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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무현 때리기’, 그 숨은 셈법은?
기묘하다. 총선 구도가 완전히 ‘노무현 선거’로 짜이는 모양새다. 전직 장관과 대통령까지 나서 ‘노무현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MB 심판’이라는 선거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는 여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기사입력시간 [234호] 2012.03.14  08:56:59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기묘한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새누리당은 노무현을, 민주통합당은 이명박을 애타게 찾는다. 선거의 양대 변수인 인물과 구도 중에 구도 싸움이 먼저 붙었다. 공천이 끝나고 본격 인물 대결에 들어가기 전까지, 총선 전반전 우세를 잡으려는 샅바싸움이 치열하다.

2월20일을 기점으로, 새누리당은 ‘노무현 찬반론’으로 총선 구도를 잡았다. 야권 중에서도 친노 진영과의 각 세우기가 전방위로 진행됐다.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소속 의원들은 물론, 전직 장관과 공공기관에 이명박 대통령까지 사실상 직접 나서는 전면전이다. 보수 언론도 지원 사격을 개시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여권에서도 일종의 금기였던 ‘노무현 때리기’를 3년 만에 다시 꺼내든 것이어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총선 지원에 나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앞줄 왼쪽)이 2월24일 부산 동래우체국을 방문해 집배원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 위원장은 2월20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스스로 자신을 폐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국민의 심판을 받은 분들이 지난 정권 정책을 두고 자꾸 말을 바꾼다”라며 친노 진영을 정면 겨냥했다. ‘폐족’은 2007년 대선 패배 직후 친노 핵심인 안희정 현 충남도지사가 사용한 표현이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2월22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 이해찬 전 총리,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를 실명 비판해 파문이 일었다. 세 사람 모두 친노 진영을 대표할 만한 인사다.

노무현 이어 문재인이 타깃

마침 대검 중수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의 미국 아파트 매입 자금 출처를 뒤진다는 보도가 나왔다. 2009년 노 전 대통령 서거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사건을 다시 쥐고 흔드는 꼴이다. 2009년 수사를 총지휘한 김경한 전 법무부 장관은 2월28일 대검 중수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수사 종결은 노무현 전 대통령 본인에게만 해당할 뿐 가족은 아니라는 취지로 말해 검찰에 ‘대응 논리’까지 제공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왼쪽)이 부산 보훈병원을 방문해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사IN 백승기

친노 진영의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인 문재인 후보(부산 사상)도 타깃이 됐다.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 시절 측근 비리를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라며 군불을 때던 새누리당은, 3월1일에는 문 후보를 직접 겨냥하고 나섰다. 부산의 현역 의원인 이종혁 의원은 “문 후보가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2003년 금융감독원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있다. 부산저축은행 구명 로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라”며 공세를 폈다. 구체적 물증은 제시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2월22일 부산에서는 수자원공사가 발표도 되지 않은 문재인 후보의 하구둑 개방 공약을 미리 알고 반박 자료까지 내는 ‘사고’도 터졌다. 문재인 후보 캠프 핵심 관계자는 “내부에서도 몇 명만 알던 내용이 수공에까지 흘러들어갔다. 수공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해 ‘윗선 개입 의혹’을 시사했다. 

보수 언론도 나서서 선거 구도를 노무현 찬반론으로 몰고 간다. <중앙일보>는 3월1일자에 “총선 구도, MB 심판론서 ‘노무현 vs 박근혜’로 이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여권이 열흘간 밀어붙인 프레임을 제목으로 뽑았다. 민주당 공천 과정에서 친노 출신이 약진한다는 기사도 단골 메뉴다.

이 정도면 숨 가쁠 정도로 전방위적이고 노골적인 ‘노무현 선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 이슈로 등장하는 건 여권에 유리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인기가 바닥이던 노 전 대통령 퇴임 직후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권은 기꺼이 ‘노무현 선거’를 핵심 전략으로 내세운다. 왜 그럴까.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이 3·1절 기념식에서 박근혜 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단을 향하고 있다. 중도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 새누리당 서울지역 의원은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인용해 이런 답변을 내놓았다. “코끼리를 생각 안 하려고 노력하면 머릿속에 코끼리밖에 안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MB를 지워야 한다고 공천이니 정책이니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럴수록 유권자는 이번 총선이 MB 심판 선거라는 야권의 프레임을 수용하게 된다. 유일한 돌파구는 아예 딴 얘기를 해버리는 거다.” 그게 노무현이라는 말일까? “그렇다. 물론 ‘노무현 선거’도 우리가 유리하지는 않다. 하지만 ‘MB 선거’보다는 확실히 낫다.”

즉, 총선이 정권심판론으로 흘러가면 참패를 피할 방법이 없다는 위기감이 높은 국면에서, 아예 이슈를 돌려놓는 시도라는 의미다. 앞서의 의원은 “노무현이 중요한 게 아니고, MB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요즘 이상득·최시중·박희태 기사 본 적 없지?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성공이다”라고 덧붙였다.

‘탈MB’의 한 축이 노무현 공세라면, 다른 한 축은 MB맨 공천 탈락이다. 하지만 섣불리 ‘공천 학살’을 했다가는 집단 탈당·무소속 출마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온다. 2008년 총선에서 친박연대의 맹활약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박근혜 위원장이니만큼, 이 시나리오의 위험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평이다. 즉, 박 위원장은 공천에서 MB 색채를 덜어내면서도 집단 탈당은 주저앉히는 모순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재오 공천을 보는 친박계의 느긋함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었다. 2월27일, 새누리당 공천위와 비대위가 정면충돌했다. 공천위는 서울 은평을에 이재오 의원을 공천하자고 한 반면 비대위는 MB 색채가 지나치게 강하다며 반대했다. 이에 정홍원 공천위원장은 비대위 의결을 기다리지 않고 회의장을 나가 이재오 의원이 포함된 공천 명단을 발표해버렸다. 비대위가 공천위에 재의를 요구했지만, 공천위는 4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재의결을 했다. 박근혜 위원장은 비대위 표결에 기권했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비대위원직 사퇴를 시사했다가 며칠 후 거둬들였다.

