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만주에서의 한인 정당과 군사조직"에서 "한국독립군"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2)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조직과 활동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 2) 만주에서의 한인 정당과 군사조직
 
 
만주에서의 한국독립당에 대한 자료는 아주 적다. 당의 강령이나 선언문도 아직까지 발견된 바가 적으며 특히 만주사변 이전의 당이나 군의 활동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일본측의 기록들은 한국독립당 자체를 부인할 정도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북만주에서의 한국독립당이 비밀결사적 조직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자인 김좌진이 무정부주의 세력을 포용하고 여기에 공산주의자들과의 파쟁이 발생함에 따라 그 활동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김좌진과 무정부주의 세력과의 연결은 한족총연합회에서 나타난다. 만주에서 조직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의 책임비서 김종진(金宗鎭)이 김좌진의 재종제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하겠으나 독립운동 중의 많은 파쟁이 그를 무정부주의에로 주목하게 하였다고 보여진다. 김종진은 김좌진에게 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에 깊은 뿌리를 박아야 한다고 하여 농촌 자치조직의 계획안을 제시한 바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농민의 조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자신의 필요에 따라 서로 단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발적·창의적 조직이야 말로 공고한 투쟁체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니, 종래의 교포들의 조직이란 것은 일부 식자간(識者間)에 결속된 것이어서 대중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력있는 저항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혹 농촌조직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도자들 중심의 것으로 실생활과 직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명칭은 어떠했든지 사실에 있어서는 농민자신들의 조직은 아니었다.註 065
 
라고 자치조직을 강조하였다. 김좌진은 이 계획안을 기초로 하여 한족총연합회를 구성하였는데, 조직 자체의 안전보장과 항일무력투쟁은 종래의 신민부 세력이 담당하고 재만동포의 사회적 조직과 대내외의 정신적 무장은 무정부주의연맹이 담당하게 하였다.註 066
 
이때의 한족총연합회의 조직 대강은 한족총연합회로 하여금 재만한족의 정치적·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항일 구국 완수를 위해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안으로 
① 교포들의 집단정착사업 및 유랑방지와 집단부락 촉성, 
② 영농지도와 개량·공동구판매·상조금고설치를 목적으로 하는 협동조합사업, 
③ 교육·문화사업·소·중학의 설립운영·각 부락 자치제의 연락·생활개선 및 기술지도 등을 위한 정기기관지 간행·순회강좌·순회문고·성인교육과 장학제도 
④ 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 군사훈련, 
⑤ 중학 출신자로서 군사간부 양성을 위한 군사 교육기관의 설립·운영, 
⑥ 항일 게릴라 부대의 교육·훈련·계획·지휘와 지방 치안을 위한 지방자치단체 소속의 치안대 편성·지도를 위한 통솔부의 설치 
등을 정하였다.註 067
 
그러나 김좌진장군 피살사건註 068에서 나타나듯이 이 시기에는 국내외에서 아나키즘운동자들과 공산주의운동자들 간에는 충돌이 빈번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세력확장 과정에서 무력충돌까지 나타나게 되었다.註 069 당시의 중국 신문註 070에 의하면 만주에는 200만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친일파·안분(安分)파·독립당·공산당으로 분류되었으며 이들 간에는 상쟁이 계속되었다. 이 때 소련은 한인공산당을 이용하여 북만 적화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 백력(伯力)에서 원동공산당대회(遠東共產黨大會)를 개최하고 치타〔赤塔〕에 원동적화정책실시위원회(遠東赤化政策實施委員會)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김로포(金魯布)에게 20만원을 추진경비로 주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 백력(伯力) : 하바롭스크 Хаба́ровск, Khabarovsk
* 치타〔赤塔〕 : Чита, Chita
 
