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43101700001
옥저 (삼국유사)
백두산이야기
저술자 : 일연
기록일 : 미상
옥저는 『삼국지』·『후한서』등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서는 동옥저(東沃沮) · 북옥저(北沃沮) · 남옥저(南沃沮)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에서도 말갈발해(靺鞨渤海)조에서 동명제(東明帝) 즉위 10년에 북옥저(北沃沮)를 멸하였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는 남옥저(南沃沮)의 20여 가(家)가 백제에 와서 항복하였으며, 혁거세(赫居世) 52년에는 동옥저(東沃沮)가 와서 말을 바쳤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삼국지』동이전에서는 동옥저에 대하여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고, 큰 바다에 접하여 살고 있다. 지형은 동북은 협소하고, 서남은 길며 사방 1,000여리인데, 북으로는 읍루(挹婁) · 부여(扶餘)와 접하고, 남으로는 예맥(濊貊)과 접하고 있으며 호(戶)는 5,000이다. (『삼국지』 권 30, 위서 30, 동이열전 30, 동옥저전)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후한서』 동이전에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고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접하고, 북으로는 읍루(挹婁) · 부여(扶餘)와 접하며, 남으로는 예맥(濊貊)과 접하고 있는데, 그 땅은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다.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75, 동옥저전)
하고 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학계의 일반적 견해는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다’라는 『후한서』의 기록을 취하고 있다. 위의 두 기록에서는 모두 이들의 언어와 음식 · 거처 · 의복 · 예절은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로 볼 때 이들은 고구려의 별종(別種)으로 파악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부여와도 같은 계열의 종족임을 알 수 있다. 또 남 · 북옥저에 대하여는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漊)라고 하며, 남옥저(南沃沮)와 800여 리 떨어져 있다. 풍속은 남 · 북옥저가 동일하고, 경계는 남쪽으로 읍루(挹婁)와 접하고 있다. (『삼국지』 권 30, 위서 30, 동이열전 30, 동옥저전)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옥저는 한(韓)과 같이 3개로 분열되어 3옥저(三沃沮)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은 동옥저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북옥저의 경우에는
북옥저(北沃沮)는 읍루(挹婁)를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산골짜기나 깊은 동굴 속에 살면서 이들을 수비하였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막히면 촌락에 내려와 살았다. (『삼국지』 권 30, 위서 30, 동이열전 30, 동옥저전)
라는 간단한 기사만 전하고 있다. 또 남옥저는 북옥저의 경계를 설명하는 관정에서만 보이고 있어 이들이 생활상이나 사회상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삼국지』나 『후한서』에서 주로 동옥저를 위주로 서술하고 있음을 볼 때 당시 중국의 관심은 동옥저에 있었고, 남 · 북옥저는 그들의 이해에서 소외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사서에 나오는 동옥저를 중심으로 당시 정치 · 사회상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동옥저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시대에는 독립된 통치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이 나라를 건국하자 이에 복속되었고, 한(漢)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자 옥저성(沃沮城)은 현토군에 편입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이맥(夷貊)의 침입으로 군(郡)을 구려(句麗)의 서북으로 옮기면서 옥저는 낙랑에 속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 한(漢)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영(嶺) 동쪽의 7현을 다스리게 되자 이때 옥저도 모두 현(縣)이 거수(渠帥)로 현후(懸侯)로 삼아 이들을 후국(侯國)으로 하였으나 얼마 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이곳의 대인(大人)을 뽑아 주자(主者, 『후한서』에는 使者로 기록됨) 로 삼아 통치하도록 하였고, 또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부(租賦) · 맥포(貊布)와 어염(魚鹽)등의 해중식물(海中食物)을 1,000리 밖에서부터 지고 와서 공급하게 하였으며, 미녀(美女)를 바치게 하여 비(婢)나 첩(妾)으로 삼았다.
옥저의 정치제도에 대하여는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전 에서
1) 대군왕(大君王)이 없고 대대로 읍락에는 각기 장수(長帥)를 두었다. 언어는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다(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高麗大同 時時小異). (『삼국지』 권 30, 위서 30, 동이열전 30, 동옥저전)
2)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渠帥)는 스스로 삼노(三老)라 칭하였는데, 이것은 옛날 형국(縣國)의 제도이다(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삼국지』 권 30, 위서 30, 동이열전 30, 동옥저전)
라는 단편적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 1)의 기록을 볼 때 동옥저는 발전이 늦어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각 읍락에는 장수(長帥)가 있어 독자적으로 통치권을 행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주권을 빼앗기게 되자 이들은 현토군에 예속 되었고, 이로써 지금까지 독자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였던 장수들은 현후(懸侯)가 되어 한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A.D.30년에 한나라가 이곳을 포기하자 이들 장수들은 거수(渠帥)라는 명칭으로 존립하였는데, 위 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들 거수들은 삼노(三老)라 칭하면서 읍락을 통치하였고,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옥저는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의 생산에 알맞았고, 특히 밭농사를 주로 하였다. 또 산을 뒤로 하고 바다를 향하여 주거를 정하였으며, 성격이 강용(彊勇)하여 창을 주로 하는 보전(步戰)에 능하였다.
결혼제도로는 예부제(豫婦制)가 있었는데, 일명 민며느리제라고도 한다. 장법(葬法)은 목곽(木槨)을 쓰며, 처음에는 임시로 매장을 하였다가 가족이 죽어 성원이 되면 새로운 목곽에 이장하여 정식 장례를 치렀다. 또 시체는 강가에서 깨끗한 물에 씻어 뼈만 추려 안치하였다. 이로써 이 장법을 가족 공동 묘라 하기도 하고, 일명 세골장(洗骨葬)이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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