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1213150304825


려수전쟁 현장중계 4 - 살수대첩

[고구려사 명장면 60]

임기환 입력 2018.12.13. 15:03 


살수의 푸른 물결 굽이쳐 흐르는데

수나라 백만대군이 이곳에서 고기밥이 되었구나

촌부들은 지금도 웃으며 이야기한다

수양제의 헛된 정복의 꿈을


조선 왕조 개국공신인 조준(趙浚)이 명나라 사신과 함께 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백상루에 올라 굽이치는 청천강을 바라보며 읊은 시이다. 고구려의 살수대첩을 떠올린 이 시를 듣고 명나라 사신이 얼굴을 붉히며 그만 붓을 놓고 말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처럼 수의 대군을 격파한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으로 예로부터 끊임없이 환기되어 왔다. 고려 때 귀주대첩, 조선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과 더불어 이른바 3대첩으로 불리기도 하는 살수대첩은 을지문덕이라는 걸출한 인물과 더불어 한국 전쟁사의 첫머리를 차지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민족기록화 살수대첩. 살수에서 을지문덕이 강물을 막아 수공을 했다는 이야기는 역사 기록에는 전혀 없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하는 지역 전승일 뿐이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려수전쟁에서 살수대첩이라는 클라이맥스의 시작은 요동성전투다. 4월 말부터 시작된 요동성 공격이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자, 후방에 있던 수양제는 6월 11일에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여러 장수들을 꾸짖고 직접 공격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나서면 전황이 달라질 줄 알았던 양제도 이제는 초조해진 듯하다. 백만대군을 이끌고 그저 행군만 해도 고구려 왕이 맨발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사죄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압도적인 군세에 고구려 방어망이 절로 무너질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처음부터 요동성이라는 일개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모든 일정이 꼬여버렸다.


양제도 특단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군사들도 지치고 사기가 떨어졌으며, 무엇보다 황제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점점 장마가 다가오고 있어 문제 때 1차 침공의 악몽이 다시 되풀이될까 불안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방어망을 정비한 고구려군이 이제는 자신감을 갖고 사방에서 협공해올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바뀌어갈까봐 걱정스러웠다.


이때 양제는 남소도군(南蘇道軍)을 이끌다가 행군 도중에 죽은 대장군 단문진(段文振)의 제안을 떠올렸다. 일일이 고구려성을 함락하면서 전진할 것이 아니라 이를 무시하고 평양을 직공한다는 전략이었다. 양제는 곧바로 9군단 30만5000명으로 별동대를 구성해 평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는 병법상으로 매우 위험한 전술이었다. 혹 퇴로를 끊기게 되면 별동대가 몰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제는 수십만 대군이 요동성을 포위하고 요동 땅에서 진군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고구려군은 겨우 평양성이나 지킬 뿐이지 감히 별동대의 퇴로를 끊으려는 시도를 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워낙 압도적인 군세였기 때문에 어떤 전술을 구사하든 크게 무리는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럴 경우 별동대의 약점은 바로 보급이었다.


중국 역사책 '자치통감'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하진(瀘河鎭)과 회원진(懷遠鎭)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 동안의 군량을 주고, 또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을 나누어주니 사람마다 3섬 이상이 되어 무거워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려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고 길을 떠났는데, 행군이 겨우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군량이 이미 떨어지려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수의 별동대는 매우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전투병에게 100일의 군량과 각종 무기를 운반케 한다는 것은 사실상 전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위 기록은 아마도 어떤 사실을 은폐하려는 왜곡이 있는 듯하다.


전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나라 각 군단은 전투병과 치중부대를 함께 편성하고 있었다. 이들 별동대를 구성하는 9개 군단 역시 내부에 치중부대가 있었다. 이점은 아래에서 볼 우중문이나 설세웅 군단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치중을 병사 개인이 짊어지게 한 듯한 위의 기록은 아마도 어떤 특수한 상황 변화에 따른 의도적인 왜곡으로 보인다.


이들 9개 군단 30만이 넘는 대군으로 구성된 별동대는 언제 편성되어 평양성으로 직공하기 시작하였을까? 일단 평양성으로 직공하는 별동대를 편성하겠다는 양제의 생각은 자신이 직접 요동성 공격을 지휘하는 6월 11일 이후가 될 것이다. 그것도 양제 자신이 나서면 요동성쯤이야 금방 무너뜨리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터이니, 6월 11일에서 제법 시간이 지난 뒤가 될 것이다. 따라서 별동대 편성을 명령한 시점은 일러야 6월 20일 전후한 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위 '자치통감' 기사는 별동대가 구성되어 노하진과 회원진에서 보급을 받고 출발한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 그래서 맨 후방에 있던 부대가 별동대로 편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평양을 직공하는 이들 부대에 100일치의 식량을 주었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들 별동대의 임무는 평양 직공으로서 빠른 행군이 가장 중요했다. 양제가 별동대에 100일이라는 여유 있는 시간을 주었을 리가 없다.


