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919150312797
영류왕은 사대주의자인가?
[고구려사 명장면 79]
임기환 입력 2019.09.19. 15:03
642년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집권하였다. 이 사건은 후세에 영류왕과 연개소문을 서로 대척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연개소문을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인물로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영류왕을 대당온건파 혹은 사대적 입장을 견지한 인물로 폄하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채호이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영류왕은 당나라를 두려워하여 비열한 정책을 취한 임금이고, 영류왕을 처단한 연개소문은 영국의 크롬웰과 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크롬웰은 청교도혁명을 일으켜 찰스1세를 처형한 인물이니, 곧 연개소문 역시 혁명가라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한 셈이다.
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영류왕을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왕제(王弟) 건무[영류왕]는 을지문덕과 같이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두 원훈이지만, 을지문덕은 북진남수(北進南守)주의를 지키고, 건무는 북수남진(北守南進)주의를 주장하여, 양자가 서로 다투었다. 영양왕이 죽고 건무가 즉위하여 더욱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니, 수당 교체 시기에 을지문덕 일파 군신들이 그 기회를 타 서북으로 강토를 넓히자고 주장하나, 왕이 듣지 않고 당에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맺고 수나라 말에 포로가 된 중국인을 다 쇄환하며, 장수태왕의 남진 정책을 다시 써 자주 군사를 내어 신라와 백제를 쳤다."
위 글에서 보듯이 신채호는 영류왕이 서북으로 영토확장정책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당과 화친을 맺은 점, 또 같은 민족인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점 등을 들어 비판했다. 하지만 그를 사대주의자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신채호의 시각을 점점 극단화시키면서 언제부터인가 영류왕을 사대주의라고 폄하하는 언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런 견해들은 영류왕이나 그때의 정책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연개소문과 대척적인 인물로 상대화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연 영류왕은 당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사대적 입장을 가졌던 인물일까? 일단 현재 남아있는 단편적인 기록이나마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618년 9월에 영양왕이 죽고 동생 영류왕이 왕위에 올랐다. 영류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영양왕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서에는 영양왕의 왕자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없다. 당시 영양왕이 누린 왕권의 위상으로 볼 때 그의 자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왕이 뒤를 이었다면, 이는 당연히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에 해당될 터이고, 그렇다면 사서에 어떤 흔적이라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흔적이 없음은 영양왕의 직계 왕위계승자가 없었음을 뜻한다.
영류왕은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서 이름은 건무(建武)였다. 영양왕의 직계가 없는 상황에서 당연히 제1순위 왕위계승자였다. 그리고 영류왕에게는 동생이 있었는데, 후일 그의 아들[보장왕]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대양왕으로 추존된 인물이다. 영양왕이 사망한 후 영류왕과 대양왕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개소문이 쿠데타 이후 대양왕의 아들 보장을 왕위에 즉위시킨 사실에서 연개소문과 대양왕계가 서로 손을 잡고 영류왕과 대립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또 건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중요한 또 다른 배경으로는 그가 수양제의 1차 침공 때에 평양성 전투를 지휘하여 수의 수군을 격파한 무훈을 들 수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평양성 전투의 승리로 수의 보급을 차단시킴으로써, 나중에 우중문 등이 이끄는 별동대가 평양성에 도착하였을 때 무력하게 퇴각시킬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을지문덕에 못지않은 승리의 주역인 셈이다. 이 점이 건무가 왕위에 오르는데 무시 못할 요인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영류왕이 수와의 전쟁에서 세운 공훈이 그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영류왕을 사대주의자라거나 당을 두려워해 유화책을 취했다는 견해는 영류왕의 즉위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시각이다.
다만 영류왕이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라는 점에서 혹 그의 모계가 다소 취약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 후일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당시 귀족세력들이 왕권을 제약하는 정치 지형 속에서 영류왕이 대외정책에서 그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였을 개연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대외정책을 살핌에 있어서는 이런 내부의 정치적 조건보다는 역시 당시 중국 내의 정세 변동 등 국제관계를 고려함이 우선이겠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영류왕 재위 기간에 고구려가 당에 대해 전개한 정책을 살펴보자.
619년 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621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622년 당에 사신을 보내다. 수나라 군사 포로 1만여 명을 당에 보내다 623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624년 2월 당에 사신을 보내 책력을 반포해줄 것을 요청하다. 당 고조가 영류왕을 책봉하다. 또 천존상과 도법을 갖고 도사를 보내어 노자를 강의하게 하니 왕 등이 이를 듣다. 625년 사신을 보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오기를 청하니 당고조가 허락하다. 626년 신라와 백제 사신이 고구려가 조공길을 막는다고 하소연하자 당 태종이 주자서를 보내어 두 나라와 화친할 것을 권하니 영류왕이 사죄하다. 628년 9월 당에 사신을 보내 당태종이 돌궐 힐리극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봉역도(封域圖)를 바치다. 629년 9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631년 당이 장손사를 보내어 고구려가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다. 640년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다. 고구려 자제들이 당의 국학에 입학할 것을 청하다 641년 당태종이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다.
