기다. 

 

 중국 우한시에서 전세기로 귀국한 교민을 태운 버스가 31일 오후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으로 들어오고 있다.

▲  중국 우한시에서 전세기로 귀국한 교민을 태운 버스가 31일 오후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으로 들어오고 있다. ⓒ 이희훈


중국 우한 교민들이 오늘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은 아산과 진천 격리시설에 수용됐다. 우한 교민 입국을 놓고 한국사회는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정부 설득에도 불구하고 일부 주민들은 반대를 외쳤다. 물리적 충돌도 우려됐다. 다행히 반대 현수막을 철거하고 수용 뜻을 밝혔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피로인을 떠올린 것은 이 때문이다. 병자호란 당시나 지금이나 국민들은 죄가 없다. 전쟁도, 폐렴도 그들이 자초한 게 아니다. 무기력한 조선은 청나라 군대를 불렀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또한 교민들 의지와는 무관하다.


380여 년 전, 조선은 수십 만 백성을 인질로 보낼 만큼 허약했다. 반면 오늘 대한민국은 전세기를 띄워 자국민을 데려올 정도가 됐다. 반대 목소리 한편에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추태, 부끄럽다, 정부를 믿고 따르자"라는 글이 달렸다. SNS에는 '우리가 아산이다(#we_are_asan)'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다. "우한 교민도, 아산 시민도 대한민국이다. 잘 계시다 무탈하게 돌아가시라. 아산 분들은 너른 품을 내어달라." 자신을 아산 시민이라고 밝힌 이 글은 아마 보편적인 시민 정서일 것이다.


어젯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거주하는 교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교민 철수 관련 공지를 접했다는 그는 울분을 토로했다. "정부가 교민들을 짐짝 취급한다. 위급한 상황인데 무슨 돈을 받느냐. 그럼 돈 없는 사람은 그냥 죽으라는 말인가." 외교부는 성인 30만 원, 소아 22만 5000원, 유아 3만 원을 입금하라고 공지했다. 그는 "위기에 처한 교민을 상대로 돈을 받는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국내 재난 발생 시 정부 책임 아래 구호 조치가 취해진다. 그러니 무리한 주장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는 카자흐스탄 교민사회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신들이 위기를 맞아도 그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미국 정부가 전세기 비용을 어떻게 부담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인당 비용 80만 원에다 입원비까지 부담했다는 보도가 있다. 물론 우리 정부가 돈 때문에 그러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개별적으로 귀국한 교민들과 형평성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나아가 전세기를 띄울 정도로 국력도 갖췄다. 그렇다하더라도 교민들 정서를 세심하게 헤아리지 못한 건 분명하다.


해외에 나갈 때마다 교민들로부터 자주 접하는 불만 가운데 하나가 외교부다. 고압적이며 교민들을 무시한다는 불신이 깊게 깔려 있다.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외교관은 교민 보호라는 역할을 위임 받은 공무원이다. 해외공관은 작은 대한민국 정부다. 그렇다면 외교부와 해외공관이 해야 할 직무도 명확하다. 정부를 대신해 교민들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나아가 위기상황에서는 교민 안전을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 재외동포법을 만들고 교포에게 동등한 선거권을 부여한 이유다.


우리 역사상 피로인은 크게 두 차례 있었다. 앞서 언급한 병자호란 후 50만 명, 임진왜란 후 10만 명이다. 이후로도 많은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고국을 떠났다. 조선왕조가 망한 뒤에는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망명길에 올랐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이주는 대표적이다. 고려인들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6700km 떨어진 중앙아시아까지 2차 추방을 당했다. 또 더러는 먹고살기 위해 멀리 멕시코 유카탄 반도까지 흘러갔다. 그들이 겪었을 신산한 삶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좀 더 세심한 교민 정책이 아쉽다.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 최명길의 말이다.


"속환은 시급한 일입니다. 모두가 속환을 원하는데 다급하여 한 사람 값이 몇 백금으로 올랐습니다. 이 경우 가난한 백성은 끝내 속환할 길이 없게 됩니다. 왕이란 귀천 빈부를 마땅히 동일시하여야 합니다. (돈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끝내 이역에서 죽게 한다면, 이는 심히 경중을 잃은 것입니다."


380년 전 주화론을 외친 최명길의 상소는 지금도 여전히 주효하다. 공교롭게도 어제오늘 삼전도 항복과 우한 교민 수송이 맞물렸다. 새삼 국가란 무엇인가를 돌아본다.


임병식 전북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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