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09740001
39역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신라도에 있던 39개의 역
강동 24개돌유적
일반정보
발해와 신라의 상설교통로인 신라도에 있던 39개의 역을 말한다.
전문정보
발해와 신라의 상설교통로인 신라도에 있던 39개의 역을 말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와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조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따르면, “발해국의 남해・압록・부여・책성의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다. 신라 천정군에서 책성부까지 39역이 있다(渤海國南海鴨淥扶餘柵城四府 並是高句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 凡三十九驛)”라고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책성부가 추성부(橻城府)로 표기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은 고구려 이래 사용하던 명칭으로, 신라 경덕왕대에 정천군(井泉郡)으로 변경하였던 곳이며 오늘날 함경남도 덕원(德源)이다. 책성부(柵城府)는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오늘날 길림성(吉林省) 혼춘시(琿春市) 팔련성(八蓮城)을 말한다.
『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조에 “용원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도이고, 남해는 신라도이다. 압록은 조공도이고, 장령은 영주도이며, 부여는 거란도이다.(龍原東南瀕海日本道也 南海新羅道也 鴨淥朝貢道也 長嶺營州道也 扶餘契丹道也)”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발해에는 5개의 중요한 교통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삼국유사』와 『신당서』에 따르면, 신라 천정군에서 (발해의) 남해를 경유하여 발해의 동경에 이르는 39개 역이 있는 이 길을 신라도(新羅道)라고 하였다. 신라도는 높은 산들이 이어지고 지세가 험하여 매우 험한 교통로라고 할 수 있다.(王承禮, 1984) 이러한 신라도에서 발해 24개돌유적인 두만강 유역의 마패, 석건평, 함경북도 지역의 회문리, 동흥리, 송평구역 5곳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삼국유사』와 『신당서』에서 전하는 신라도 중 (남경)남해부에서 동경(용원부)에 이르는 39개의 역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리대희, 1991)
24개돌유적은 발해의 5개 주요교통로 가운데 영주도, 조공도, 신라도의 일부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발해의 역참(驛站)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방학봉, 2000) 그러나 24개돌유적에 대해 아직 발굴 조사가 행해지지 않았고, 그 성격이나 연대 등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역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24개돌 유적은 발해의 주요교통로와 일치하며, 각 유적간의 거리가 30km정도로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점, 주변경관이 수려한 곳에 위치한 점, 유적의 건축적 특징과 규모가 유사한 점 등으로 볼 때, 공적(公的) 목적으로 조영된 건물임은 틀림없다고 본다.(이병건, 2003)
참고문헌
王承禮, 1984, 『渤海簡史』, 黑龍江省人民出版社.
리대희, 1991, 「발해의 력참로」『력사과학』1991-3.
방학봉, 2000, 『발해의 주요교통로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이병건, 2003, 『발해 건축의 이해』, 백산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 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24개돌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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