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2112.html?_fr=mt2
‘다크웹’ 잡은 미국 함정수사 우린 불법…전향적 기준 세울때
등록 :2020-04-27 04:59 수정 :2020-04-27 07:15
정부 ‘잠입수사 제한 허용’ 역부족
디지털 성착취물 범죄 못따라가
“남용 막되 수사 허용범위 넓혀야”
게티이미지뱅크.
정부가 성착취범죄 피의자 검거에서 잠입수사를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텔레그램 엔(n)번방’처럼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디지털 성범죄를 일망타진하려면 더 전향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논의되는 제한적 잠입수사만으로는 조직화된 디지털 성범죄의 지휘체계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23일 정부는 신분을 위장해 성착취물 판매자 등에게 접근하는 제한된 방식의 ‘기회제공형 잠입수사’를 수사기관에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국토안보수사국이 추적이 어려운 다크웹에서 아동 성착취물 25만여개를 배포한 한국인 손아무개(24)씨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건 ‘함정수사’ 결과라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미 연방수사관은 아동 성착취물 구매자로 위장해 손씨에게 접근해 가상화폐 지갑에 여러 차례 돈을 입금하고 이를 추적해 손씨의 인터넷프로토콜(IP·아이피) 주소를 확인했다. 다크웹 운영자 손씨가 아동 성착취물 판매에도 나선 사실을 적극적 함정수사로 밝혀낸 사례다.
한국에선 이런 함정수사가 형사소송법 308조의2항(위법수집증거의 배제)에 어긋나 불법이다. 우리 사법체계에선 성착취물 판매자에게 수사관이 구매자처럼 접근하는 ‘기회제공형 함정수사’는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반면 피의자가 성착취물을 판매하거나 구매하도록 ‘범의’를 갖게 하는 ‘범의유발형 함정수사’는 인정하지 않는다. 수사기관이 범죄와 결부되거나 범죄와 일부가 돼서 범죄 사실을 밝혀내는 건 적법한 수사가 아니라는 취지다.
최근 텔레그램 박사방 사건 등을 수사한 경찰도 조주빈(24)씨가 운영한 고액 유료회원방에 직접 돈을 내고 잠입해 범죄의 실체를 확인하는 대신, 일반 회원방에 있다가 성착취물 판매자가 나타나면 구매자로 위장해 접근해 검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디지털 성범죄를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26일 <한겨레>에 “경찰의 함정수사로 잡힌 피해자가 ‘범행을 저지를 생각이 없었는데 경찰 꼬임에 넘어갔다’고 진정서를 넣거나 검찰에 고소·고발을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자신있게 수사에 나설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다른 경찰 관계자는 “열심히 수사를 해놓고 재판에 가서 증거가 적법하게 수집되지 않았다며 무죄 판결을 해 ‘물먹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엔번방 사건처럼 방의 폭파와 개설을 반복하며 은밀하게 운영되는 디지털 성범죄를 수사하려면 잠입수사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회제공형 잠입수사는 물속에 피라냐 떼가 득실거리는데 낚싯대 하나를 갖고 피라냐 한마리씩 잡는 것과 같다. 이런 범죄의 흉악성을 고려할 때 범죄조직 안에 직접 들어가 범죄의 규모,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입수사를 확대하더라도 권한 남용에 따른 부작용을 막기 위한 섬세한 원칙이 필요하다는 데 경찰도 공감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잠입수사에 제한을 두는 가이드라인에 승인 절차, 비용 처리 방식 등을 정교하게 담을 예정”이라며 “아동 성착취물에 대해선 잠입수사가 전세계의 공감을 받고 있으므로 우선 성폭력처벌특례법이나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에 관련 내용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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