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1003150313187
'황제천칸'이 된 당 태종, 고구려를 넘보다.
[고구려사 명장면 80]
임기환 입력 2019.10.03. 15:03
626년 7월 2일 아침, 이세민은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일대 거사를 일으켰다. 황제의 부름으로 입궐하는 형 태자와 동생을 처단한 것이다. 태자의 입궐 자체가 이세민의 책략에 의한 것이고, 거사 후 아버지 고조는 거의 구금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왕위 계승을 노린 쿠데타였다. 3일 후에 이세민은 황태자에 책봉됐고, 두 달 뒤 8월 9일에는 아버지로부터 양위받아 황제에 올랐다. 그가 당 태종이다.
사실 왕위에 오르기까지 이세민의 행적은 새 왕조 당의 건설 과정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태원유수로 있던 아버지 이연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긴 인물이 둘째아들 이세민이다. 이연은 덕망은 있었지만 결단력이 부족했다. 그 결단력을 이세민이 대신한 것이다. 617년 이연과 이세민 부자는 군사를 일으켜 수도 장안(長安)으로 진격했다. 당시 여러 군웅들이 낙양(洛陽)을 놓고 자웅을 겨루는 동안, 이세민은 수도 장안이 갖는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무엇보다 수왕조를 잇는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장안을 차지한 이연은 518년 수를 대신하여 당 왕조를 세우고 황제에 올랐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이세민이었다. 그때 나이 고작 열아홉이었다.
그 뒤에 중국 땅 전역에서 세력을 펼치던 많은 군웅들을 상대하여 굴복시킨 인물도 이세민이었다. 621년에 왕세충, 두건덕을 패배시켜 낙양을 차지하였고, 623년에 하북의 유흑달을 굴복시키고, 624년 강회 지역을 차지하여 중원 통일을 거의 마무리 지었다. 그 공훈으로 천책상장(天策上將)이란 자리에까지 오른 이세민은 마침내 '현무문의 변'으로 황제에 오른 것이다.
이렇듯 결단력과 책략, 군사적 재능과 야심을 두루 갖춘 29살 젊은 황제는 이제까지보다 더 큰 야망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제 고구려 영류왕은 그런 당 태종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당 태종 초상 /사진=바이두
물론 당 태종 앞에 놓인 현실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중국의 내란을 틈타 다시 강성해진 돌궐(突厥)을 견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통일전쟁 동안 화북의 많은 지방 세력은 돌궐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처음 거병하였을 때 당 고조 이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연은 "만일 장안에 입성하게 되면 토지와 백성은 당에게 돌리고, 금·옥·비단은 돌궐에 돌리겠다"고 공언하는 실정이었다. 실제로 당 건국 초기에 돌궐은 사신을 장안에 파견해 재물을 거두어 갔고, 한편으로는 다른 할거세력으로 하여금 당을 견제케 조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원의 혼란에 편승한 돌궐의 우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중원의 통일을 완성한 당은 628년 이후 본격적으로 돌궐과 대결해 갔다. 게다가 동돌궐의 힐리 칸(頡利可汗·620~630년 재위)은 계민 칸(啓民可汗)과 내분을 벌이고 있었고, 627년에는 돌궐에 예속되어 있던 철륵(鐵勒)·설연타(薛延陀)·회흘(回紇) 등이 모두 반기를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627년 혹한으로 인한 대규모 가축이 죽는 조드가 발생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629년 11월 조카 돌리의 반란으로 힐리 칸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기회를 엿보던 태종은 630년 정월, 이정(李靖)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동돌궐을 공격하게 하였다. 기고만장하던 힐리 칸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당군은 돌궐병 10만여 명을 참수했고,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했다. 포로가 된 힐리 칸과 돌궐인 5만명이 장안으로 끌려왔다. 630년 3월, 항복한 돌궐의 군장들은 당 태종에게 '천칸(天可汗)'이라는 칭호를 올림으로써 막북 최고의 군주임을 인정했다.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원의 군주 '황제'와 막북의 군주 '천칸' 칭호를 동시에 받은 명실상부한 천하의 군주 자리에 오른 것이다. '황제천칸'이 된 당 태종의 자만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이렇게 북중국을 압박하던 동돌궐 세력이 맥없이 무너지자 당의 동서에 포진하고 있는 주변 여러 나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사실 북방의 돌궐세력은 중국 왕조로 하여금 좌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억지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런 억지력이 사라짐으로써 이제 통일된 중원의 힘이 어느 방향으로 팽창해 갈지 모를 일이었다. 고구려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사실 앞서 당 고조만 해도 당시 상황에서 맞추어 고구려에 대해 화평책을 취하고 있었다. 