위 기록을 표면적으로 본다면 영류왕대에 고구려가 당에 대해 온건화평책을 추구한 것만큼은 틀림없다. 위 기록들이 대부분 중국측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영류왕이 당에 대해 사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에도 충분하다. 그러나 외교란 상대가 있는 것이고, 그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접근한다면, 상대방인 당의 사정을 고려하면서 위의 기록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618년 9월에 영류왕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인 그해 5월에 당 왕조가 건국되었다. 말이 건국이지 사실은 당 고조 이연(李淵)이 수나라 황제 자리를 찬탈한 것이다. 당고조 이연은 수양제 양광과는 이종사촌 관계였다. 수나라 말기 통치체제가 무너지면서 중국 땅 각지에서 반란 세력이 할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615년에 태원유수를 지내던 이연 역시 617년에 반란을 일으키고, 수양제가 강도(江都)에 있는 틈을 타서 수도인 장안에 들어가 수양제를 폐위시키고 황태손인 양유를 황제로 추대하고 자신은 수나라 대승상 자리를 맡았다.
당 고조의 초상. /사진=바이두
그런데 수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하자, 이연은 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왕조를 개창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각지에서는 여전히 군웅들이 할거하고 있었고, 수 왕조 뒤를 이었다는 당나라는 아직은 이런 군웅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영류왕은 즉위한 이듬해 619년 2월에 바로 당에 사신을 보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세력을 떨치는 여러 군웅 중에서 하필 그 멀리 장안에 있는 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명분상으로는 당이 수의 뒤를 계승한 나름 정통성이 있는 왕조라는 점을 고려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외의 배경은 알기 어렵다. 어쨌거나 결국은 당이 다수의 할거세력을 제압하고 중국 대륙을 재통일하였음을 보면, 당시 고구려는 혼란스러운 중국의 정세 속에서도 당이란 존재를 제법 정확하게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백제와 신라는 3년 뒤에야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보냈으니, 고구려가 중국 내 정세에 매우 민감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불과 5년 전까지도 수와 오랜 전쟁을 치렀던 나름의 경험에 의한 것이리라. 오늘 우리들은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영류왕대 고구려의 외교 정책을 무시하기 쉬운데,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런 고구려의 외교적 안목은 결코 가볍이 여길 게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외교 상황을 한번 둘러보시면서 영류왕대와 비교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622년 수나라 포로 송환은 사실은 당 고조가 먼저 제안한 요청이었다. 이런 제안 자체가 상호 포로의 교환을 통해 고구려에 대해 우호적적인 입장을 취하는 당 고조의 외교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영류왕 역시 1만여 명 포로를 송환시켰는데, 나중에 당 진대덕이 사신으로 왔을 때 수나라 포로들을 만났다는 기록을 보면, 이때의 송환된 포로가 일부에 그치는 일종의 유화적 제스처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628년의 봉역도를 바쳤다는 기록 역시 다시 시각에서 생각해 보자. 봉역도를 보낸 것 자체에 대해 당으로서는 고구려가 신속하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고구려 땅의 경계가 어디까지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어 자신의 세력권을 지키겠다는 의지로도 읽힐 수 있다.
물론 624년에 책력 반포를 요청한 것은 고구려가 제후국임을 인정한 행위이다. 즉 책력 요청은 영류왕의 책봉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왕이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이미 장수왕 이래 지속되어온 외교적 행위일 뿐이다. 수양제의 즉위 이후에 책봉을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의 운영원리로 확장하려고 시도하였기에 고구려가 이를 수용하지 못하였던 것일 뿐이다. 그런데 당 고조는 수양제와는 다르게 남북조 시대의 책봉적 질서에 가까운 인식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로서도 이런 정도의 외교적 관계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와 당의 우호적 관계의 변화는 고구려 쪽이 아니라 당 쪽에서 시작하였다. 바로 626년 8월 당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태도가 달라졌던 것이다. 특히 631년 고구려가 수와의 전승 기념을 세운 경관을 파괴하자, 영류왕은 바로 외교관계를 끊고 거의 매년 당에 보내던 사신을 640년까지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은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결코 온건화평책에만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영류왕 집권 전반기에 당에 대해 취한 온건한 외교 정책은 당시의 국제질서를 잘 읽어내고, 동시에 당시 당이 처한 상황에서 당 고조 등이 취한 유화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수와의 대규모 전쟁을 치른 직후 전쟁의 여파를 수습해야하는 고구려 국내의 현안을 고려하면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그 핵심은 상대방이 당 태종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이 인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영류왕의 새로운 과제가 된 셈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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