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찾아와 "빼주세요"... 요즘 학생들 사이 생기부 '금기어'
[아이들은 나의 스승] 생활기록부까지 자기 검열하는 참담한 세태
25.01.31 06:50 l 최종 업데이트 25.01.31 06:50 l 서부원(ernesto)

▲자신의 생활기록부(생기부)가 '정치적'으로 해석될까봐 두려워하는 요즘 학생들의 고민은 황당하지만 현실적이다. ⓒ 연합뉴스
"이렇게 적혀있으면 대입에 불리하지 않을까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이런 걱정까지 한다. 자기 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재된 내용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수업 중 자신이 발표한 주제나 호기심에 질문한 내용 등이 자칫 대학의 입학사정관에 의해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겨울 방학 학년별 종업식을 앞두고 학교마다 생기부 점검이 한창이다. 이미 학급과 교과 담임, 동아리 지도 교사의 항목별 기록은 마무리된 상태이고, 지금은 개인별로 누락된 항목이나 오탈자 등을 점검하고 있다. 생기부를 직접 출력해 각자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
한국사 교과 세부능력 특기 사항(교과 세특)을 기록할 때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와 소신 등이 은연중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사 영역의 경우, 광복 후 좌우의 이념 대립과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은 단골 소재다. 이는 수업의 핵심 성취 기준이기도 하다.
교과서엔 북한에 대해 다루고 있고, 아이들의 관심도 비교적 크지만, 웬만해선 생기부에 기록하지 않는다. 재미있게 공부하고 후속 활동을 했어도 생기부에 기록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여긴다. 북한에 관심을 보였다간 자칫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며 너스레 떨기도 한다.
'서슬퍼런' 같은 수식어에도 난색
아이들 사이에서도 '종북'은 '좌파', '반국가 세력'과 동의어로 인식된다. 극우 유튜브에 경도된 경우가 아니라도, 그러한 편견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 한민족으로서 머지않아 통일되어야 할 상대라는 인식은, 적어도 요즘 아이들에겐 없다. 그들에게 북한은 차라리 '금기어'다.
인민, 민중, 노동자, 좌익, 혁명, 투쟁, 계급, 통일. 믿기지 않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국어사전에 등재된 이렇듯 평범한 단어조차 '북한 말'로 여긴다. 이런 말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을 백안시하게 된다고 선선히 말한다. 이를 '종북 세력'의 판별 기준이라고 단언하는 아이도 있다.
하물며 생기부엔 이런 '북한 말'이 포함되면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혹여 들어간 경우, 직접 해당 교사에게 찾아와 다른 단어로 바꾸든가 아예 빼달라고 요청한다. 심지어 '폭압적', '급진적', '서슬 퍼런' 등의 수식어마저 과격하고 부정적인 어감을 준다며 문제 삼기도 한다.
분단의 모순에 기인한 불안이 애꿎은 고등학생들의 생기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생기부에 북한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삽입되어 있으면 화들짝 놀라 득달같이 달려온다. 수업 중 자신이 주장했던 내용이라도 생기부에 기록해선 곤란하다고 말한다.
수업은 수업이고, 생기부는 생기부라는 투다. 생기부가 대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양상이 뚜렷해지는 추세다. 수업 내용을 생기부에 옮기는 게 아니라, 생기부가 수업을 좌지우지하는 걸 넘어 수업과 생기부가 '따로국밥'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북한 말'만의 문제도 아니다. 유신 독재정권의 만행을 지적하는 내용도 생기부에 드러나는 걸 꺼린다. 박정희의 공과를 기록할 순 있으나 서술 분량에서 가급적 50:50으로 균형을 맞춰야 그나마 안심이란다. 성취 기준엔 유신 정권에 맞선 반독재 투쟁을 강조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수업 중 박정희의 공과를 주제로 토론을 진행하면, 공보다 과가 크다는 쪽에 서는 아이들이 다수지만, 생기부만큼은 달라야 한다. 아이들 사이에선 이런 '웃픈' 대입 정보까지 회자된다. 대구, 경북 지역 대학에 진학하려는 경우, 박정희의 과오를 언급하는 건 자해 행위라는 것.
김대중의 공과를 다루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과서엔 유신 독재정권과 전두환의 신군부에 맞선 상징적인 정치인으로 서술되어 있는데도 생기부에 적기엔 께름칙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운동부터 외환위기 극복에 이르기까지 그의 업적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도 이 또한 대입에 해가 될지 모른다며 주저한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풀뿌리 시민단체의 위상과 역할이 커졌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확대됐다는 내용조차 조심스러워한다. 좋든 싫든 노무현과 박근혜의 탄핵 사건과 공과를 비교할 수밖에 없어서다. 노무현과 박근혜 역시 생기부에선 '금기어'다.
교과서 단원마다 숱한 정치인들이 등장하지만, 생기부에선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언론에서 양비론을 펼친 사건들도 함부로 언급해선 안 된다.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3당 합당, 천안함 피격 사건 등을 주제로 토론했다 해도 생기부엔 담을 순 없다.
그러자면, '뒤탈'이 없는 전근대사 영역을 다루는 게 안전하다. 지금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현대사 영역은 어떤 주제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교사가 수업 중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내렸다간 당장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며 치도곤당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맥락도 없고 의미도 모호한 기록이 되고 만다. 교과별 성취 기준에 따라 이러저러한 활동을 했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아이들이 어떤 부분에서 호기심이 생겼고,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게 무엇인지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교사의 평가를 덧붙이기가 어색하다.
"페미 낙인 찍히면 어떡해요" 황당하지만 현실적인 고민
"이 책을 읽었다는 내용을 통째로 빼 주세요. 괜히 '페미'로 낙인찍힐 것 같아요."
급기야 동아리 활동 때 함께 읽고 토론했던 것까지 두려워했다. 내가 지도 교사로 있는 역사 동아리는 현대사 관련 책을 선정해 읽은 뒤 관련 유적지를 찾아 정기적으로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독서와 답사야말로 교실 역사교육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핵심 요소라고 믿고 있다.
올 초 동아리 시간에 도서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를 함께 읽었다.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 14명의 불꽃 같은 삶을 다룬 책이다. 김마리아나 권기옥, 남자현 등 교과서에 언급되는 분들도 있지만, 정정화, 박진홍, 안경신, 김명시, 이화림 등 낯선 이름들이 다수다.
남성 위주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성찰하자는 취지였다. 여성이기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찾아 기억하자는 다짐의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남자현이 영화 <암살>의 모티프가 됐고, 이화림이 영화 <파묘>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이조차 '뒤탈'이 걱정된다며 차라리 삭제해달라는 거다. 제목만 봐도 페미니즘 도서로 여겨질 게 뻔하다며, 만약 대학의 입학사정관이 젊은 남성이라면 득이 될 게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억측이지만, 아이들에겐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수험생들의 불안이 시나브로 팽배하자 교사도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좌우의 이념 성향 등 사회적 논쟁거리가 될 만한 건 생기부에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묵시적으로 합의한 모양새다. 수업 때도 '긁어 부스럼'이라면서 논쟁거리를 애써 피하려는 교사가 적지 않다.
생기부에까지 '자기 검열'의 메커니즘이 작동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부풀리기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었는데, 이쯤 되니 사소해 보일 정도다. 대입에 대한 불안이 최근 이념적 양극화의 바람을 타고 생기부, 나아가 우리 교육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불면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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