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5956
'예산낭비' 비판받던 공공의료, 코로나19 확진자 80% 치료했다
[코로나19와 서울의 공공의료 ①] 메르스 이후 더 튼튼해진 서울의 시립병원들
20.04.27 13:40 l 최종 업데이트 20.04.27 13:40 l 손병관(patrick21)
▲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된 서울시 보라매병원 의료진이 유리벽으로 된 상자에 장갑이 달린 구멍을 통해 영아를 돌보는 인큐베이터와 유사한 구조로 만들어진 "글로브-월(Glove-Wall)" 방식의 검체채취실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 서울시 제공
서울시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풀 꺾인 2015년 11월 19일 시의 방역 대응 6개월을 평가한 298쪽의 '메르스 백서'를 내놨다. 이 백서에는 박원순 서울시장부터 김창보 시민건강국장(현 서울시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나백주 서북병원장(현 시민건강국장) 등 5년 뒤 코로나19 사태의 최전선에서도 뛰고 있는 사람들의 회고담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서도 눈길을 끈 것은 최근까지 서울의료원을 이끌었던 김민기 전 원장이 2015년 6월 23일 오후 4시 10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보건의료를 최소의 비용을 들여서 최대의 효과를 보려고 하는 효율성만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서울의료원 만든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음압격리병상을 써봤다. 그동안 '예산낭비다',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지만 지금 이 위기 상황에서 메르스 치료 최전선에서 잘 싸우고 있다. 공공의료는 이런 부분이 아닐까 한다. 비용은 다소 들 수 있지만 급한 시기에 꼭 필요한 기능을 하는."
서울시의 백서는 메르스 사태에서 중앙정부보다 더 발빠르게 대응한 시의 대응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묻어났지만, 공무원들의 '공문철 묶음' 이상의 가독성이 있다. 당시 상황을 날짜별로 꼼꼼히 보여주면서 서울시의 재발 방지책과 전문가 인터뷰, 현장 종사자 후기를 곁들였다.
특히 책임있는 컨트롤타워 구축,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 위험정보 공개 등의 원칙은 이후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됐다. 백서에서 '메르스'를 '코로나19'로 바꿔놓으면 지금의 서울시가 어떤 방역을 해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기시감을 주는 대목들이 많다.
이 가운데에서도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은 코로나19 국면에서 수치로 그 성과가 입증된 분야다.
서울 확진자 5명 가운데 4명, 공공의료 인프라 덕 봤다
서울시에서는 지난 1월 23일 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한 이래 4월 24일까지 약 석 달 동안 628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8000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온 대구·경북을 제외하고는 경기도(658명)와 함께 가장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서울에는 시립병원 12곳 있는데 이 가운데 서울의료원(187명)과 보라매병원(138명), 서남병원(100명), 서북병원(21명) 등 4곳에서 서울 확진자의 71%에 달하는 446명을 치료해 225명을 퇴원시켰다.
경증 또는 무증상 확진자들을 위해 노원구 태릉선수촌에 임시로 만든 생활치료센터에 들어간 인력(21명)까지 합하면, 확진자 5명 가운데 4명이 서울의 공공의료 인프라 덕을 봤다는 계산이 나온다.
반면, 큰 병이 나면 시민들이 으레 찾는 서울의 이른바 '빅4 병원'의 확진자 수용 인원은 20명에 미치지 못했다. 서울대병원 11명, 서울아산병원 4명, 신촌세브란스병원 2명, 삼성서울병원 1명 등이다.
물론 이는 '빅4 병원' 의료 인프라가 서울 시립병원들보다 뒤처져서 생긴 현상은 아니다. 삼성서울병원의 경우 2015년 응급실에 입원한 메르스 확진자 1명이 80여 명을 감염시키는 바람에 병원이 부분폐쇄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서울시는 코로나19 방역 과정에서 유사 사태가 발생할 경우 대형병원의 기능 자체가 타격받을 것을 우려해 확진자들을 서울 시립병원에서 치료받도록 적극 유도했다.
서울시내에 마련된 92개 선별진료소 가운데 민간병원 25곳을 제외한 67곳은 구청 보건소 또는 국·공립병원에 마련됐다. 선별진료소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13만3650명 가운데 9만8934명(74%)이 이들 공공 진료소를 이용했다.
박원순 시장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치료받나?"
공공의료 인프라 구축은 '공짜'가 아니다. 서울시가 시립병원 12곳을 운영하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투입한 세금은 2930억 원. 매년 977억 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홍준표 지사 시절인 2013년 진주의료원 폐원 이후 인구 330만 명의 공공의료를 병상 300개의 마산의료원 하나로 감당해야 하는 경상남도에 비해서는 좋은 조건이지만, 서울시도 늘 '예산 낭비', '비효율'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정치인·행정가 출신과는 달리 시민운동을 오랫동안 해왔던 서울시장 박원순은 처음으로 시민의 입장에서 공공의료 문제를 들여다봤다.
