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area/honam/928623.html?_fr=mt1


금남로 거리방송 투사 차명숙 “아직 물어요, 간첩이었냐고…”

등록 :2020-02-18 05:00 수정 :2020-02-18 10:08


[5·18민주화운동 40돌 기획-오월, 그날 그 사람들] ① 거리방송 주역 차명숙씨


“광주의 아들딸들이 죽어간다” 진압군조차 떨게 한 19살 그 목소리

간첩 누명 10년형…아버지는 충격으로 별세 “고문수감 1년6개월, 책 읽으며 버텨내”

2013년 재심 거쳐 간첩 낙인 벗고 안동서 홍어 등 남도음식점 차려, 광주 투입된 공수대원들도 찾아와

오월단체 활동에 나눔·봉사 열성 “5·18 비켜서 날고 싶어, 딱 한달만”


1980년 9월12일 광주 상무대(전투교육사령부)의 ‘계엄보통군법회의’ 군사법정에 나온 차명숙씨. 대안신당 제공


5·18 민주화운동이 40년을 맞았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의 항쟁은 이후 한국 사회를 크게 바꿔놓았다. 당장 5·18을 경험한 시민들은 7년 뒤 일어난 6월항쟁의 맨 앞자리에서 전두환 군부독재의 종말을 이끌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6월항쟁을 넘어 5·18에 빚지고 있는 대목이다. 5·18의 피로 한국 민주주의가 자라는 동안, 거대한 사건이 한 개인에게 남긴 상흔 또한 엄연했다. 이름도 남김 없이 죽어간 이들 뒤로, 살아남은 개인들은 경로가 뒤바뀐 삶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핥아가며 겨우 마흔번째 봄을 맞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한겨레>가 80년 5월의 사진 속 이름 없는 개인들을 찾아 나선 이유다. 무엇보다 이번 기획의 목적은 5·18 민주화운동이 멀게만 느껴질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는 데에 있다. 무명의 인물들을 호명하고 그들의 어제와 오늘을 영상에 담는 작업을 통해 5·18 진상 규명의 남은 과제와 진정한 기념의 의미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분홍색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그는 시선을 손끝에 뒀다.


1980년 9월12일 차명숙씨는 군사법정에 섰다.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5·18항쟁 관련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광주 상무대(전투교육사령부) 안에서 ‘계엄보통군법회의’를 열었다. 법정에는 무장한 헌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여름 끝자락이었지만 법정 안 분위기는 서늘했다. 80년 5월 거리방송 주역 중 한 사람인 차명숙씨는 이날 15년형을 구형받았다.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신군부가 5·18항쟁 관련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광주 상무대(전투교육사령부)에 설치한 ‘계엄보통군법회의’ 군사법정. 대안신당 제공


“사진 속의 블라우스는 누구 옷인지 몰라요. 5월에 잡혀 들어가 옷이 ‘개판’이라, 재판 받으러 간다고 하니 누군가 옷을 건네줬어요.(웃음)” 지난 11일 만난 그는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수인번호 113이 적힌 죄수복을 입었다. 여자 사동 1호실엔 5·18 여성 투사 여럿이 갇혀 있었다.


차씨는 국제양재학원에 다니던 중 5월을 맞았다. 고향이 전남 담양인 그는 “딸자식은 공부해선 안 된다”는 아버지 때문에 배움을 잇지 못하자 광주로 왔다. 주변에선 그가 “쬐깐한 것이 말도 안 듣고 고집이 세다”고 했다. 성당 성가대를 하면서 한 교수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성당 다니며 알게 된 장애인 수도원의 커튼을 만들어 달아주는 등 봉사도 했다. 카타리나(영세명)는 재봉일을 부지런히 배워 양장점 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그해 5월이 삶을 뒤바꿔놓았다. 5월20일 오전 10시 무렵, 만나기로 했던 친구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기숙사로 발길을 돌릴 때 광주 시내의 상황을 목격했다. 군인들이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있었다. 세상일은 잘 모르지만 군인이 시민을 때리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시위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광주 시민들에게 군인들의 만행을 알려야 했다. 금남로 3가에서 만난 대학생·청년들과 함께 학동 동사무소에서 확성기와 스피커를 구해 방송을 시작했다.


1980년 5·18 민주항쟁 당시 차명숙(원 안)씨가 광주 시내를 돌며 “당신의 아들딸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 빨리 나와서 광주를 지키자”고 호소하는 거리방송을 하고 있다. 차명숙씨 제공


차씨는 파마머리 가발을 쓴 채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칼칼한 목소리로 “당신의 아들딸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 빨리 나와 광주를 지키자”고 호소했다. 석가탄신일인 21일에는 전날 광주역 근처에서 숨진 주검 2구를 손수레에 싣고 전옥주(본명 전춘심) 등 방송팀과 함께 금남로로 이동했다. 처참한 주검은 시민들을 격분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80년 11월 수감 중이던 차명숙씨가 쓴 진술서.


24일께 광주기독병원에서 붙잡혀 보안사령부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21일 금남로에 있다가 피해서 누군가의 집 옷장 안에 숨어 있었지요. 계엄군이 시외로 퇴각한 뒤 무장한 시민군의 거점이 된 옛 전남도청에 들어갔다가 기독병원에서 주검 수습을 하던 중이었어요.” 보안대는 당시 군인들을 시민들로 위장시켜 군중 속에서 간첩조작 공작을 진행했다. 간첩이라고 몰아붙이며 모진 고문을 해도 허위자백을 하지 않고 버틸 정도로 그는 강단졌다. 그해 7월 보안대와 합동수사본부 군인들은 그를 차에 태워 고향인 담양으로 끌고 갔다. 동네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교육받고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킨 고정간첩”이라고 소문을 냈다. 아버지는 당시 충격을 받아 뇌출혈로 쓰러진 뒤 결국 세상을 떴다.


