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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활동의 역사적 의의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 4) 역사적 의의
만주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의 전개는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한민족의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한민족의 5천년 역사에 대한 자긍심은 일제의 기만과 폭압에 의해 말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조선통치가 계속되는 한 항일운동도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만주에서의 항일운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주에서의 운동은 일정한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초기에는 무장투쟁의 형태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 이후 단체통합을 이루면서 1925년경에는 대체로 3부로 통합되었다.
3부는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재만한인의 권익옹호를 위한 자치기관으로서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8년경부터 민족유일당과 3부통합운동을 통해 민족유일대당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일무장투쟁조직과 한인자치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조직을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결국에는 독립된 조국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정당은 소속 당군(黨軍)을 통해 대일항전을 위한 독립군부대의 대본영을 이루면서 동시에 당의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통해 정치적 훈련을 쌓아갔던 것이다.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은 바로 이러한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정당의 기초조직이 되었던 자치기관으로서의 국민부와 한족총연합회 등도 당의 지도를 받게 됨에 따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더욱 고도화되었다.
그러나 만주의 상황적 여건에 의해 당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감소되고 군(軍)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독립운동진영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되자 즉각적인 군사적 대응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및 그 소속 당군은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대규모 항전을 전개하였다. 이는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 함께 대일전을 전개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한·중연합전선의 형성자체가 곧바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아니었으나 여기서부터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한·중합작의 단서가 마련된 것이고 이후의 독립운동 전개과정에서 중국의 호의적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은 각자의 군사조직과 함께 중국관내로 이동했다. 이는 무기·탄약·식량 등의 부족으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보다 중요하게는 대일직접항전을 전개하는 입장에서 한국독립운동진영의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러한 움직임은 만주사변 직후부터 나타났다.註 104 그리고 중국관내에서 민족역량의 총집결을 위해 1932년 말 미주의 동포들까지 포함하여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자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은 여기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1935년 대일전선통일동맹에 의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되자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은 이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 내부에서註 105 김원봉(金元鳳)의 전행적(專行的) 독단이 자행註 106되자 만주의 운동세력은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이탈하여 다시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조선혁명당의 중앙간부에는 만주 한국독립군의 총사령이던 이청천과 만주조선혁명당의 자치위원회 위원장이던 현익철 등이 참여註 107하여 만주운동세력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창당 이후 민족주의 진영의 연합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註 108에 참여하여 임정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에 통합하였으며 1940년에는 광복진선의 3당이 연합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만주의 운동세력이 중국관내로 이동한 이후 민족주의운동 진영의 통합에 힘쓴 것은 그들의 만주에서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즉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전개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공격을 받은 바 있는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계열의 인사들은 계급주의운동에 반대하면서 철저한 민족주의운동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관내에서 조직된 조선혁명당의 1937년도 선언문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선언문에 나타난 요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무산계급혁명은 자본주의국가 내에서는 가능하지만 식민지 망국노(亡國奴) 즉 그 국가·민족의 자유독립을 상실하여 멸망의 길에 들어선 자들에게는 그 국가·민족의 자유독립을 회복하고 망국을 구하는 것이 관건이며 이를 위해 민족해방혁명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식민지민족 대 제국주의민족의 민족적 투쟁이어야 하며 그 투쟁의 경로는 반드시 전민족의 총단결로 민족전선을 강화하고 제국주의민족의 침략세력을 박멸(撲滅)하여 국가민족의 자주독립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계급혁명은 이러한 민족혁명 과정에서 그 국가·민족을 부정함으로써 혁명을 단절·분열시킨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국가·민족의 교주불변(膠柱不變)의 철칙을 부인하고 세계무산계급의 연합을 주장함으로써 민족혁명을 파괴하는 반혁명의 역할을 한다.