"서울에 시립병원이 10개가 넘는데 적자가 나는 병원들이 있다. (지방의료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많아지면 주민들의 의료 공공성이나 무상지원 등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이다." (2013년 4월 5일 국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디서 치료받으란 말인가? 서울 시립병원 13곳의 적자가 800억 원에 달하지만, 더 투자할 것이다." (2014년 7월 3일 광주시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서울시 시립병원들이 모두 적자이지만, 이는 시민이 낸 세금을 시민에게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시립병원에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 (2019년 6월 4일 서남병원 '서울케어' 현판식에서)
▲ 박원순 서울시장이 2월 18일 오전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을 찾아 코로나19 치료에 투입된 의료진을 격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의료원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입원 중이던 일반 환자들을 순차적으로 다른 병원으로 전원시키고 병동 전체를 코로나19 환자 전용 병원으로 빠르게 전환시켰다. 수익성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민간병원이라면 병원장이나 이사회 등의 지난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역학조사관과 음압병실을 충분히 확보하기로 한 것도 코로나19 국면에서는 '신의 한 수'가 됐다. 병문안 과정에서 일반인과 다른 환자들의 접촉으로 감염병이 번지지 않도록 시립병원 6곳에 '별도 면회실'을 마련한 것도 메르스가 잦아든 2016년 이후의 변화다.
탄저병과 사스, 에볼라 등 인류를 위협하는 신종 질병이 터질 때마다 병의 감염 경로를 추적하는 역학조사관은 한 마디로 '질병 탐정'의 역할을 한다. 메르스 사태 당시 서울시의 역학조사관은 단 한 명. 그것도 군 복무를 대신해 3년 동안 지역보건소 등에서 업무를 보는 공중보건의였다.
문제는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공중보건의가 역학조사관으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여기저기서 환자가 새로 생기는데도 이미 사망한 사람의 시신 처리에도 입회해야 한다는 게 당시 보건복지부의 업무지침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에 서울시는 코로나19 국면 직전까지 정규직 2명, 계약직 1명, 공중보건의 1명 등 역학조사관 수를 4명까지 늘렸다.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서울의료원 산하 감염병관리지원단 직원 7명이 투입됐고, 업무 교육을 받은 의사 30명과 구청장 지정 요원 25명이 보강되며 106명의 역학조사관을 운용할 수 있었다.
역학조사관을 확보하지 못하고 중앙정부 지침만 기다렸던 메르스 사태에 비해서는 상전벽해의 변화가 이뤄진 것이다. 역학조사관을 이처럼 대거 확보한 덕에 구로콜센터(98명), 만민중앙교회(41명), 은평성모병원(21명) 등 지역사회 감염으로 크게 번질 수 있는 사건이 터졌을 때 역병의 불길을 빨리 잡을 수 있었다.
메르스 사태에 비하면 '상전벽해'
호흡기 증상 환자들을 진료하는 데 필수적인 음압병상 수요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둔 것도 사태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서울시는 2015년 각 38개, 97개에 머물렀던 음압병실과 음압병상 수를 1년 만에 각각 86개, 224개로 늘렸다. 이 숫자는 코로나19 사태 직전까지 바뀌지 않았다. 반면, 6800명의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대구에는 음압병실이 10개밖에 마련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음압병상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2003년 중국과 홍콩, 싱가포르 등을 휩쓴 사스의 유행 이후였다. 그러나 당시 사망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중증호흡기증후군의 재발에 대비해야 한다"는 공공의료계의 목소리는 힘을 얻지 못했다.
서울시 보건계통 간부들은 음압병상의 운용 실태를 보고할 때마다 시의원들로부터 "돌봐야 할 일반 환자들이 많은데, 쓰지도 않는 병상을 왜 놔두느냐"는 질책에 시달려야만 했다.
▲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된 서울의료원의 의료진이 음압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의 상태를 모니터로 살펴보고 있다. ⓒ 서울시 제공
코로나19가 터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서울의료원의 경우 일반병실에 이동형 음압기를 설치해 최대 109명의 환자를 한꺼번에 모니터할 수 있는 상황실을 운용했다. 확진자 600여 명 중에서 서울의료원에서 치료받고 일상에 복귀한 사람은 80명에 이른다.
음압병실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바뀐 것도 메르스, 코로나19의 '부수적인 성과'다. 서울시 관계자가 메르스 사태 당시 "음압병실에서 공기를 주욱 빨아들여서 밖으로 내보낸다"고 설명하면 "바이러스가 밖으로 퍼져 인근 주택가로 오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나왔는데, 이제는 '음압병실=첨단의료시설'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서울시는 코로나19 환자들을 위해 시립병원에 최대 667개의 병상을 준비했다. 최악의 경우 1000개의 병상을 확보하는 시나리오도 있었다. 서울의 코로나19 관련 입원자 수는 3월 24일 227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진정세로 돌아섰다.
김창보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는 "대구에선 코로나19 확진자가 3주 동안 5700명까지 불어났다, 서울도 확진자가 1만 명이 넘어갔다면 의료자원이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다행히도 초동 대응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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