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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시인의 만주 이야기 26] 주몽의 고향 동단산을 오르다
입력 2010-10-15 | 발행일 2010-10-15 제43면 | 수정 2010-10-15
'할아버지 주몽'의 고향땅을 되찾은 후…광개토대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동단산(東團山)'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동단산 중턱 바위 . 부여국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실제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 용담산성을 오르다
동단산은 길림시 시가지를 관통하며 흐르는 송화강변에 있다. 길림시조선족문화예술관과 도라지문예잡지사 조선족백화점이 있는 시가지에서 송화강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굽이 돌아가면 나타나는데 굽어돌기 전 대로변에 우뚝 솟은 산이 하나 보인다. 그 유명한 용담산성(龍潭山城)이다. 일명 고구려산성, 부여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단산성은 고구려 시조왕이며 광개토대왕에게는 18대 할아버지가 되는 주몽왕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이며, 광개토대왕은 18대 할아버지의 고향땅까지 회복하러 용담산성까지 북진해 온 것이다. 할아버지의 땅을 회복하러 온 광개토대왕의 피끓는 혈육지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20분 정도 걸어 산길을 거슬러 오르면 당시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머물렀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 돌을 정교하게 쌓아 만든 '수뢰'라는 이름의 축수지는 하나의 연못을 연상하게 하는데,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병사나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역할을 했던 곳이다.
땅을 파 둥글게 돌을 쌓아올린 한뢰는 큰 우물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범죄자나 포로를 가두는데 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뢰는 용담산성 남쪽 정상 오르는 길 좌측에 위치해 있으며, 수뢰는 맞은편 낮은 지대인 북쪽에 위치해 있다. 그밖에 무기를 저장했던 곳으로 알려진 음마소 등이 있다. 용담산성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니는데 한국 TV방송 다큐멘터리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산성이기도 하다.
광개토대왕은 이곳에 성을 만들어 물길, 숙신, 말갈 같은 북방민족들을 흡수한 뒤 중원의 왕조와 대결할 힘을 길렀던 것이다. 남쪽 한반도로는 백제와 신라, 중국 내륙과 동몽골초원 쪽으로는 후연, 거란을, 연해주 쪽으로는 동부여와 치열한 정복전을 치른 광개토대왕이었다. 2~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에 웅장하고 둘레의 길이가 2.4m에 이르는 규모로 봐도 이 산성이 고구려의 북방전진기지임을 알 수가 있다.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이 고구려 제2의 도읍인 압록강변 집안땅에서 여기까지 북진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바로 이 용담산성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이 산성의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적어놓은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고구려 왕국 제19대왕 호태왕때의 산성으로 산성 안에 군사들의 식량과 말에게 먹이는 물 등을 보관하는 곳까지를 상세히 기술해 놓고 있는 요새임을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왕국이라 표기하면서 '공원전(公元前) 37년~공원(公元)668년까지'라는 고구려 건국과 멸망 연도, 사직까지 적어놓고 있다. 이 산성을 용담산성(龍潭山城)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1961년 4월13일 길림시 인민정부에서 세웠다는 소개의 입간판도 나란히 세웠다.
◇ 동단산을 가다
바로 남쪽 산정에 오르면 발 아래로 절경이라 할 수 있는 송화강과 너른 벌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굽이쳐 흐르는 송화강 강변에 어머니의 젖무덤 같이 볼록한 산이 하나 솟아있는 게 확인된다.
광개토대왕이 26세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이곳까지 말갈퀴 휘날리며 북진해 영토를 확장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일컬으며 동성성왕의 고향땅이 되는 셈이다. 바로 주몽의 어릴적 고향이 동단산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어머니 유화부인과 알에서 태어났다는 주몽이 22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위인전을 통해서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인 유화부인과 22세까지 함께 살다가 그해 금와왕과 대소왕자의 감시를 피해 동부여를 탈출해 송화강 즉 엄수대수를 따라 남하했다는 이야기를 익숙하게 들어왔던 터이다.
