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3490001


동명왕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고구려의 시조

생몰년 : 기원전 58-기원전 19

재위기간 : 기원전 37-기원전 19


동명왕릉 전경 (출처 : 고구려연구재단)  



일반정보


고구려의 건국시조로서 『삼국사기』에 의하면 재위기간은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이다. 성은 고씨(高氏)이며, 이름은 사서에 따라 주몽(朱蒙)·추모(鄒牟)·상해(象解)·추몽(鄒蒙)·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牟)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들로는 2대 유리왕(瑠璃王)이 되는 유리(瑠璃)와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에 국가를 건설하고 후에 백제의 시조가 되는 온조(溫祚)와 미추홀에 국가를 건설한 비류(沸流)가 있다. 문헌에 전해져오는 건국신화에 의하면 북부여의 왕인 해모수(解慕漱)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사이에서 알의 형태로 태어났으며, 알을 깨고 나와서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여 금와왕(金蛙王)의 아들과 신하들의 시기를 받아 졸본으로 피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전문정보


고구려의 건국시조로서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재위기간은 기원전 58∼기원전 19이다. 성은 고씨(高氏)이며, 이름은 사서에 따라 주몽(朱蒙)·추모(鄒牟)·상해(象解)·추몽(鄒蒙)·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牟)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삼국유사』기이제일 고구려조에는 주몽(朱蒙) 또는 추몽(鄒蒙)이라고 하였고,『삼국사기』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주몽(朱蒙)·추모(鄒牟)·상해(象解),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묘지」에서는 추모왕(鄒牟王)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조에 실린 안승책문(安勝冊文)에서는 중모(中牟), 『일본서기』권27 천지천황(天智天皇) 7년(668) 겨울 10월조에는 중모(仲牟)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신찬성씨록』하지본(下之本) 우경제번(右京諸蕃) 하(下) 고려(高麗)조에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鄒牟) 또는 주배(朱背)라고 하였다. 이렇게 동명왕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한데, 이는 당시에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면서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주몽”이라는 말의 어원은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실려 있는데 그에 의하면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북부여(北扶餘)의 왕인 해모수(解慕漱)였다.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는 그와 정을 통한 뒤 집에서 쫓겨났다. 그 후 태백산(太白山) 우발수(優渤水)에서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를 만나 궁중에 유폐되었는데,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치어 태기가 있어 큰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그것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려도 소나 말이 피해 갔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품어 주었다. 알을 깨뜨리려 하였지만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유화부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에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아이의 골격과 생김새는 영특하여 나이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금와왕의 7명의 아들은 모두 재주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장자인 대소(帶素)와 여러 신하들이 이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유화부인의 권고로 마리(摩離)·오이(烏伊)·협보(陝父) 등과 함께 화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렀을 때 건널 다리가 없었다. 주몽이 강물에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는 중에 군사들이 나를 뒤쫓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너자 곧 흩어져 뒤쫓는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마침내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의 홀본(忽本: 현재 중국 길림성 환인현 오녀산성으로 비정)에 이르러 땅이 비옥하고 산천이 험준한 것을 보고 도읍으로 정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대략 기원전 37년에 해당된다.


그런데 『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조에서는 다른 기사가 실려 있다. 주몽이 북부여(北扶餘)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도착했을 때,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둘째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큰 아들은 비류(沸流)라고 하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그런데 후에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나은 아들인 유리(琉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용납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주(細註)에는 “혹은 주몽이 졸본에 와서 월군녀(越郡女)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或云 朱蒙到卒本 取越郡女 生二子)”고 하여 또 다른 전승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몽신화는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와 비슷하여 일찍이 주목을 끌었다. 동명신화는 중국문헌인 『논형(論衡)』『위략(魏略)』등에 보이는데, 고리(槀離) 또는 탁리국(橐離國)의 왕자인 동명(東明)이 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일한 신화로 보는 견해와 별개의 신화로 보는 견해로 대별할 수 있다.


양자를 동일한 신화로 인식하는 입장은 『논형』에 나오는 부여시조 설화인 동명설화는 기실은 고구려 시조 설화가 중국에 전전하는 사이에 본말이 전도되었던 것이라고 보거나,(김상기, 1984) 고리(槀離)를 구려(句麗) 또는 고려(高麗)를 잘못 베낀 것으로 보아 부여시조 신화는 고구려시조 전설을 거꾸로 한 것으로 파악한다.(이병도, 1959)


이에 반해서 양자를 별개의 신화로 보는 학자들은 부여종족의 동일한 신화가 부족의 분열과 함께 전승과정에서 변화 윤색되어 고구려시조신화, 백제시조신화로 전화된 것으로 파악하였다.(김정학, 1948) 나아가 고구려의 건국전설은 부여의 건국전설을 계승한 것이라고 하고, 동명은 주몽과 다른 뜻을 가진 말로서, 사람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신성한 존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라고 해석하였다.(이지린·강인숙, 1976) 그리고 동명신화는 북부여, 고구려, 백제 등 부여족 일반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동명은 이들 부여족 나라들 전체에서 각기 자기네 시조신으로 숭앙되어 전해 내려온 존재이며,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동명과는 다른 시조, 즉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이나 백제의 구태왕(仇台王) 같이 그 직접적인 왕실의 시조가 별도로 존재하여 모셔졌다고 하였다.(노명호, 1981)


『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전하는 주몽신화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동부여에서 태어났는데도 고구려 왕실의 법통의 근원을 북부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비류국왕 송양과의 싸움에서 항복을 받은 사실을 두고, 『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에 실린 “본래는 연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점차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하였다(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라는 기록과 연관시켜 연노부(涓奴部)는 소노부(消奴部)이며 송양(松壤)은 소노부(消奴部)를 가리킨다고 하여 주몽에 의한 고구려의 건국은 연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교체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6)


고구려는 건국 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건국 후 이듬 해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재위 6년(기원전 32)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고, 재위 6년(기원전 28)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재위 19년(기원전 19) 동부여에서 첫 부인 예씨(禮氏)와 왕자 유리가 도망져 오자 태자로 삼았다. 그 해 9월에 왕이 돌아가니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명성왕은 이후 고구려의 시조로서 받들어져 이후의 왕들은 시조묘(始祖廟)에서 제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김정학, 1948,「朝鮮神話의 科學的 考察(1)」『四海』1.

이병도, 1959,『韓國史』고대편, 을유문화사.

이병도, 1976,『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이지린· 강인숙, 1976,『고구려역사』,평양 사회과학출판사.

노명호, 1981,「백제의 동명신화와 동명묘-동명신화의 재생성 현상과 관련하여-」『역사 학연구』Ⅹ, 전남대학교 사학회.

김상기, 1984,『동방사논총』, 서울대출판부.

이복규, 1998,『부여·고구려 건국신화연구』,집문당.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一 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제1 동명왕 [갑신년에 즉위하여 18년간 다스렸다.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으로 추몽이라고도 한다. 단군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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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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