차명숙씨가 경북 안동시 옥동 ‘행복한 집’ 식당에서 웃고 있다. 차명숙씨 제공


고통은 수감 뒤에도 계속됐다. 광주교도소에서 또 다른 조작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그해 10월에는 허리띠와 연결된 가죽 수갑을 차고 한달 동안 독방에 갇히기도 했다. “왼쪽 손목이 다 썩어 들어갔어요. 고기가 탱탱하게 언 것처럼 손이 까맣게 다 터졌죠.” 지옥 속에서 그를 구원해준 것은 글이었다. 주변에서 교도소로 넣어준 책들을 한줄 한줄 읽었다. 계엄법 위반죄 등으로 군사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1981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년6개월 만이었다. 아버지의 묘를 찾아간 날, 차명숙씨는 한참을 울었다.


지금의 남편은 서울에서 만났다. 1985년 신림동성당에 다닐 때였다. 남편은 성당 청소년센터 실무 간사인 동갑내기였다. 성당 어린이 공부방에서 ‘개구리 소년’이라는 동요에 맞춰 함께 율동을 가르치며 친해졌다. 1986년 경북 안동 태화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5대째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의 장남이었다. <한겨레> 창간주주였던 그의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자랑스러워했다.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처음 맞는 행복이었다.


왼쪽부터 1989년 시가인 경북 안동으로 이사해 아이를 돌보는 차명숙씨. 차씨가 2019년 6월 서울 수요시위에서 제3회 길원옥여성평화상을 받았다. 차씨가 1986년 경북 안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모습. 차명숙씨 제공


위기는 1989년 2월에 찾아왔다. 국회 5·18진상조사특위 청문회를 본 남편이 “전춘심이 누구야?”라고 물었다. 차명숙씨는 “나랑 공범이야. 더 이상 묻지 마”라고 말했다. 남편은 5·18은 빨갱이가 벌인 폭동이라 수군대는 동네 사람들 때문에 적잖이 상처받았다. 다감했던 남편의 말수가 줄었다. “남편이 5·18과 관련해 말을 안 하는 게 더 징글징글했어요. 쓰다 달다 말을 해야지요.” 힘이 든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참다못한 그가 “애 둘 데리고 나가겠다”고 선언하자 시아버지는 되레 장남에게 “애비야, 니가 나가라”고 다그쳤다. 차명숙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야고보(남편의 영세명)가 그때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어 미안하다”고 했다.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데는 성당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당시 안동의 천주교회 신부들은 대부분 광주가톨릭대 출신이었던 까닭에 5·18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함세웅 신부와의 인연도 큰 힘이 됐다. 서울 성당에서 알게 된 함 신부는 1982년 5월부터 다달이 일정 금액을 차씨에게 후원했다.


차명숙씨가 두 아들과 함께 함세웅 신부(맨 오른쪽)를 찾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함세웅 신부는 차씨가 힘들 때마다 용기를 주곤 했다. 차명숙씨 제공


80년 5월과 무관한 듯 자식 키우며 살던 그는 2001년 5·18유공자가 되면서 세상으로 나왔다. 주변에서 “이젠 나가서 5월의 진실을 증언해야 한다”고 권유했지만, 두 아이는 방송이나 신문에 엄마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만 그는 “5·18과 관련한 역사교육을 해달라”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부탁한 뒤, 학교에 직접 나가 5·18 당시의 경험을 증언하기도 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그러더라고요. 학교 후배가 자신에게 찾아오더니 ‘형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이젠 직장인이 된 두 아들은 그에게 든든한 힘이다. 2013년 안동지원에서 열린 재심을 통해 5·18 당시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그는 “속이 시원하고, 무엇보다 아들들한테도 떳떳할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자신이 운영하는 경북 안동시 옥동 ‘행복한 집’ 앞에 차명숙씨가 서 있다. 정대하 기자


그는 2003년 안동에 홍어·꼬막 등 전라도 음식 전문 식당을 차렸다. 안동지역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의 사랑방이다. 식당엔 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 출신들도 온다. 혼자 술을 마시다가 “군화를 몇날 며칠 안 벗어본 사람은 심정 몰라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몇해 전엔 5·18기념재단 등의 소개로 제주에서 한 공수부대원 출신 남성을 만났다. 건물 경비원 일을 하는 그는 차명숙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내더라고요. ‘꼭 물어볼 말이 있는데 그때 진짜로 간첩이었냐’는 거였죠.(웃음) 당시 5월 광주에서 조용한 밤에 여성들 목소리가 카랑카랑 들리면 두려웠다고 하더라고요. 후퇴 명령만 기다렸는데 자기들을 옛 전남도청 앞에 세워놓았다면서. 그들도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구·경북 5·18동지회 회장인 차명숙씨는 2008년부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과 해마다 5월이면 ‘주먹밥 나누기’와 5·18 강연회 등의 행사를 열고 있다. 안동 시민들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하는 일도 거르지 않는다. 사랑의 연탄 나누기와 장기수 면회 등 봉사활동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남편은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걸 세 모자가 어찌 그리 꼭 닮았냐”며 농담을 건넨다. 그동안의 헌신으로 그는 지난해 6월 제3회 길원옥여성평화상을 받았다.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는 1980년 10월 차명숙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차명숙씨는 80년 5월에 거리로 나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5·18 40돌을 맞는 올해부턴 약간 비켜서고 싶다”고 말했다. 5·18을 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겐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올해 그의 작은 소망은 ‘5·18 차명숙’이라는 것을 모르는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냥 훨훨 날아보고 싶어요. 인도에 가서 힌두교 사원도 가보고 싶고… 딱 한달만 그렇게 살고 싶네요.”


안동/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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