이번 총선에 나서는 이재오 의원, 박영준 전 차관, 나경원 전 의원,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왼쪽부터). ⓒ뉴시스

여기까지만 보면 당내 두 핵심 기구가 충돌하고 박근혜 위원장이 이를 조정하지 못한 무기력한 그림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날 새누리당 친박계의 표정은 느긋하기까지 했다. 한 수도권 친박계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더 싸웠어도 좋았을 뻔했다. 이재오 공천을 쉽게 주면 쇄신 의지를 의심받고, 그렇다고 경쟁력이 높고 결격사유가 없는 이 의원마저 자르면 친이계는 몰살한다는 신호가 된다. 당내에서 이견은 이견대로 나오고, 결국 진통 끝에 공천은 가져가는 그림이 최선이다.” 그는 ‘사전 각본설’까지는 사실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후적 해석일 뿐이라고 했지만, 당시까지 사퇴 의사를 보이던 김종인 비대위원이 결국 잔류할 것이라는 데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탈MB’와 ‘요란한 대(對)노무현 공세’라는 두 축이 MB 심판론에 대응하는 여권의 선거 전략으로 구체화하자, 민주당에서도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박근혜 위원장은 물론 검찰과 공기업과 선관위와 대통령 본인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우리는 정권 차원의 컨트롤 타워가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3월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박영선 최고위원은 “정권 차원의 선거 개입이 이미 시작됐다. 검찰의 노정연씨 수사가 기사화되면서 보수 언론에서 정수장학회, 내곡동 땅 사건 기사는 아예 사라졌다”라며 선거 개입론을 공개 주장했다. 

정권 차원의 선거 개입론 공세는 새누리당이 무대 뒤로 감추려 하는 MB를 다시 전면에 불러내어 정권 심판론을 자극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노무현 때리기는 정치공세이고 유권자도 염증을 느낀다. 반면 MB 심판론은 지난 4년의 삶에서 나온 결론이다. 잠깐 이슈에서 사라진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문재인 후보 진영, 당분간 무대응

친노 진영 전체의 컨트롤 타워 격인 문재인 후보 측은 노정연씨 의혹 등 여권의 공세에 당분간 무대응 원칙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이슈를 선거의 중심으로 끌고 오려는 여권의 셈법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친노 진영 일각에서는 “불행하게 간 대통령의 가족까지 괴롭히면서 저런 식으로 ‘본색’을 드러내주면 유권자들이 더 쉽게 판단할 수 있지 않겠나”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권재진 법무부 장관이 3월2일 국회에서 노정연씨 아파트 문제 등과 관련해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일부 언론의 보도와 달리, 부산·경남 친노 후보들이 집단 출마한 ‘낙동강 벨트’에서도 ‘대박근혜 전략’보다는 ‘대이명박 전략’을 먼저 내세운다. 문재인 캠프가 낙동강 벨트 공동명의로 발표를 준비하는 공약은 낙동강에 건설한 보 8곳이 수질을 떨어뜨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강 하류에 위치한 부산은 전통적으로 수질 이슈에 민감하다). 이는 결국 4대강 사업을 정면으로 겨누게 될 것이라고 캠프 핵심 관계자는 귀띔했다. 문재인 캠프가 공약 발표도 하기 전에 수공이 반박 자료를 내 선관위 조사까지 자초한 내용도 이 대목이다. 

문재인 캠프 좌장 격인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이번 총선의 기본은 언제나 MB 심판론이었다. 이건 끝까지 흔들릴 이유가 없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부산일보> 노조와의 면담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문 후보가 트위터에 쓴 것이 예상 이상으로 큰 전국 이슈가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후보가 정수장학회 논란을 전국 이슈로 촉발시켜 박 위원장과 각을 세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번 총선 전체를 ‘문재인 대 박근혜’ 구도로 끌고 가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더 확실한 카드인 MB 심판론이 있기 때문이다. 

단, 이것은 전국 구도에서다. 국지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총선 최대 승부처 중 하나로 꼽히는 낙동강 벨트는 박근혜 위원장의 위력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두 석도 제대로 장담하기 힘든 지역이다. 문재인 후보는 사실상의 정치 데뷔전이었던 지난해 10월 부산 동구청장 선거에서, 부산을 두 번이나 찾은 박근혜 위원장에 밀려 참패한 기억도 있다. “낙동강 벨트 지역만 따로 떼어 본다면, 결국 박근혜를 넘지 않으면 승리도 없다.” 이호철 전 수석의 말이다.

공천 과정에서 이렇다 할 쇄신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민주당으로서도 부담이다. 자기 혁신 없이 반MB 정서에만 기댄다는 비판도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현직 의원의 생존율이 높다는 말도 끊이지 않는다. 강철규 공천심사위원장이 “민주당이 초심을 잃었다”라며 ‘일일 파업’을 선언하는 등 공천 갈등도 불거져 나왔다.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한 의원은 “전투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전리품 배분부터 하고 있다. 동서고금 전쟁사를 봐도, 늘 이러다가 역습당한다”라고 말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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