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唐代)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는 ‘都護府(도독부, 현재 요양)에서 동북으로 고개모(故蓋牟)·신성을 지나고, 다시 발해장령부(渤海長岭府)를 지나 1,500리에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개모(盖牟), 신성은 동일 교통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즉 『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령영주도(長岭营州道)”의 중간 부분이고, 상대적인 지리적 위치도 동북방향으로 차례대로 전개됨. 신성에서 혼하 하곡(渾河河谷)을 따라 동북쪽으로 휘발하곡(辉发河谷)으로 들어가서, 발해장령부(渤海長岭府, 지금의 吉林省 桦甸苏密城/화전소밀성)로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 것임.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고이산성은 고구려의 신성임이 분명함. 당(唐)이 고구려를 평정한 후에는 도독부가 설치되었음.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는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 세워 통솔하도록 하며 그 거사(渠師)는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는다. 설인귀(薛仁貴)가 병사 2만을 이끌고 안동부(安東府)에 주둔하였다. 상원(上元) 3년 2월에 안동부를 요동군고성(遼東郡故城)으로 옮겼다. 의봉(儀鳳) 2年(677)에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음. 고이산성이 안동도호부의 이천지(二遷址)가 되는 것으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진(重镇)임을 반영한 것임.
馮永謙(1997)은 고이산성을 신성으로 추정함. 고이산성 서남에 있는 여러 줄의 참호는 『구당서』고려전의 ‘당군이 신성 서남으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산에 의지하고 책(柵)을 세웠다’라는 기록과 부합함. 『신당서』지리지에는 ‘도호부에서 동북으로 고개모(故蓋牟)·신성을 지나고, 다시 발해장령부를 지나 1,500리의 발해왕성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음. 도호부는 요양시로 추정되는데, 요양시에서 동북쪽에 있는 심양시 탑산산성이 개모성으로 추정되고, 동북쪽에 고이산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신성을 고이산성에 비정할 수 있음.
당대(唐代)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는 ‘都護府(도독부, 현재 요양)에서 동북으로 고개모(故蓋牟)·신성을 지나고, 다시 발해장령부(渤海長岭府)를 지나 1,500리에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개모(盖牟), 신성은 동일 교통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즉 『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령영주도(長岭营州道)”의 중간 부분이고, 상대적인 지리적 위치도 동북방향으로 차례대로 전개됨. 신성에서 혼하 하곡(渾河河谷)을 따라 동북쪽으로 휘발하곡(辉发河谷)으로 들어가서, 발해장령부(渤海長岭府, 지금의 吉林省 桦甸苏密城/화전소밀성)로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 것임.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고이산성은 고구려의 신성임이 분명함. 당(唐)이 고구려를 평정한 후에는 도독부가 설치되었음.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는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 세워 통솔하도록 하며 그 거사(渠師)는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는다. 설인귀(薛仁貴)가 병사 2만을 이끌고 안동부(安東府)에 주둔하였다. 상원(上元) 3년 2월에 안동부를 요동군고성(遼東郡故城)으로 옮겼다. 의봉(儀鳳) 2年(677)에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음. 고이산성이 안동도호부의 이천지(二遷址)가 되는 것으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진(重镇)임을 반영한 것임.
馮永謙(1997)은 고이산성을 신성으로 추정함. 고이산성 서남에 있는 여러 줄의 참호는 『구당서』고려전의 ‘당군이 신성 서남으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산에 의지하고 책(柵)을 세웠다’라는 기록과 부합함. 『신당서』지리지에는 ‘도호부에서 동북으로 고개모(故蓋牟)·신성을 지나고, 다시 발해장령부를 지나 1,500리의 발해왕성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음. 도호부는 요양시로 추정되는데, 요양시에서 동북쪽에 있는 심양시 탑산산성이 개모성으로 추정되고, 동북쪽에 고이산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신성을 고이산성에 비정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