양제의 생각으로는 별동대가 평양을 공격하면, 고구려군의 총력이 평양 수비로 돌아서게 되고, 이때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방비가 허술해진 요동 땅을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별동대로 편성된 부대가 100일치 군량을 지급받았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아마도 별동대로 구성된 이들 군단은 후방에 있다가 편성된 부대가 아닐 것이다. 수양제의 본군이 회원진, 노하진을 출발할 때 함께 출진했을 것이다. 다만 본군과는 다르게 100일치 군량 등을 부담하고 출발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하는 어떤 전략을 수행하는 임무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나중에 별동대로 편성된 9개 군단에 주어진 임무가 수양제가 이끄는 본군에 앞서서 압록강까지 이르는 여러 교통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추정한다.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다음 사례가 보인다.


우중문(于仲文)은 군사를 이끌고 낙랑도(樂浪道)로 나아갔는데, 군대가 오골성(烏骨城)에 이르자 우중문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쇠약한 말과 당나귀 수천 필과 치중대를 군단의 후방에 배치하여 행군했다고 한다. 또 설세웅(薛世雄)이 지휘하는 옥저도군(沃沮道軍) 역시 압록강으로 가던 도중에 백석산(白石山)에서 고구려군에 포위당했다가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이는 우중문 군이나 설세웅 군이 다른 수나라 군단들과 함께 진군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서로 다른 경로를 이용하여 압록강에 도달하였다는 것은 이들 군단이 애초부터 서로 다른 경로에서 무언가의 작전을 수행했음을 뜻한다.


양제가 별동대를 구성한 것은 본군에 앞장서서 여러 교통로를 확보하는 작전을 수행 중인 9개 군단에 평양 공격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주었음을 뜻한다. 이들은 양제의 명령을 받고 압록강 서안에 집결하였다. 따라서 이들 별동대를 구성하는 군단이 압록강에 집결한 시점은 6월 20일이 넘어서였을 것이다. 이들 군단이 회원진 등을 출발한 시점이 3월 중순이었다면 이미 3개월이 넘었으며, 요동성 공격이 시작된 4월 중순이나 말에 출발하였다고 해도 이미 2개월이 넘어선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출발할 때 갖고 있던 100일치의 군량 중 10여 일에서 많아야 40여 일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래서 평양성을 공격하기에는 군량이 부족하거나 빠듯한 상황이었을 게다. 여기서 수 별동대 지휘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부여도군(扶餘道軍)을 지휘하는 우문술(宇文述)은 군량 부족을 거론하며 진격을 주저하고 있었고, 낙랑도군(樂浪道軍)을 지휘하는 우중문은 진격을 주장하였다. 당시 서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 중인 각 군단의 대장군은 같은 급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명령체계 아래 통솔되기 어려웠다. 우문술(宇文述)이 양제와 사돈간이며, 토욕혼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제1 지휘관이 될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양제의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그 누구에게도 우월한 지휘권을 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문술을 견제하면서 개인적으로 총애하고 있던 우중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서 우중문의 주장대로 별동대는 평양 공격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을지문덕이 결정적인 유인전술을 펴게 되었다. 거짓 항복으로 수의 진중을 살펴본 을지문덕은 의도된 패배를 거듭하면서 수군을 평양성까지 경내 깊숙이 끌어들였다.


이후 을지문덕이 수군을 희롱하는 오언시를 보내고, 고구려의 항복을 명분 삼아 퇴각하는 수의 별동대를 살수에서 크게 격파한 사실은 누구나가 잘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기술하지는 않겠다. "애초에 9개 군 30만5000명이 요하를 건넜는데, 요동성까지 돌아온 자는 오직 2700명뿐이었다"는 중국 역사서의 간략한 기록이 살수대첩이 얼마나 큰 승리였는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우리가 살수대첩의 대목에서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정작 전쟁을 일으키고, 또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수많은 전공을 독차지하는 수양제를 비롯한 지배층들은 멀쩡하게 살아 돌아가고, 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애꿎은 백성들의 가여운 목숨들만이 살수에서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살수대첩만이 아니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고, 오늘날 벌어지는 전쟁도 그리 다르지 않다.


수양제는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별동대의 궤멸을 핑계로 우중문과 우문술 등에게 모든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다시 2차 침공을 준비했다. 살수에서의 패전과 전쟁의 참화에 대한 어떤 반성도 없었다.


전쟁은 그렇게 해서 또 시작되는 법이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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