고조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런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분과 실제 사이에는 모름지기 이치가 서로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 고구려가 수(隋)에 신하를 칭하였으나 결국 양제(煬帝)에게 거역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신하이겠는가. 내가 만물의 공경을 받고 있으나 교만하지는 않겠다. 다만 모든 사람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힘쓸 뿐이지, 어찌 칭신(稱臣)하도록 하여 스스로 존대함을 자처하겠는가?"('구당서' 권199 고려전)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배구(裴矩)와 온언박(溫彦博) 등은 "고구려가 칭신하지 않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 주장을 했다. 배구는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을 부추긴 대표적 강경론자였다. 결국 고조도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였는데, 이는 언제든지 당 조정 내에서 고구려에 대한 강경론이 부상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국제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던 고구려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628년에 당이 돌궐을 격파하자 이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고, 또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낸 것도 당과의 화평책을 유지하려는 영류왕의 노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돌궐을 굴복시킨 당으로서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강경한 대외정책이 더욱 확장되어 갔다. 631년 8월 당은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나라 군사들의 유골을 모아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렸다.
사실 631년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파괴한 것이 꼭 고구려를 겨낭한 조처는 아니었다. 628년에 당 조정은 수왕조 시절 전사자의 매장을 지시한 바 있고, 630년에도 돌궐과의 전쟁 이후 장성 이남에서 수왕조 전사자의 수습에 대한 조칙을 내렸다. 그리고 631년 2월에 수왕조 전사자들에 대한 수습 조치를 다시 내렸던 것이다. 고구려가 세운 경관 파괴는 이런 조치의 일환이었지만, 그 경관이 갖는 상징적 의미에서 볼 때 고구려로서는 명백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도 부여성에서 요하를 따라 발해만까지 이어지는 천리장성을 16년간에 걸쳐 축조하였으며, 한동안 당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다.
당시 당의 관심은 서역에 쏠려 있었다. 634년 토욕혼, 638년에 토번(吐蕃), 640년에는 고창(高昌)을 차례로 정복하여 서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나아가 641년에는 돌궐을 대신하여 서북방의 위협으로 떠오른 설연타(薛延陀)마저 정벌하여 서역 일대를 손에 넣었다.
북방과 서방을 손에 넣은 당 태종의 다음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는 분명했다. 고구려는 640년 당이 고창을 정벌했다는 소식에 그동안의 소원한 관계를 청산하고 태자 환권(桓權)을 당에 사절로 파견하였다. 아울러 귀족들 자제를 보내어 당의 국학(國學)에 입학할 것을 청하였다. 사실 백제와 신라가 모두 자제들의 국학 입학을 요청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이런 유화책이 그리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다. 640년 무렵 장안의 국자학(國子學)에서는 8000인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이 배우고 있었다고 하니, 이런 면만 보아도 이미 당의 수도 장안을 천하의 중심지라고 스스로 자부하기에 충분하였다. 다만 영류왕 입장에서 태자를 적국이 될지도 모르는 당에 파견한 것은 어쩌면 인질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당과 적극적으로 화친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당 태종은 이런 고구려의 유화책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당 태종과 그의 군신들 머릿속에는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에서 무참한 패배가 각인되어 있었다. 아무리 고구려가 겉으로는 머리를 숙여도 결코 당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게다가 당 태종은 '황제천칸'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동방마저 직접 자기 손에 넣어 최초로 진정한 '천하'의 군주가 되고 싶은 야망을 가졌고, 또 이를 실현할 힘도 있었다. 당 태종은 동방으로 군대를 이끌 명분만 찾고 있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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