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10_0030_0020_0010


1) 멸망의 배경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Ⅱ. 발해의 변천 > 2. 발해의 쇠퇴와 멸망


발해의 마지막 왕인 大諲譔(대인선)이 통치하던 시기(906?∼926)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後三國(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신라·태봉·후백제가 세력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나라도 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중앙은 이미 지방세력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되어 갔고 지방에서는 藩鎭勢力(번진세력)들이 발호하여 각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河南(하남)지역의 宣武節度使 朱全忠(선무절도사 주전충)(朱溫/주온 ; 852∼912), 山西(산시)지구의 河東節度使 李克用(하남절도사 이극용)(856∼908)이 이들을 대표하는 세력이었다. 907년 주전충이 당 哀帝(애제)를 폐위시키고 後梁(후량)(907∼923)을 세워 국도를 開封(개봉)에 둠에 따라 당나라가 멸망하고 5代 10國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극용의 아들 李存勖(이존욱)(885∼926)이 후량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나서 魏州(위주)에서 923년에 後唐(후당)(923∼936)을 세웠다.


이렇게 10세기 초반은 한반도와 중원지방이 여러 세력의 할거와 이들의 세력 경쟁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契丹(거란)이 발흥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여 주었다. 현재의 西拉木倫河(서랍목륜하/시라무룬허)(潢河/황하)와 老哈河(노합하/라오하허)(土河/토하) 일대에 거주하던 거란 부족들이 10세기초에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872∼926)의 영도 아래 장족의 발전을 하면서 동아시아의 강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발해의 존망은 서쪽에서부터 진출해오던 거란 세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방비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발해 말기에 거란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0세기초부터이다. 제일 먼저 보이는 사료는 거란의 왕실 인물인 耶律轄底(야율할저)가 발해로 도망한 사건이다.132) 그는 함께 국정을 담당하던 耶律釋魯(야율석로)가 죽임을 당하자 자신도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두 아들을 이끌고 발해로 도망하였고, 얼마 뒤에 다시 발해의 말을 훔쳐 거란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는 야율아보기가 집권하기 이전인 901년에서 906년 사이가 된다. 이 사건은 양국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야율할저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발해로 도망한 것으로 보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906년에 可汗 痕德菫(카간 흔덕근)이 사망하자 이듬해 정월에 야율아보기가 그의 지위를 계승하였고, 마침내 거란부락을 통일하여 916년에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이를 전후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한편으로는 주변 세력들에 대한 대규모 정복활동을 단행하였다. 북방민족이 흥기하면 으레 그러하듯이 거란도 궁극적으로 중원지방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는 901년에 중원을 공략한 데 이어서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인 916년 8월에서 11월 사이, 그리고 921년 10월과 11월에 중원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많은 漢人(한인)들을 사로잡아 거란 영토로 옮겼다.


그러나 중원은 쉽게 점령될 곳이 아니었다. 총력을 다하여 중원을 공격하여야만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배후세력을 제거하여야만 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이 발해였다.133) 따라서 발해를 먼저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발해로 향하게 되면 또 서쪽 세력이 염려가 되었다.134) 따라서 중원을 치기 위해서 동쪽의 발해를 먼저 제거해야 되었고, 또 이를 위해서는 서쪽 세력을 먼저 제거해야만 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경략은 서방 정벌, 동방 정벌, 중원 정벌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가 서방 정벌과 동방 정벌을 자신이 완수해야 할 “두 가지 일”로 표현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135)


그런데 거란 태조가 발해 정벌에 나서면서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을해일에 詔(조)를 내려 ‘이른바 두 가지 일 가운데에서 하나를 이미 끝냈다. 그런데 발해는 대대로 원수지간인데도 아직 설욕을 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하고, 군대를 일으켜 친히 발해 大諲譔(대인선) 정벌에 나섰다(≪遼史≫권 2, 本紀 2, 太祖 天贊 4년 12월).


발해가 거란과 대대로 원수였다는 말은 일본 기록에도 보인다.136) 그러나 건국 초기부터 양국 사이의 관계를 개관해 보면 이 말은 과장된 것에 불과하다. 두 나라 사이에는 친선과 적대의 관계가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新唐書(신당서)≫발해전에서 잘 드러난다. 발해 영역이 서쪽으로 거란과 접하면서 주요 대외교통로의 하나로서 契丹道(거란도)가 설치되어 있었고, 반면에 거란과 통하는 길목인 扶餘府(부여부)에는 항상 날랜 병사를 주둔시켜 이들을 대비하였다.


그리고 발해가 “본래 거란과 脣齒(순치)의 관계에 있었다”137)고 한 기록이나,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합하였으나 홀연히 의심이 생겨 약속을 어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138)고 한 기록도 양국이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다는 말과 배치된다. 따라서 거란 태조의 말은 10세기에 들어와 양자가 대결 국면에 접어들었던 사실을 과장하여 발해를 치기 위한 명분으로 삼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발해는 서쪽으로부터 위협을 가해오던 거란 세력을 방비하는 데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발해는 주변국가와 제휴하여 공동으로 거란의 진출에 대응하거나, 아니면 직접 거란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모색하여야 하였다. 발해와 제휴할 수 있는 세력으로는 한반도의 후삼국, 중원의 후량과 후당, 바다 건너의 일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중원의 세력들도 역시 연계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특히 중국의 역대 朝貢(조공) 기록을 보면, 912년 11월에 거란이 조공한 것을 끝으로 923년 11월까지 공백기로 남아 있다.139) 이것은 이 시기에 후당과 후량 사이에 내전이 계속되면서 외국과의 사신 교환이 단절된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발해는 후삼국에서 제휴세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140) 이들 가운데에서 후백제와는 교섭한 기록이 전혀 없고, 다만 신라와 일시적으로 접근한 기록이 보인다. 발해와 신라는 9세기 후반 이후에 상호 경쟁적인 존재로 되었다. 9세기에 들어서 발해가 융성을 구가한 데 반해서 신라는 점차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이에 따라 당나라로부터 과거의 우위를 지키려는 신라와 현재의 우위를 인정받으려는 발해 사이에 여러 차례 경쟁사건이 벌어졌다. 당나라 조정에서 벌어졌던 양국 사신 사이의 爭長事件(쟁장사건)(897)이나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賓貢科(빈공과) 수석 다툼(872·906)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양국 사이의 관계는 911년 경에 이르러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사료가 참고된다.