송화강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굽이돌아 15분가량 들어가면 시골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길거리 간판도 그러하지만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다. 택시 한 대가 겨우 들어가는 좁은 골목길과 나무판자로 울타리 한 흙집, 그리고 뛰놀고 있는 닭, 염소, 오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택시에서 내린 도라지 잡지사 주필인 원로 소설가 고신일 선생님과 편집장 김홍란씨, 그리고 한국에서 동행한 대구시인학교 제자들과 함께 마을의 비좁은 골목길을 들어서서 산언덕을 향해 오르니 들국화·마타리·초롱꽃 등이 익숙한 얼굴처럼 반겨줬다.
뒤쪽 산길로 올라 앞쪽 산길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정상에 오르면 길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아래 변함없이 흘러오고 흘러가고 있는 송화강의 물굽이는 누구도 바꿀 수 없었나 보다. 내려서는 산중턱의 집채만한 바위에는 '동단산(東團山)'이란 글이 대형 붉은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부여국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실제 유적이 발굴되고 있으며 속칭 '남성자(南城子)'로 불리는 유적지다.
온갖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나무 한 그루마다 스며있을 옛 우리 민족의 숨결이 잎새들의 출렁거림 속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산능선의 나무숲을 거의 다 빠져 나왔을 무렵, 고 선생님께서는 오래된 기와조각을 하나 주워 내게 건넸다. 손에 받아쥐니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가버린 역사의 버려진 흔적에 불과했지만 필자와 같은 음력 5월5일 단오날 태어났다는 주몽의 잃어버린 왕국에 대한 끓어오르는 나의 불길이 이 손바닥 위에 놓여있는 기왓장조각 같았다. 요즘도 산밭을 갈다보면 나온다고 한다.
어찌된 것이냐 /한줌 흙 풀 한 포기 /구르는 돌멩이마저 말 없으니 /여기가 내 아버지의 아버지 땅 아니더냐 /벌판을 휘둘러 온 저 바람마저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그냥 불고 간다 /어찌된 것이냐 /강과 언덕아 나무들아 /분명 이곳은 낯선 땅이 아닌데 /저 광개토대왕의 말발굽소리 /이곳에까지 닿아 북벌 향해 /북소리 울렸다 하는데 /어찌된 것이냐 그 옛날 /유화부인과 주몽이 살았다는데 /활 잘 쏘는 주몽의 화살은 /어디 가고 /물 긷던 동네 아주머니들 /물항아리는 어디에서 쉬고 있는가 /송화강 물 길어 저녁밥 지으면 /지붕 위론 새하얀 박꽃 피던 /시간마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아 이리도 내 마음 /답답해져 오는 것은 휘돌아 흐르는 /저 강줄기 벌판을 향해 /함께 흐르지 못하기 때문인가 - 서지월 詩 '동단산성에 올라'전문
그렇다면, 고구려의 후예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찾을 길이 없다. 한 나라의 흥망과 함께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곳에도 중국 한족들이 살고 있을 뿐 고구려의 후예들을 찾을 길 없다. 조선족이 있다해도 이는 광복전 한반도에서 건너가 이주한 조선민족이니 말이다.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나는 동단산성을 한복판에 두고 한바퀴 빙 돌아나온 셈이다.
마을과 인접한 산밭에는 주로 감자, 콩, 옥수수 따위의 잡곡들과 원추리꽃을 심어놨으며, 길가에는 아무도 손대는 이는 없었지만 대마초가 무성했다. 마을앞에는 철길이 놓여있어 기차가 지나가며 굉음을 질렀는데 송화강 철교를 통해 가로질러 위로는 장춘·하얼빈, 아래로는 돈화·연길·도문으로 이어지는데 그 기적소리는 가버린 역사의 시간을 깨우는 듯이 들렸다. <계속>
주몽의 고향마을로 불리는 '동단산성' 전경.
광개토대왕이 정복한 '용담산성'에서 내려다 본 송화강과 '동단산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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