* 교주불변(膠柱不變) : 절대 불변
즉 조선혁명당은 계급혁명이 민족혁명을 파괴한다고 보고 한민족 내부에 계급의 분별을 둠이 없이 전민족의 역량을 집중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에서 정규전을 통해 일본군과 싸운 경험을 가진 이들은 관내로 이동한 후 계속 군사활동에 종사하였다.註 109 임정의 건국강령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복국(復國)을 위해서는 국군에 의한 국토의 회복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던 이들은 광복군(光復軍)의 조직에 참여註 110하였다. 광복군이 대한민국의 국군으로 임정산하에 조직된 군대임을 생각할 때 만주의 정당과 군사활동은 관내의 임정과 광복군을 통해 그 맥을 계승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임정은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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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4 1931년 12월에 만주에서 선전공작을 하고 있던 이세영(李世榮)이 상해에 와서 상해 각 조선혁명 단체의 연락을 가질 것을 모의하였다(중국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中國國民政府軍事委員會 政治部, 「십년래적조선반일운동(十年來的朝鮮反日運動)」,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1권 p.78).
註 105 김원봉의 호는 약산(若山)이며 진국빈(陳國斌)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그는 1919년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한 후 만주와 관내 그리고 국내 등지에서 의열활동을 하였다. 1925년에는 중국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이때 교장은 장개석이었다) 이후 중국의 北伐에도 참가하였다. 1933년 10월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의 명의로 설치하여 독립군간부를 양성하였다. 김원봉은 이러한 중국의 원조와 군관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을 기반으로 하여 의열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929년경에는 ML파공산주의자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건설하고 부설기관으로 레닌정치학교를 설립하는 등 공산주의자들과도 관계를 갖고 있었다(카시마 세쯔코/鹿嶋節子, 「김원봉의 사상과 행동(金元鳳の思想と行動)」, 무궁화회 편(むくげの會編), 『조선1930년대연구(朝鮮一九三○年代硏究)』(도쿄/東京 : 삼일서방/三一書房, 1982) ; 박태원(朴泰遠),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백양당/白楊堂, 1947) ; 판공자오(潘公昭) 『영일적한국(令日的韓國)』(중국승학도서의기공사/中國升學圖書儀器公司, 1946) ;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2권, pp.94~95 참조).
註 106 김원봉계의 의열단은 이청천계의 인사들을 특무공작의 명목으로 지방 각지에 파견하여 중앙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당 기관지인 『민족혁명(民族革命)』에 당기로 의열단의 단기를 게재하는가 하면 1937년 1월에 개최된 전당대표대회에서는 김원봉을 총서리로 추대하여 당내의 실권을 장악하였다(카시마 세쯔코/鹿嶋節子, 앞 글, p.99 참조).
註 107 「한국당파지조사여분석(韓國黨派之調査與分析)」,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2권, p.67.
註 108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임정 중심의 인사들이 조직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한(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그리고 미국의 대한인 독립단, 대한인 동지회, 국민회, 애국부인회, 단합회(團合會) 등 3당 6단체의 연합으로 1937년 8월에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약칭 광복진선)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임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임정의 확대·강화로 독립운동진영의 역량통합을 모색하였다(추헌수/秋憲樹, 일제하국내외정당활동(日帝下國內外政黨活動)」, 한국사학회 편(韓國史學會編),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의 제문제(諸問題)Ⅱ』(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87), pp.376~381).
註 109 이청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1933년 낙양(洛陽) 군관학교에 초빙되어 한국군관들을 훈련시켰으며 조선혁명당 군사부장, 임정 군무부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겸 훈련주임 등을 역임하면서 군사활동에 임하고 있었다(「이청천장군약력/李靑天將軍略歴」, 『광복(光復)』제1권 제1기(第一卷 第一期)(1941),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3권, p.207).
註 110 광복군의 간부들 중 총사령관 이청천, 부관장 황학수, 회계장 조경한(趙擎韓), 참모이면서 제3지대장인 김학규, 참모이면서 제2지대장인 공진원(公震遠) 등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인사들이었다(후춘후이 저/胡春惠著, 신승복 역주/辛勝夏譯註, 『중국(中國)안의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단국대학출판부/檀國大學校出版部, 1978),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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