태조가 발해를 공격하여 扶餘城(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나라 이름을 東丹國(동란국)으로 바꾸었다.…이보다 앞서 발해 국왕 大諲譔(대인선)은 본래 奚(해)·契丹(거란)과 함께 脣齒(순치)를 이루어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란 태조가 처음에 일어나 8部(부)를 병탄하고, 이어서 군사를 내어 奚國(해국)도 병탄하였다. 이리하여 대인선이 두려워하여 몰래 신라 등의 나라들과 結援(결원)하였다. 거란 태조가 이를 알고 회의를 열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葉隆禮(섭융례),≪契丹國志(거란국지)≫권 1).


911년에 거란이 奚와 霫을 정복함으로써 발해를 압박하게 되었고, 그 직후에 발해는 신라 등의 주변국과 비밀리에 연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에 한반도에서는 후백제와 후고구려(태봉)가 신라를 압박하던 형국이었으므로, 이 결원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양국관계는 이 다음에 다시 바뀌었다. 신라는 915년 10월과 925년 11월 거란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발해와의 결원을 파기하고 거란과 관계를 맺었었다. 그리고 마침내 925년 12월에 거란이 발해 원정에 나서자 일부 군대를 파견하여 거란군을 돕기에 이르렀다.141) 그러나 역시 신라의 능력으로 보아서 이 때 파견된 신라군은 거란을 도와준다는 명분을 살리는 데 그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발해와 태봉 및 고려와의 관계이다. 태봉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915년 10월, 918년 2월과 3월에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거란과 관계를 맺었다. 王建(왕건)이 918년 6월에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러한 정책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 따라서 발해와 고려 사이에는 별다른 교섭이 없었을 것이다.


고려가 거란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 것은 발해 멸망 이후이다. 936년 후삼국 통일을 완결한 뒤에 왕건은 서역 승려 襪囉(알라)를 後晋(후진)에 보내서 함께 거란을 쳐서 사로잡혀 있던 발해 왕을 구출하자고 제안하였고,142) 942년에는 거란 사신을 유배시킨 萬夫橋(만부교)사건을 일으켰다. 이로부터 980년대까지 양국 사이에는 소원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반면에 고려는 925년 9월부터 발해인들을 받아들였고, 934년 7월에는 발해 세자 大光顯(대광현)을 왕족으로 우대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따라 고려는 발해와 ‘婚姻(혼인)한 나라’ 또는 ‘親戚(친척)의 나라’143)라는 동질의식을 더욱 뚜렷이 나타내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발해는 신라와 비밀 결원을 맺은 것 외에는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발해는 918년 2월에 스스로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하기도 하였다.144) 그러나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단 한 차례로 끝나고 말았으니, 일시적인 조처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 요동을 압박해 옴에 따라 양국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에 가서는 독자적인 힘으로 거란에 대항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32) ≪遼史≫권 112, 列傳 42, 逆臣 上, 耶律轄底 및 권 64, 表 2, 皇子表.

133) ≪新五代史≫권 72, 契丹傳.

≪資治通鑑≫권 273, 後唐紀 2, 同光 2년 7월.


134) ≪遼史≫권 75, 列傳 5, 耶律鐸臻.

135) ≪遼史≫권 2, 本紀 2, 太祖 下, 天贊 3년 6월 을유·天贊 4년 12월 을해.

136) ≪續本朝通鑑≫권 6, 醍醐天皇 延長 8년 4월.

137) 葉隆禮,≪契丹國志≫권 1, 天贊 6년.

138) ≪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5년 10월.

139) ≪冊府元龜≫권 972, 外臣部, 朝貢 5.

140) 韓圭哲,≪渤海의 對外關係史-南北國의 形成과 展開-≫(신서원, 1994), 129∼152쪽 참조.

141) ≪遼史≫권 2, 本紀 2, 太祖 天顯 원년 2월 및 권 70, 表 8, 屬國表.

142) 李龍範,<胡僧 襪囉의 高麗往復>(≪歷史學報≫75·76, 1977 ;≪韓滿交流史硏究≫,同和出版公社, 1989).

143) ≪資治通鑑≫권 285, 後晉紀 6, 開運 2년 10월.

이 문구에 대해서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반대로 발해와 고려 왕실 사이에 혼인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보다 몇 년 전에 大光顯(대광현)을 宗籍(종적)에 붙인 사실과 연계시켜 해석하는 편이 가장 순리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石井正敏,<朝鮮における渤海觀の變遷-新羅∼李朝->(≪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53∼54쪽.

林相先,<高麗와 渤海의 關係-高麗 太祖의 渤海認識을 중심으로->(≪素軒南都泳博士古稀紀念 歷史學論叢≫, 民族文化社, 1993), 128∼129쪽.


144) ≪遼史≫권 1, 本紀 1, 太祖 神冊 3년 2월 계해.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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