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6530


'뻔뻔한' 전두환이 두려워하는 2가지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4월 27일 고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재판

20.04.27 11:46 l 최종 업데이트 20.04.27 11:46 l 김종성(qqqkim2000)


연희동 자택 나서는 전두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27일 오전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나와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전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의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조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로 기소됐다.

▲ 연희동 자택 나서는 전두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27일 오전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나와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전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의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조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로 기소됐다. ⓒ 연합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작년 3월 11일에 이어 4월 27일 또다시 광주지방법원에 출석한다. 1980년 5·18 학살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두고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서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라고 비난한 일로 재판을 받기 위해서다.


전씨의 죄과에 대해서는 김영삼 대통령 때인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선고가 있었지만, 당시 재판에서는 5·18의 진실이 충분히 규명되지 못했다. 발포 명령자가 누군지, 행방불명자는 몇 명인지, 암매장을 했는지 등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 다뤄지지 않은 혐의도 적지 않다. 조비오 신부가 증언한 헬기 사격뿐 아니라 아놀드 피터슨 선교사가 <5·18 광주사태>에서 증언한 광주 폭격 계획 등도 그렇다.


이처럼 전두환씨의 죄상은 한층 더 무거워지는 데 반해 지금 광주지방법원에서 다뤄지는 죄목은 너무 가볍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을 다루는 이번 사자명예훼손죄(형법 제308조) 재판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 형량은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이다.


전씨는 1995년 12월 3일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체포되고 1997년 12월 22일 사면·복권을 받고 풀려났다. 죄과에 비해 수감 기간이 너무 짧았다. 지금 진행 중인 재판에서도 죄에 상응하는 형벌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1995년 당시 전두환은 64세였다.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형벌을 감내하기 힘든 나이도 아니었다. 그때 그에게 제대로 된 형벌을 가하지 못하고 성급히 사면한 일로 인해 한국 사회가 입은 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잘못된 선례


국민들이 전두환씨와 그의 아내 이순자씨의 뻔뻔함을 지켜보며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과거사 청산과 사회 발전이 현저히 저하되는 불이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을 무참히 살상하고도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뻔뻔하기까지 한 전씨의 모습은 그의 지지자들이 자신감을 갖고 과거사 청산과 사회발전에 저항하도록 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지만원씨 같은 극우인사가 5·18 북한 개입설 같은 황당한 허언을 퍼트리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수구세력의 '수괴'인 전씨부터 제대로 된 응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12월 22일에 우리 사회가 잘못된 선례를 남겼던 것이다.


전두환씨에 대한 대응이 미비했다는 점은 그의 형량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나타난다. 우리 사회가 그에 대한 '맞춤형 응징'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사기 행각을 저질러 거액을 편취한 뒤 유죄선고를 받고 형을 적당히 치른 다음에 그 돈을 갖고 호의호식하는 범죄자들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물질을 극단적으로 중시하는 반면에 명예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렴결백하다는 칭송을 받다가 비위 사실이 드러나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부 공직자들은 위선적이기는 하지만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위와 같은 유형의 사기 범죄자는 이런 사람들과는 전혀 딴판이다.


1988년 퇴임 이후 전두환씨는 대다수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1995년 합천에서 잠옷 바람으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기 전에도 그는 국민의 지탄 대상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1988년 5공 청문회 이후로 그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처럼 30년 넘게 비판과 조롱을 받고 있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있다.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질서를 파괴했다는 이유로 유죄선고를 받았으면서도, 12·12 쿠데타를 기념해 서울 강남에서 쿠데타 동지들과 함께 기념 식사를 했다. 치매 때문에 법원에 출석할 수 없다고 해놓고도, 몇 번이나 태연하게 골프장에 출현했다. 통장에 29만 원밖에 없다고 해놓고도, 재산세가 29만 원을 훨씬 넘는 연희동 고급 주택에서 살고 있다.


이는 그가 세상의 평판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는 인물임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면, 세상의 미움을 자초할 일을 그렇게 태연하게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비난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꿋꿋하게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멘탈'을 갖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가 명예 손상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의 죄과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방식만으로는 그의 사죄를 받아내기 어렵다. 이 정도로 수많은 죄과가 드러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욕을 하는데도 수그러들기는커녕 여전히 뻔뻔하다는 것은, 지금의 방식만으로는 그를 사죄와 반성으로 이끌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신체 구속


그런 전두환씨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다. 퇴임 후 그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것은 신체 구속의 가능성이다. 신체 구속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마다 그는 어디론가 달아나는 모습을 보여왔다.