이와 같이 소련이 만주의 한인을 이용한 이유는 
첫째, 한교들은 모두 일본의 압박에 의해 만주에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중국인들보다 혁명정신과 반항정서가 많았고, 단결만 한다면 20만의 장정은 족히 소집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둘째로는 한인들이 일본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 유랑생활을 하며 경제가 곤궁하나 은혜와 의리로써 단결하고 금전으로 준비한다면 생명을 걸고 계획을 추진할 것
이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한국독립당을 파괴하고 그 권위를 실각시키며 단체를 해산시키고, 이와 병행하여 독립당의 수령을 암살하기로 하였다. 1930년 7월 중순에는 180여 명의 한인 공산당이 합수선(哈綏線) 해림참(海林站)의 한국독립당 본부를 습격하였다. 이를 영안현의 중국군이 알고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는데 이후 독립당과 공산당의 알력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제측의 자료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파쟁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 관헌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한인민족주의자들을 이용하였으며 이에 민족주의자들은 무고한 한인을 체포하고 많은 액수를 수뢰(收賂)하였다는 것이다.註 071 그러나 일제측의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바도 적지 않다. 우선 일제측은 한국독립당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한국독립당의 표현기관인 한족농무연합회의 결성 연도에 대해, 김좌진 사후 한족연합회 군사부 별동대원들이 1930년 4월 하순에 산시참(山市站)에서 결성했다註 072고도 하며, 1930년 말까지 한족총연합회는 해림에 근거를 두었으나 간부들의 무능 주민반감 등에 의해 1931년 1월에 해체되고, 박래춘(朴來春)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이것이 3월에는 농민당(農民黨)으로 이후에는 테러단으로 조직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註 073고 보고 있다. 즉 일제의 정보망으로 제대로 추적이 곤란할 정도로 한국독립당은 비밀을 유지했다고 생각되며 이에 따라 일제측은 한인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에서 조직적 연계성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한족총연합회의 간부인 남대관과 권수정(본명은 이종녕/李宗寧) 등은 중국측과 협력하여 공비토벌에 나선 것도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나 그 이외의 활동들에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권수정은 1930년 4월에 길림 우마행에서 민생의원(民生醫院)을 개업하였으며 여기에 남대관도 참여하여 민족운동 기관을 준비하기 위해 우마행에 길림신보주비처(吉林新報籌備處)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무장대오를 유지하면서 친일 주구배들에 대한 응징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한국독립당 계열의 인사들이 중심적 활동으로 삼은 바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이후의 한·중관계로 이 사건이 일본인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중국의 배일사상을 고양시키는 한편 한·중연합전선의 토대를 형성하였다.註 074 
 
만보산사건 이후 발표된 만주 한인단체의 「중한 민중에게 고하는 글」〔告中韓民衆書〕註 075에서는 일제의 음모를 잘 폭로하고 있다. 일제는 
① 중·한 양민족의 친선결합을 파괴하고 
② 만주 한교의 혁명세력을 파괴하며 
③ 한교로 하여금 만몽침략의 선구가 되게 하는 등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군사출동의 구실을 찾기 위해 중국인의 만철(滿鐵) 회수운동을 방지하고 중국내에 영사재판권을 연장할것·일화(日貨)의 수입면세권 획득·상조권(商租權)의 실현·이간선(二幹線) 실시·동북 철도정책 파괴·동북 질서유지권 탈취 등의 구체적 정책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중·한 양민족의 혁명역량을 단결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한·중 양민족을 이간시키려던 일제의 음모는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에 의해 여실히 폭로되고 오히려 한·중 양민족의 대일 공동전선을 형성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註 065 이을규(李乙奎), 『시야, 김종진전(是也, 金宗鎭傳)』(1967), p.56.
註 066 김창순(金昌順), 「한국독립군(獨立軍) 결성 전야(前夜) : 만주(滿洲)·노령(露領)에서의 투쟁(鬪爭)」, 『한국일보』, 1987년 4월 29일자.
* 노령(露領) : 러시아 영토
 
註 067 한국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韓國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 『한국(韓國) 아나키즘운동사(運動史)』(형설출판사/螢雪出版社, 1980), p.325.
 
註 068 사건 초기 중국 측의 신문은 이를 일본인(日本人)에 고용된 한인(韓人)의 소행이라고 전하고 있다. 『시보(時報)』(1930년 2월 8일자),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583.
 
註 069 한국무정부주위운동사편찬위원회(韓國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 앞 책, pp.328~330.
 
註 070 여기서 한국독립당이란 명칭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독립당은 신민부로써 대본영을 이루었다. 이들은 동철(東鐵), 합수선(哈綏線)을 활동구역으로 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독립당이란 신민부 군정파에 의한 한국독립당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북만한당호상탄병(北滿韓黨互相呑併)」『중앙일보(中央日報)』(난징/南京, 1930년 8월 4일자),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p.1585~1586).
* 동청(东清/東淸) 합수선(哈綏線) : 하얼빈(哈尔滨/哈爾濱)-수이펀허/수분하(绥芬河/綏芬河)의 동청/중동철도/중동선
 
註 0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600.
註 072 주 71)과 같음.
註 07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609.
註 07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593.
註 075 「만주(滿洲) 한교단체(韓僑團體)의〈고중한민중서(告中韓民衆書)〉」, 『중앙일보(中央日報)』(난징/南京, 1931년 8월 1일자),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590.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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