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란국(東丹國)
동란국(東丹國)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B%8F%99%EB%9E%80%EA%B5%AD
존속기간 : 926년 ~ 936년
수도 : 천복성(天福城), 남경(南京)
주요 군주 : 야율돌욕
언어 : 거란어, 발해어
종족 : 거란족, 발해인
동단왕출행도(東丹王出行圖),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1]
이름의 뜻은 동쪽에 있는 거란의 국가. 동단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멸망한 발해의 옛 수도였던 상경용천부가 수도였으나 928년 요동의 남경(南京)[2]으로 천도했다.
발해부흥운동의 일부분이 아닌 거란의 괴뢰국쯤 되는 국가이다. 그러나, 신동준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괴뢰국이 아니라 준 독립국 수준으로, 감로(甘露)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고 외국과의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또, 발해 유민 190만여명이 살았다고도 하며, 밀림이 많아 숲의 바다라 불리울 정도였다고 한다.
2. 역사
926년 요태조 야율아보기는 국력이 약화된[3] 발해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단기간에 항복을 받아내었다. 옛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요나라는 동란국을 만들고 태자 야율배(거란식 이름은 야율돌욕)가 명목상 통치하도록 하였다.
괴뢰국이라지만 일본 기록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서 동란국 외교 사절이 거란을 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4]
일본과도 발해 때처럼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거절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발해 마지막 가독부 대인선의 치세에 일본에 이미 사신으로 다녀왔던 이가 있었는데, 발해가 멸망하여 동란국 정권이 들어오고 난 이후에는 동란국 사절로 일본에 다시 간 것이다. 일본 조정에선 얼마 전에 발해 사신으로 오지 않았냐고 물었고, 사신은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여 그 괴뢰 정권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자 일본 조정은 나라 멸망시킨 원수한테 붙어먹은 놈 인사는 안 받는다며 사절을 맞이하기를 거부하였고, 더불어 동란국이 변절자를 기용하는 것을 보니 예도 모르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며 통교를 금할 것을 통보했다.
야율배와 야율덕광이 싸우고 야율덕광이 결국 황제가 되자 야율배는 후당으로 망명하고, 야율배의 아들이 동란국의 왕으로 승격되었지만 10여년 뒤인 936년에 결국 허울 뿐인 이름도 없애고 거란 본국에 병합된다.
3. 기타
왕의 지위가 의외로 높아 요나라 황제 다음 수준이라는 주장도 있다. 행정 제도는 여전히 발해의 것을 썼으며, 차이점은 지배 계층이 거란인, 하위 관료나 피지배층이 발해인인 것 뿐이다. 스스로 발해라 칭했다고도 한다.
주
[1] 동란국과 관련되어 남아있는 얼마 안되는 그림들 중 하나. 동란국왕 야율배(야율돌욕)의 사냥 행차를 그렸다.
[2] 현재의 랴오닝성 랴오양(遼陽)
[3] 가까운 시기에 고려 등지로 망명이 잇따르고 있어서 멸망 직전 발해 국내에서 어떤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4] 당연한게 이 말을 한 사람이 발해 유민이기 때문이다.
동란국(東丹國) - 위키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B%9E%80%EA%B5%AD
926년 – 936년
공용어 : 거란어, 중세 중국어
국왕 : 926년~930년 야율배
930년~936년 아율배의 아들
동란국(東丹國, 926년 ~ 936년)은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족이 발해 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괴뢰국이다. '동란국'이란 동쪽에 있는 거란국이라는 뜻이다. 일부 지배층은 거란족이었으나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발해인이었다.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동만주 헤이룽장성 무단장(목단강)에 동란국을 설치하고, 요나라의 태자 야율배가 통치하게 하였다.
당시 상황(기록)으로 볼 때 숲의 바다로 불릴 정도로 밀림이 우거져 잘 다스리지 못했고 그 당시 중국이 5대 십국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상황이라 아율아보기는 동란국을 세워 아들 아율배에게 동란국을 통치하라 명했다.
당시의 정치적인 긴장이 야율배와 야율덕광 사이에서 자라났는데 야율덕광이 야율아보기가 붕어하자 거란의 황위를 취하였다. 그는 후당왕조에 대한 덜 성공적인 원정에서 그의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형을 수도 후한에서 랴오녕으로 옮기게 하였다. 야율배는 황명을 받아서 북중국으로 달아나 930년 암살을 피하였다. 야율배의 아들은 동란국의 새로운 왕으로 승격되었지만 왕국은 936년 거란 제국에 합병되었다.
발해와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929년 동란국은 동해 너머로 외교적인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의 교토의 황궁은 동란국의 사절을 거절하였다.
출처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4-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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