전두환이 퇴임하자마자 그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의 퇴임 1개월 뒤인 1988년 3월 31일에는 동생 전경환이 구속됐다. 국회에서 5공 청문회가 열린 11월에는 상황이 더욱 커졌다. 11월 12일 형인 전기환이 구속되고, 사촌동생 전우환도 붙들렸다. 다음날에는 동서 홍순두가 구속됐다. 이때까지 구속된 전두환 친인척은 총 8명이었다.


이처럼 자신을 향해 수사망이 좁혀지는 상황에서 그가 내린 선택이 있다. 그것은 서울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12월 23일부터 그는 설악산 백담사에 은둔했다. 이 생활은 그 후 2년간 이어졌다.


유사한 상황은 1995년에도 나타났다. 5공 청산 기운이 재고조되는 가운데 그해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을 내란 주모자로 의법 처리하겠다'고 발표했을 때의 일이다.


전씨는 김영삼에 맞서 12월 2일 집 앞에서 골목 성명을 발표했다. "저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라며 정면으로 맞섰다. 그런 뒤 그는 곧바로 서울을 떠났다.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간 것이다.


유사한 모습은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12월 3일에도 나타났다. 합천으로 피했다가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체포돼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단식을 개시했다. 11월 16일 수감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 첫날 김치·두붓국·두부조림이 놓인 식판을 말끔히 비우고 잠자리에 든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전씨의 단식은 12월 20일 그가 안양교도소를 나와 서울 가락동 경찰병원으로 이송되는 원인이 됐다. 이 단식은 병원에 간 지 9일 뒤에 끝났다. 1996년 3월 2일 재수감되기까지 그는 병원에서 생활했다. 신체 구속에 저항하는 혹독한 단식의 결과로 2개월 반 정도를 병원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95년 12월 7일자 <한겨레> 기사 '5공 정통성 부인 승복 못해'에 따르면, 교도소에 갇히고 단식을 개시한 지 3일 뒤 전두환씨는 이양우 변호사를 통해 "제5공화국의 정통성이 전면 부인되는 현재 상황을 결코 승복할 수 없으며 5공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단식 동기를 외부에 알렸다.


5공 정권의 명예를 위해 단식을 한다 했지만, 그가 명예를 그렇게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자신과 5공의 명예가 땅에 추락하기까지 사태를 방치한 데서도 드러난다. 5공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면, 지난 30년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체구속의 위험성이 커질 때마다 현장을 떠나곤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때의 단식 역시 교도소를 벗어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전두환씨는 젊어서부터 활력적인 스포츠광으로 유명했다. 즐기지 않는 스포츠가 드물었다. 육사 재학 때는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다. 그의 집권기에는 프로축구·프로야구·프로씨름이 생겼다. 세상의 비난을 받는 최근까지도 그는 골프장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신체 구속은 누구나 다 두려워하는 바이지만, 전두환씨의 경우 활력적인 기질이 신체 구속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더 키우는지도 알 수 없다.


한국 사회는 5·18 학살과 전두환씨의 죄과를 규명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데 반해 그에게 올바른 형사처벌을 부과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노력을 적게 들였다. 명예손상보다 신체구속을 훨씬 더 두려워하는 전두환씨에게는 상당히 부족한 대처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에 의해 사면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사면을 저지하지 못한 데는 사회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2019.3.11 ⓒ 공동취재사진

 


전두환씨는 돈에도 과도한 집착을 보여왔다. 군인 시절부터 선배들로부터 용돈을 받아 후배들에게 나눠주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된 뒤 재벌들을 과도하게 압박한 일도 밝혀졌다. 거기다가 노태우씨와 달리 추징금 납부에도 매우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기가 번 것도 아닌 돈을 악착 같이 움켜쥔 채 세상의 조롱을 무시하며 부를 누리고 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평균 이상으로 과도함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전씨에게 타격이 될 만한 것은 불법취득 재산을 철저히 환수하는 것이다. 돈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그에게 그 이상의 타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불법취득 재산으로 부를 향유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1988년부터 전두환씨 징벌을 추진했지만 제대로 된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죄악의 결과물을 향유하며 여전히 뻔뻔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런 모습은 그를 옹호하고 5·18 학살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을 한껏 고무시키고 있다. 명예 손상보다는 신체 구속과 재산 손실을 더 두려워하는 그에게 맞춤형 징벌이 집행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포함해 그의 5·18 학살을 명명백백히 규명하는 일과 함께, 그가 이제라도 제대로 된 형벌을 받고 그의 재산이 제 위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더 노력해야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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